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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Jul 20. 2017

07. 교토, 눈 내리는 길과 라떼아트

<여행의 취향>

고케시 인형(일본 목각인형)을 두 개 사서는 들뜨고 즐거운 기분으로 언덕을 내려왔다. 뛰다시피 길을 내려오니 동료들은 철학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철학의 길은 교토대학 교수이자 철학자인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郎)가 즐겨 산책하던 길이다. 파리 센 강의 퐁 네프 다리(Le pont Neuf)나 예술의 다리(Pont des Arts)처럼 사실상 평범한 길에 네이밍을 잘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여행을 함께한 연구원 동료 중 몇은 철학 전공이라 이 작은 길을 거니는 마음가짐이 조금은 특별한 것 같았지만 난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소박하고 작은 길은 산책하기에 좋았지만 너무도 평범했다.

철학의 길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되어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곧 그치겠지 했던 눈발은 점점 거세지더니 급기야 펑펑 쏟아졌다. 교토여행을 위해 새로 산 카메라가 고장이라도 날까 코트 안으로 감춘 것도 잠시… 이 눈을 내 눈에만 담자니 아쉬웠다. 우리는 거센 눈발을 온몸으로 맞으며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촬영했다. 아아, 이렇게 펑펑 내리는 눈, 정말 오랜만이다. 보잘것없던 길이 아름답게 변하는 순간이었다.

눈 내리던 철학의 길


마법 같은 그림이 계속 이어졌다. 교토가 서울보다 따뜻하다고는 하지만 겨울바람에 눈까지 내리는데 새빨간 꽃이 피어 있었다! 꽃은 하나의 덤불을 이루고 있었다. 이 겨울에 이런 붉은빛이라니, 믿을 수 없어 카메라를 들이밀었지만 사진이란 실제의 감동을 담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사물이다.

기대 없이 걷던 길에서 예상 못 했던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우리는 즐거웠다. 철학의 길 주변에는 들어가서 몸을 녹이며 따뜻한 차 한잔 꼭 마시고픈 예쁜 카페가 많았다. 점점 세기와 강도를 더해 가는 눈 덕분에 앞이 안 보여 걷는 게 힘들어져, 우리는 철학의 길 끄트머리에 자리한 찻집으로 들어갔다.


요지야 카페. ‘요지야’는 일본의 유명한 화장품 브랜드이고, 요지야 카페는 이 브랜드에서 만든 카페 브랜드다. 입구로 들어가 예쁘고 정성스레 꾸며놓은 정원을 지나면 한쪽에는 카페가, 좀 더 안쪽에는 화장품 매장이 있다. 카페 1층 카운터 앞에는 케이크, 쿠키, 초콜릿, 스티커 등 이 브랜드의 다양한 제품이 진열돼 있었다. 초록색 쿠키 상자에 그려진 여인은 요지야 브랜드의 캐릭터. 눈매가 가늘고 매서운 게 조금 무서워 보이기도 하고, 전통적인 미인상인 것도 같다.


2층으로 안내되어 올라가니 전망 좋은 통유리창이 인상적인 전통 일본식 주택이다.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아기자기한 일본식 정원, 정원 위를 하얗게 덮은 눈, 멋진 풍경이다.


일본 전통차를 주문하려다 녹차라떼에 그려주는 라떼아트가 인기라는 말을 듣고, 녹차라떼를 주문했다. 녹차라떼에 요지야 캐릭터인 여인을 다소곳이 그려준다. 청아한 미가 인상적이지만 역시 좀 무섭다. 무서운 얼굴을 마시기가 좀 거북하고, 이 얼굴을 어디서부터 없애야 하나 주저하고 있으니, 동료가 입부터 없애라는 무서운 제안을 했다.


동료 말대로 입 부분부터 마시니 여인의 모습은 더욱 무서워졌지만, 부드러운 스팀밀크와 쌉싸름한 녹차 맛이 어우러져 혀끝에 닿는 식감이 좋고, 온몸이 따뜻해져 왔다. 편안한 행복감이 깊게 밀려들었다. 철학의 길에 들어설 때만 해도 기대하지 못했던 감정이다. 역시 공간은 그 자체보다, 무언가 이야기가 담길 때 매력적이다. 눈이라는 이야기가 담긴 공간에서 뜻밖에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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