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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Jul 24. 2017

10. 나에게 주는 시간 (마지막 회)

<여행의 취향>

나는 늘 인연 맺기를 좋아한다. 돌아다니는 것도 즐긴다.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가는 것 그리고 맺은 인연을 지켜가는 것, 즐겁고 귀한 일이다. 특히 길 위에서 만나는 인연은 특별하다. 많은 우연과 필연이 겹쳐야 만날 수 있는 게 길 위의 인연이기에 더욱 소중한 거다. 언젠가부터 혼자 떠나는 여행이 좋아졌지만, 혼자 한 여행에서 혼자였던 적은 거의 없다. 사람을 좋아하고 인복이 많아서인지 가는 곳마다 좋은 인연이 함께했다. 많은 인연과 스치고 만나고 즐겨온 여행이었다. 그렇게 홀로 여행하는 시간이 쌓이며 자연히 외로움에 대한 부담이나 혼자인 데 대한 두려움은 더욱 엷어졌다. 게다가 그 누굴 만나지 않는다 해도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나는 늘 나와 함께하고 있으니까.


인연을 소중히 하면서도 나는 여행과 일상에서 나 자신에게 시간을 주길 좋아한다. 아무도 없는 시간, 비우는 시간이다. 곁을 비우고 마음을 비우며 머리도 비우는 시간이다. 목적도 이유도 없는 시간 안에 나를 가만히 놓아둔다. 홍콩여행 중에는 소호에서 그런 시간을 가졌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가다 에스컬레이터 오른쪽에 마음에 드는 카페를 하나 발견했다. 마침 바로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리는 출구가 있어, 그 카페로 가 길에 면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푸짐한 브런치와 커피를 주문했지만, 식사는 둘째였고 나에게 시간을 주고 싶었다.


가장 친한 대학 친구와 함께 떠난 홍콩여행. 나처럼 홍콩이 처음이었던 꼼꼼하고 착한 친구는 맛집 예약이며 길 안내까지 도맡아 딱 부러지게 잘해 주어, 홀로 다녔다면 시간이 더 들었을 길을 쉽고 빠르게 갈 수 있었고, 전망 좋은 레스토랑에서 여행 첫날 저녁을 근사하게 보낼 수도 있었다. 누군가와의 여행이 참 오랜만이었고, 그 누군가가 취향과 성격이 잘 맞는 이 친구여서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난 약간 피로했다. 조금 늦더라도 내가 찾은 길과 식당, 여행지는 내게 더 큰 재미와 의미를 주었을 거고, 나는 홀로 걷고 지내는 시간이 잠시라도 필요한 사람이었다. 친구도 나와 같은 피로를 느끼고 바람을 가졌던 것 같다. 우린 서울로 귀국하기 전 반나절이나 하루 정도 따로 시간을 갖자는 데 생각을 같이했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비워지는 시간을 줄 장소로 소호를 선택했다.


여지없이 길을 헤맸고 땀범벅이 되어 간신히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찾았다. 그래도 헤매고 늦었다고 누군가에게 미안해할 필요가 없었고, 심지어 작은 성취감마저 느꼈다.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맡기고 소호를 경험했다. 그러다 발견한 그 작은 카페에서 내게 비우는 시간을 주었다. 


길을 오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보며, 혼자 먹기에는 많은 브런치를 먹고 진한 커피를 마시며 손에서 놓질 않던 카메라도 잠시 옆에 내려놓았다. 수첩을 꺼내 기록을 하려다 그것도 그만두었다. 습관처럼 뭔가를 하려는 것을 의식적으로 눌렀다. 넋 놓고 앉아 있다가, 다시 길을 헤매며 소호를 거닐고, 지치면 에스컬레이터를 타거나 상점 안으로 피신했다. 특별히 찾을 의미도, 목적도, 이어갈 여정도 없었다. 그저 비우고 놓으면 되는 시간이었다.


그날 저녁, 날 만나러 친구가 소호로 왔을 때, 나는 보다 편안해지고 밝아져 있었다. 비우는 시간은 피로감을 덜어줬고, 날 이전처럼 즐겁고 단단한 여행자로 돌아오게 했다. 소호에서 보낸 시간은 목적 없이 찰나로 기록된 사진으로 설명된다. 그 순간 어떤 생각으로 그런 사진을 찍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생각이 없었을 거다. 찰나적인 단상을 담은 사진을 보며 내게 주었던 시간을 상기한다. 그저 비워내며 놓아두며 내게 주었던 시간을. 나를 나답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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