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의 이력서>
타파웨어 CEO, 릭 고잉즈 이야기 2
일리노이 주 그레이트 레이크 해군센터에서 훈련을 마치자마자 고잉즈는 새로 배운 기술을 실전에 투입했다. 1960년대 초반이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의 시대였고, 미국은 소련과 전면 해군전을 벌이기 직전이었다. 고잉즈는 플로리다 주 메이포트에 기지를 둔 미국 해군전함 파워호에 배치됐다. 목적지는 관타나모였다.
“관타나모에서는 보수교육을 나갔던 것이 기억납니다. 소련 잠수함을 찾아내기 위한 작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잠수함 위에 붙어서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기도 했죠. 소련군 두 명이 갑판 위로 올라와 손으로 욕을 하고 다시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고잉즈가 탄 전함이 진짜 대치 상황을 만들지는 않았다.
고잉즈가 해군에서 복무한 시간은 베트남전 시기와 우연히 겹친다. 수십 년 동안 미국을 괴롭혔던 군사도발이었다. 전쟁 기간 동안 고잉즈는 홍해에 배치된 대잠수함 폭파부대 소속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에는 잠수함이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잉즈는 지역에 배치되지 않았다.
“저는 배의 지휘센터인 함교에 배치되었습니다. 이른바 쿼터 마스터(quarter master)라는 것이었죠. 우리 위치를 알아내는 임무를 맡았어요. 함선 밖을 관측해 항로를 계획하고, 배 뒤쪽의 전투 정보센터에 알아낸 것을 전달하곤 했습니다. ‘위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이런 모든 상황이 나중에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런 도움이 되는 경험으로 상황이 실제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추가되는 것은 거의 없었지만 상황이 저를 다음 단계로 이끌었죠.”
고잉즈는 전선을 떠나 해군 복무를 무사히 마쳤다. 불안정한 십대에서 그는 나중에 그에게 도움이 될 재능과 의식을 갖춘 자신 있는 청년으로 성장했다.
현역으로 2년 동안 해군 복무를 마친 스물한 살 때, 고잉즈는 결국 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해군 예비군으로서의 복무 기간은 아직 4년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제대군인원호법 덕분에 고잉즈는 길포드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역사학을 주 전공, 종교학을 부전공으로 고잉즈는 평균 열여섯 명 쯤되는 작은 수업들을 들었다. 그는 스스로 주제를 탐구하는 것은 좋아했지만(지금도 그렇다) 대학의 수업 과정은 너무 느리다고 생각했다.
사진: Freepik.com
그래서 그는 다시 비즈니스로 복귀했다. 이번에는 스톡튼스(Stockton’s) 남성의류·가구 매장의 영업사원이었다. 한 주에 40시간 일하는 자리였다. 이 경험을 떠올리면서 그는 타파웨어처럼 세일즈와 디자인 모두에 의해 견인을 받는 사업체의 리더가 되는 것을 필수적인 디딤돌로 봤다. 매일 매순간 고객들과 직접 접촉하면서 고잉즈는 편안했던 곳에서 벗어났고 내성적인 자아도 버리게 되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서비스 고객만족의 중요성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패션의 세계에서 고잉즈는 디자인과 스타일 감각을 기를 수 있게 되었다.
고잉즈가 짜놓은 계획만으로도 이미 할 일이 많은데, 로스쿨을 졸업한 친구 하나가 사업 아이디어를 하나 가지고 왔다. 화재경보기 회사를 세우자는 계획이었다. 당시에는 신선한 아이디어였고 그는 고잉즈의 도움을 원했다. 고잉즈는 기쁘게 도전했고 처음에는 대학 다니기, 의류 매장에서 일하기, 사업체 설립 준비라는 3개의 풀타임 업무를 병행했다.
일은 훌륭하게 진행됐다. 그는 동료 학생들을 고용해 화재탐지기를 팔게 했다. 당시에는 화재탐지기가 흔하지 않았다. 고잉즈는 4학년 때는 학교를 그만두고 그의 벤처사업에 풀타임으로 전력을 투구했다. 그렇게 해서 충분하고도 넘치게 돈을 벌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더라면 그는 분명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1년이 안 돼서 이 회사는 가치로 보았을 때 별 방향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고잉즈는 말했다.
고잉즈는 파트너와 갈라선 후 그의 멘토이자 지원자인 짐 디터(Jim Deter) 도움을 받아 버지니아 주 샬롯빌에 다이내믹스(Dynamics)라는 회사를 세웠다. 흥미롭게도 여기서부터 고잉즈의 경력이 전형적인 CEO의 경력으로읽힌다. 가장 큰 차이점은 그의 이전 경험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전 경험은 특혜 받은 교육과 아이비리그 대학, MBA 경력이었을 것이다. 고잉즈에게는 파탄 난 가정, 6년간의 해군 복무, 대학 중퇴였다.
“저는 스물네 살이었습니다.” 20대 중반을 회상하며 그는 말했다. “제가 세운 회사의 CEO였죠.”
그 뒤 15년 동안 그는 전 미국에 수백 개의 프랜차이즈 지점을 설립해 회사를 크게 확장시켰다. 성공 스토리는 마지막이 되어서야 나온다. 연방정부가 화재탐지기 설치를 의무화하고 많은 기존의 경쟁자들이 이 분야에 진출했을 때 고잉즈는 회사를 떠나면서 주식을 팔아버린다. 이 이야기의 뒷부분은 쉽게 이해가 간다. 고잉즈는 어느 정도는 직접 판매 제국을 세울 수 있었다. 그가 파는 제품인 화재탐지기가 시장에서 새로운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진짜 수요에 부응하는 제품을 가지고 있으면 전국적인 확장은 확실히 가능해진다. 하지만 고잉즈가 팀에서 가장 형편없는 직접 판매원에서 나라에서 가장 성공적인 직판 판매인 중 한 명으로 진화하는 데 어떻게 성공했는지는 이해하기가 매우 힘들다.
“내성적인 성격이라서 파는 데는 별로 재능이 없었습니다.” 그는 말했다. “하지만 제 강점은 다른 사람들을 발전시키고 나를 위해 세일즈를 해줄 사람을 채용하는 데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타고나지는 않았지만 고잉즈는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는데 익숙해졌다. 그는 “요즘은 1만 명 앞에서도 괜찮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대중문화계에서 인기 있는 사람들을 언급하는 것을 좋아했다.
“사람들은 자니 카슨(Johnny Carson: 미국의 심야 토크쇼 진행자)에 대해 말하곤 했습니다. 그 사람도 사회화된 내성적인 사람이죠. 카메라가 꺼지면 카슨은 자신만의 시간을 갖습니다. 저도 그렇죠.”
고잉즈는 “30대 내내 좋은 시기와 나쁜 시기를 두루 겪었습니다”라고 회상했다. 좋은 시기는 어느 정도 비즈니스가 성공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사무실이 버지니아대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성공에 다가설 수 있었다. 학교를 중간에 그만두긴 했지만 그는 아직도 “원하는 아무 수업이나” 들을 수 있었고, 그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건 다이내믹스가 팔렸을 때 새로운 일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는 이미 직접 판매 분야에서 알려진 이름이었고, 과감한 기업가였으며, 평판이 좋고, 제대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세일즈맨 집단과 함께 회의실 앞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직접 판매의 공룡, 에이본(Avon)은 두 번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고잉즈에게 자리를 제공하고 몇 년 안에 중역 자리를 줄 것을 약속했다. 먼저 그는 맨해튼을 맡았다. “처음에 저는 거기 있는 동료들이 저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곧 저도 똑똑하다는 것을 깨달았죠.” 그리고 뮌헨에서 독일 영업 활동을 했다. ”처음에는 ‘구텐 탁(Guten Tag)’도 말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것이 지나자 마법 같은 시간이 왔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홍콩에서 그룹의 부사장이자 태평양 지역 수석 운영책임자로 아시아 지역의 성공적인 영업을 성장시킨 후, 미국 에이본 회장으로 일했다. “제가 도착했을 때 이미 6억 달러 매출을 이뤘어요. 하지만 우리는 많은 것을 이어받았습니다.”
고잉즈는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뮤지션 같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맥주캔을 던지는 주차장과 바에서 연주를 하죠. 하지만 그 다음에는 사람들이 라이터 불을 흔드는 대형 공연장에서 연주를 하게 됩니다.”
후계자로서의 고잉즈의 상승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막판에 회장은 고잉즈를 그의 후계자로 삼는 것에 대해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됐다. 고잉즈는 “사람들은 회장이 제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막판으로 치닫는 상황은 미드타운 맨해튼에서 열린 에이본 본사에서 열린 이사회에서 시작되었다.
“우린 둘 다 연설을 했어요. 하지만 아무도 회장에게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좋지 않은 조짐이라고 느꼈다. 그것은 그가 그의 상사를 자신의 그림자 안으로 밀어 넣고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제가 여기서 나가기를 원하십니까?” 고잉즈는 의장에게 물었다. 주말이 지나고 고잉즈는 마지막 답변을 받았다. 의장은 “그렇소. 당신이 여기서 나갔으면 좋겠소.”
고잉즈는 엄청난 액수의 퇴직금을 받았다. “비즈니스가 잘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해고됐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새라 리(Sara Lee)를 잠깐 거쳐 고잉즈는 1992년 타파웨어 월드와이드 대표로 고용된다. 국제 영업에 대한 성공적인 결정들이 계속된 후 그는 결국 1996년 타파웨어의 CEO로 승진했다.
떠오르는 시장에 집중한 그의 결정에 따라 회사는 곧 미국 밖에서 10억 달러의 순이익을 올릴 수 있게 됐다. 20년 지난 지금 고잉즈는 아직도 회사를 책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