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자고 결혼했을까>
숙년기가 되면 파트너와의 관계는 성적 욕구나 육아가 관계를 지탱하던 시기와 사뭇 다른 성격을 띤다. 에릭슨의 지적에 따르면 이 시기는 인생의 완성기를 맞이하기 위해 통합을 이루어가는 단계다. 이제까지 힘써온 여러 과제나 행위가 그 사람만의 형태로 결실을 맺는다. 즉, 자식과 가족을 위하는 삶의 방식에서 자신을 위하고 나아가 자신을 유용하게 쓰는 사명을 위하는 삶의 방식으로 이동해간다. 그에 따라 부부나 파트너의 존재 의의도 자식과 가족을 생각하는 시점에서 자신다운 삶의 방식을 생각하는 시점으로 변해간다. 인생의 가을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결실의 시기를 진정 관대한 마음으로 함께할 수 있는 상대인지 아닌지 재차 묻게 된다. 거기에서 열쇠를 쥐는 것은 정신적인 공유다.
공감과 배려 같은 마음의 공유, 취미와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관심의 공유, 나아가 인생에서 무엇을 소중히 하는가 하는 가치관의 공유, 이 세 가지의 공유가 지금까지보다 한층 더 중요해진다. 공유하는 것이 별로 없는 경우에는 자아 완성을 방해하는 존재로 느껴져 두 사람의 관계는 위기를 맞이한다.
그때까지 역할을 분담해온 부부는 일과 육아 부담이 줄면서 분담보다는 공유에 중점을 두게 된다. 그러므로 두 사람 사이에 공유가 잘 이뤄지지 않는 경우에는 육아와 일에 매달리던 시절보다 더욱 큰 차이를 느끼게 된다. 최근 늘고 있는 황혼이혼의 위험이 닥쳐오는 것이다.
아이를 낳는 생물학적 속박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완전히 다른 형태의 사랑을 가능하게 한다. 결혼과 섹스처럼 서로 속박하는 관계를 넘어, 자유로움과 정신적인 교류를 중심으로 서로 받쳐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나이가 되었을 때, 오드리는 비로소 생물학적 굴레에서 자유로워져 진실로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또 어린 시절부터 쭉 갈망하던 존재를 만날 수 있었다. 자신만을 생각하고 항상 곁에 있으며 다정하게 지지해주는 존재를 만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의 결혼 실패로 깊은 상처를 받은 오드리는 세 번째 만난 연인의 진심을 믿지 못했다. 결혼이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으면 배신당해 상처받거나 이혼이라는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된다. 소중하다고 생각할수록 더 이상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작용했을 것이다. 로버트는 그런 오드리의 불안을 이해하고 오드리가 원하는 대로 따랐다. 바꿔 생각하면 오드리는 로버트와의 관계에서 비로소 자신이 주도권을 쥐는 사랑의 형태를 실현한 것이다. 그전까지 그녀의 사랑은 남자들의 의사에 따르거나 그들이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사랑이었다. 오드리가 겪은 사랑의 단계는 의존하고 지배받는 것밖에 몰랐던 그녀가 자신을 확립하고 주체성을 갖게 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사랑은 그 사람의 성숙 단계를 따라 형태가 변한다. 파트너를 바꿔서 실현되는 경우도 있지만 똑같은 파트너와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그런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처음에는 남편에게 종속되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랐던 아내가 점차 자기 자신을 자각해 남편에게 자기주장을 하고 남편과 대등한 관계를 요구하거나 오히려 남편을 통제하려 드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 변화를 이룬 것은 행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새로운 관계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이제껏 익숙하던 파트너가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처럼 부부 사이가 좋아지고 신선함을 되찾는 경우도 있다. 파트너를 바꾸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이 같은 과제를 마주하고 관계를 재정립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두기 바란다.
성욕이 쇠퇴하면서 빛이 바래고, 가임기를 넘어서면 존재 이유를 상실한 듯 죽어가는 사랑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랑도 분명 존재한다. 숙년기에 다다랐을 때 비로소 손에 들어오는 새로운 단계의 애정이 존재한다. 그 연령이 되고 나서 맺어지는 파트너와는 자손을 남기려는 생물학적인 올가미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다. 때문에 정신적인 결속감이 한층 더 강해진다. 가히 진정한 애정이라 부를 만하다. 그 연령이 돼서야 진정한 사랑을 만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