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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Aug 22. 2017

05. 마릴린의 침실 (마지막 회)

<트렌드 인문학>

“학생, 동서양의 향과 향수를 다루는 태도와 문화에서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이 될까요?”

어느 날 꿈에 나타난 고교시절 은사였던 선생님은 나에게 이렇게 질문하셨다. 뒤죽박죽이 된 꿈이라 깨어나고 나서 그 즉시 대부분을 잊어버렸지만 내 눈을 정면으로 또렷이 응시하며 질문하셨던 목소리는 여전히 잊히질 않는다. 문득 나는 선생님의 질문이 선생님이 나에게 한 것인지, 내 생각을 선생님이 대신 읊으신 것인지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왜 선생님은 내게 이런 질문을 한 것일까?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내 머리 속에 맴돈 질문에 나는 해답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해답을 이제 어렴풋이 얻은 것 같다. 지금은 이 이야기를 나의 가장 사랑스러운 고양이 네로에게 들려주는 중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1cm만 낮았더라면 세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는 파스칼의 명언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된다. 파스칼은 시대를 얻고자 노력했던 그녀의 마성(魔性)을 코에 비추었다. 이를 연기한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미모도 클레오파트라에 견주어 절대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클레오파트라의 미모와 아름다운 자태와 겨뤄 한 가지는 늘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녀의 몸과, 그녀가 움직이는 길에 어김없이 나타났다가는 홀연히 사라지는 향기였다. 더구나 그 향은 생전 처음 맡아보는 마법과도 같이 치명적이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수중에 많은 향수를 지니고 있었지만 늘 클레오파트라의 것과 비교해 무르지 않을까 했다. 아니 무르다고 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클레오파트라의 명약이 필요했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나온 향유(香油)라도 구해야 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는 매끈한 피부와 백옥같이 눈부신 살결과 세계 최고의 드레서(dresser)와 시종들이 받쳐주었다. 하지만 한 가지 구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클레오파트라의 죽음과 함께 자취를 감춰버린 그녀만의 향이었다.

환경을 다루는 마지막 챕터로 이번에 마주할 여정은 향과 향수에 관한 이야기이다. 

에덴의 동산에서 아담은 이브가 건네준 사과를 받는다. 그리고 한 입 베어 물었다. 아담은 자신의 갈비뼈에서 자라난 이브에게서 받은 사과가 죄의 씨앗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뱀은 세상에 갓 나온, 아무것도 모르는 이브를 속이는 건 너무 쉬웠다. 아니 쉬운 게 아니라 심심할 정도로 밋밋했다. 이브는 아담에게 탐스럽고 매끄러운 둥근 사과를 건네고 자신도 함께 먹었다. 만약 이브가 아담에게 건넨 것이 사과가 아니라 계수나무였다면, 호랑이풀과 라벤더 한 다발이라면 어떠했을까? 히아신스와 백합이라면, 붉은 장미 한 묶음이었다면 아마 인류의 역사는 지금과 달라도 한참이나 달라졌을 것이다.

이브가 건넨 이 사과는 이후 백설공주를 잠들게 한 마녀의 계략으로, 헤라(Hera)와 아프로디테(Aphrodite), 아테나(Athena)의 싸움으로, 한 입 베어 문 그 자취 그대로 애플(apple)의 로고로, 지금 여러분 손에 쥔 아이폰을 휙 뒤집어보면 금방 마주할 수 있다.

지구의 중력을 알아챈 뉴턴도 사과의 마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사과를 가리켜 ‘은은한 향기’, ‘향기 나는 것’으로 부르던 히브리 사람들의 이야기를 오늘에 언급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것은 후각이 미각과 시각에 비해 여전히 홀대받고 있음을 나타내는 사사로운 증거이자 어리숭한 인간을 드러내는 재료로 읽힌다.

천혜의 미모를 자랑하던 마리 앙투아네트, 그녀가 루이 16세와 함께 들불처럼 번져오는 죽음의 마수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칠때 그녀의 앞길을 막은 것은, 아뿔싸! 다량의 쟁여놓은 향수였다. 이른 새벽 튈르리 궁전(Palais des Tuileries)을 빠져 나와 바렌(Varennes)까지 무사히 거소를 옮겨 갈 길을 재촉하던 탈출의 결행은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향기로 인해 꼬리가 잡혔다. 평상복으로 위장하고 신분이 들통 날까 거동에 무척 신경을 썼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를 미처 지우지 못했다. 똑똑한 시종 한 명이 “마마, 향수는 아니 되옵니다. 당분간이라도 멀리 하옵소서” 하고 재차 귀띔해 주었다면 그렇게 허망하게 잡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향수에는 이렇게나 많은 사연들이 담겨있다. 향과 향수의 시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류 문명이 이제 막 꽃봉오리를 틔우는 순간과 마주한다. 석가모니의 관욕(灌浴)과, 이집트 미이라의 무덤과, 일리아스 오디세이아(Ilias Odysseia)의 노래와, 그리스 로마제국의 연회와, 폼페이 저택 프레스코화와, 살라딘(Saladin)의 장미수(薔薇水)와, 교황 갈리스토 2세(CalixtusⅡ)의 미사와, 프사그다(Psagda), 메갈루스(Megallus), 장 루이 파르종(Jean-Louis Fargeon)에 이르는 조향사들까지 더해진다.

지금 독자 손에 꼭 쥐어진 작은 향수병도 이 세월의 파고를 결코 거스르지 못한다. 향과 향수는 자연이 준 선물이자 창과 방패로 무장한 정복자의 꿈이었고, 분루(憤淚)를 삼켜야 했던 패장의 낙담이자 시련이었다. 피비린내 나는 전장(戰場)에서 스러져간 많은 무명용사의 운명을 구한 것은 물질에서 향 분자를 추출해 낸 화학자 어거스트 조르쥬 다르장(Auguste Georges Darzens)과 에드몬드 블레이즈(Edmond Blaise)의 신실한 노고 덕분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향과 향수는 자연이 인간에게 선사한 마술램프이다. 백단향, 몰약, 소합향(蘇合香), 샤프란, 동백나무, 용연향, 치자나무, 아카시아 등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재료들이 왕실과 궁궐, 귀족들의 연회와 사교에 함께했다. 향과 향수가 없었다면 제단도, 구중궁궐(九重宮闕)도, 황제를 기쁘게 할 노랫가락도 아마 흥과 빛을 잃었을 것이다. 동방박사가 예수를 영접하고 마릴린 먼로가 자신의 가슴골에 샤넬 No.5를 품을 때도 어김없이 마법은 피어올랐다.

마리 퀴리(Marie Curie)는 보이지 않는 물질 라듐(Radium, ₈₈Ra)을 발견해 내기 위해 피에르 퀴리(Pierre Curie)의 실험실에서 그 단순한 작업을 4년간이나 묵묵히 수행했다. 향기 역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당신은 특정 냄새를 기억해 낼 수 있는가? 당신이 기억해낼 수 있는 것은 기억에 새겨진 냄새들이다. 그대는 전혀 새로운 냄새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 한 번도 맡아보지 않는 천상의 냄새를? 마리 퀴리는 새로운 물질을 추출하기 위한 우라늄의 분리 정제 실험을 반복했고 수천 번의 시도는 결국 1907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이라는 쾌거를 안겨준다.

남편 피에르가 가장 기뻐한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라듐과 폴로늄의 연구를 지속해 1911년에는 노벨화학상을 거머쥔다. 이번에는 단독 수상이었다. 노벨상 제정이후 서로 다른 영역에서 두 번의 노벨상 수상은 마리 퀴리가 처음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라듐을 발견해 낸 그녀의 공력이었다. 향도 이와 다르지 않다. 냄새 역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에르네스트 보(Ernest Beaux)는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Bonheur Chanel)을 위해 세기의 걸작인 사넬 No.5의 분자식을 합성해 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 천재 조향사는 자신이 내놓은 불멸의 조합을 뛰어 넘는 천상의 향기를 더는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럼 에르네스트 보는 왜 또다시 불멸의 조합식을 만들지 못했을까? 남은 평생의 시간동안? 그 이유는 그가 만들어낸 샤넬 No.5의 분자식이 당초 그의 의도와 계산과는 어그러졌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샤넬의 구애에 응한 그는 새로운 향을 조합하던 중 그만 실수로 알데히드 용액을 잡은 손이 미끄러졌고 공교롭게도 그것이 듬뿍 녹아든 용기에서는 그가 미처 생각지 못한 향이 피어올랐다. 그가 당초 마련해 놓았던 골격은 그대로인 채 향의 풍미와 품격이 더해졌다. 가브리엘 샤넬의 코도 이를 놓치지 않았다. 여러 시향 샘플 중 가브리엘 샤넬의 선택을 받은 것은 그 용기였다. 위대한 실수가 낳은 불멸의 아이러니였다.


그렇다면 의문이 남는다. 불멸의 향기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조합할 수 없다는 걸까? 마리 퀴리는 정답을 찾기 위해 우라늄의 분리정제를 반복했고 기어이 새로운 물질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반면 새로운 향기를 구상한 에르네스트 보의 실험은 그 위대한 실수가 아니었다면 현재의 샤넬은 없었다. 그 향은 지금과 다른 샤넬 No.5였을 것이고 지금까지 이어져 온 대중의 지지도 보장받지 못했을 것이다. 조향사는 인간이 아닌 개 코가 백 번 낫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이 인간이 향을 창조할 수 있는 최대치이자 한계다.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의 끝을 알게 되면 인간도 동물도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 인간은 화성과 목성에 지구인이 거주할 진지를 구축해 낼 수는 있지만 개 코가 아닌 이상 냄새의 창의력은 주어진 신체의 능력을 벗어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낙담할 것까지야 없다. 위대한 실수는 얼마든지 또 나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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