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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Aug 25. 2017

04. 여덟 살까지는 무조건 방임하는 것이 좋을까?

<칼 비테 교육법>

몇몇 곳에서는 모래를 던지는 불행한 일이 관습이 되었다. 그런 관습은 장난으로 시작해서 끔찍한 일로 변해버렸다. 한 아이가 우연히 몸을 돌리는 순간 다른 아이가 모래를 던진다. 그렇게 한 아이가 파편과 잔돌이 들어 있는 모래를 움켜잡고 다른 아이가 잽싸게 모래 덩이를 바로 눈으로 던진다. 이런 일로 눈을 다치지 않고 아프기만 해도 다행이다. 보통 이런 경우 가장 격렬한 싸움으로 번진다.

다른 곳에서는 겨울에 눈뭉치를 던지는 것이 다반사다. 적절한 선에서만 눈싸움이 벌어지면 누가 반대하겠는가. 부드러운 눈뭉치를 던지는 것은 즐거운 장난으로 노련함과 민첩성, 집중력을 길러주고 심신을 단련시켜준다. 하지만 눈뭉치가 점점 단단해진다. 많은 남자아이들이 양손으로 오랫동안 제대로 눈을 뭉친다. 작고 촉촉하게 눈을 뭉친 다음 얼려두고 싶은 곳에 몰래 줄지어놓는다. 그런 눈뭉치를 등이나 가슴에 맞으면 엄청나게 고통스럽다. 하지만 얼굴이나 눈에 정면으로 맞으면 어떻게 될까. 그 눈뭉치를 가져간 악동은 분명히 상대를 정확히 맞힐 수 있는 가까운 곳에서 온 힘을 다해 던질 것이다.

그런 경우 피가 철철 흐르고 평생 코나 눈에 상처가 남는다.

나는 장난기 어린 싸움이 심한 부상이나 폭력적인 싸움으로 발전하는 것을 자주 지켜보았다. 끔찍하게도 언제나 학생 하나가 떠오른다(그 아이의 이름은 뮐러였다). 그 아이는 학교 옆의 공터에서 친구들과 잡기 놀이를 했다. 그 공터는 담으로 에워싸여 있고 나무나 건물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뮐러는 아주 능숙하게 다치지 않고 한참 동안 뛰어놀았다. 나는 그 아이가 염려스러웠지만 너무 멀찍이 있었기에 말릴 수가 없었다. 그 아이는 잡기 놀이를 하면서 쏜살같이 달아났던 것이다.

사진: Freepik.com 


이제 그 아이를 쫓는 아이가 가까이 다가갔다. 그 아이는 도망치기 위해 학교 건물로 달렸다. 문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 문들은 아래위로 빗장이 단단히 채워져 있었다. 뮐러는 달렸다. 있는 힘껏 달렸다. 아이는 학교 입구로 돌진하면서 문을 열기 위해 머리를 돌렸다. 그렇지만 아이는 이미 너무 문 가까이에 있었다. 전속력으로 달리던 아이는 빗장이 채워진 문에 튀어나온 못에 이마를 부딪혔다. 순간 얼굴에 피가 흘러내리고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가 나더니 아이가 바닥에 쓰러졌다.

어떤 남자아이가 어쩌다 사지가 마비되었는지, 불구가 되었는지, 얼굴에 울퉁불퉁 혹이 나거나 상처가 났는지, 눈에 종기가 났는지, 애꾸눈이 되었는지, 자세히 살펴보면 모든 일은 길에서 벌어졌다. 더욱 흔하게 듣는 대답은 부모가 그런 일이 일어난 것조차 제대로 모른다는 것이다. 남자아이가 부모에게 사고를 숨기는 바람에 심지어 시기적절하게 의사의 진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부모 탓에 아이들 대부분이 의사를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나는 이런 불행을 잘 알고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길에서 노는 것이 위험하다고 해도 나는 아이를 언제나 방구석에 앉아 있게 하기보다는 길에서 뛰놀게 할 것이다. 다행히도 위험을 이겨낸 사람들은 부드러운 눈뭉치에도 겁을 집어먹고 가랑비나 서늘한 바람에도 병상에 눕는 사람들보다 좋아 보인다.

어리석게도 다음과 같이 말하는 아버지나 교육자에게는 재앙이 내리기를 바란다.

“내 아들은 여덟 살까지는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될 겁니다. 그때까지 보모나 어머니에게 맡겨야죠.”

이상의 모든 것에서 자녀교육은 아주 일찍 시작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얼마나 일찍 시작해야 할까요?”라는 물음에 우리는 결국 자신에게 돌아간다. 우리 몸과 지성과 의지(아버지와 어머니 모두)에 주목하자. 우선 우리의 몸과 지성을, 다음으로 의지를 조절하는 법을 배우자. 심지어 아직 자식을 낳지 않았을 때도. 옥외 운동을 자주 하고 깨끗한 물을 자주 마시는, 소박하고 검소하고 절약하고 만족하는 행복한 삶이 대개 아이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과 지성을 균형 있게 길러주는 최선의 수단이다. 남자는 최대한 자신을 단련해야 한다. 그리고 몸이 건강하고 정신력이 뛰어나고 선의를 지닌 아내를 자력으로 선택해야 한다. 그러면 아이는 몸이 건강하고 정신력이 강하고 선의를 품을 것이다.

이에 반대 의견이 쏟아진다. 누군가 “내 상황에서는 돈을 위해 결혼해야 한다.” “내 아내의 뛰어난 친척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과 같은 안정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내 아내가 얼마나 춤을 잘 추는지 반해 버렸다.” “영리하고 기지 넘치는 대화로 인해 내 아내에게 흠뻑 빠졌다.”라고 말한다. 또 “나는 아내를 사랑했다. 나는 아이를 위한 엄마가 아니라 나를 위한 아내를 찾았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신사 양반, 당신은 나름 옳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멋진 자녀를 갖는 것과 관련해서는 당신이 완전히 틀렸어.”라고 대꾸하겠다.

아이가 배 속에 있을 때에는 두 배로 조심해서 아이를 배려해야 한다. 이때 부모 양쪽이 협력해야 한다.

소박한 음식으로 절제하고, 부부간의 스킨십을 즐기고, 밖에서 많이 움직이고, 깨끗한 물을 마시고, 몸 전체를 완전히 깨끗하게 하고, 어김없이 의무를 다하고, 무엇에든 만족하고, 즐겁게 지내고, 신을 믿어야 한다.

이런 것이 태내에서 자라는 아이의 건강에 좋을 뿐만 아니라 유익한 영양을 공급해준다. 이는 어머니에게 주어진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 아버지가 같은 방법으로 사색하고 느끼고 즐기고 행동함으로써 어머니의 삶을 달콤하게 해주면 두 사람은 평온해지고 신이 반드시 부부에게 건강한 아이를 선사할 것이다. 적어도 육체와 정신과 마음이 중간 정도의 자질을 갖춘 아이 말이다. 그 이상은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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