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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Aug 31. 2017

01. 일본군의 탄압에 독립을 빼앗기다.

<우리는 가해자입니다>

1910년 8월 22일,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에 의해 일본은 한국으로부터 주권국가로서의 모든 통치권을 빼앗고, 한반도에서의 식민지 지배를 성립시킵니다. 이는 메이지 정부가 ‘제국 100년의 장계(長計)’로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 결과였습니다. 긴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민족적 자긍심을 길러온 이웃 나라의 독립을 군사력으로 빼앗은 역사적 폭거였습니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병합’이 아니라 ‘강점’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청일전쟁부터 조선 지배를 염두에 두었던 일본은 러일전쟁 때 드디어 러시아를 쫓아내고 한국을 수중에 넣으려 시도하게 됩니다.

한편 한국은 일본에 의한 왕궁 점령이나 황후 살해 등과 같은 폭거등으로 고초를 당해왔기 때문에, 러일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에 이미 중립을 선언한 상태였습니다.


일본군의 탄압에 독립을 빼앗기다.

제국 100의 야망

일본 근대사 전문가인 나카즈카 아키라(中塚明, 나라여자대학 명예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 정부는 프랑스 영사의 협력으로 전시 중립선언을 전보로 세계에 알려, 이 전쟁(러일전쟁)에 관여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중립을 유지하면 일본은 한국에서 자유롭게 군대를 움직일 수 없게 되지요. 그래서 일본은 러일전쟁 개전과 동시에 수도 한성(지금의 서울)을 점령하고, 일본이 정치 전반에 ‘충고’한다는 한일의정서를 강요합니다. 이렇게 해서 한반도가 일본의 점령하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병탄에 앞서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절차를 진행한 것이었습니다. 러일전쟁 후에는 ‘제2차 조약’(1905), 즉 한국 ‘보호조약’을 강요해 외교권을 완전히 빼앗아 한국이 독자적으로 다른 나라들과 조약을 맺지 못하게 했습니다(조약 제2조). 그리고 일본 정부의 선출 기관인 ‘통감부’(이후의 총독부)를 수도가 내려다보이는 남산에 설치했습니다.

‘보호조약’을 체결하면서 추밀원 의장이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특명전권대사로 파견되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자국이 식민지화될 것을 우려해 받아들이길 망설였지만, 이토는 일본군 헌병들을 끌고 각의에 들이닥쳐서는 “너무 떼를 쓴다 싶거든 해치워버려”라고 큰 소리로 위협하면서 강도나 다름없는 방법으로 한국의 종속화를 진행했습니다.

일본의 한국·조선 침략과 독립운동

강화도사건

1875년 09월 강화도사건(일본 군함이 서울에서 멀지 않은 강화도를 공격)
1894년 02월 동학농민혁명(갑오농민전쟁) 일어남
1894년 07월 일본군이 조선의 왕궁을 점령, 청일전쟁 시작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
1897년 10월 국호, ‘조선’에서 ‘대한’으로
1904년 02월 러일전쟁 시작
1905년 11월 한국에 보호조약 강요(조약 체결 금지)
1905년 12월 일본이 한국에 통감부 설치, 항일 의병 전쟁 격화
1910년 08월 한국병탄,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고 총독부 설치
1919년 03월 3·1운동 확산
1931년 09월 류탸오후사건, 만주사변 개시
1937년 07월 중일전쟁 발발
1937년 10월 한국에서 ‘황국신민의 서사(誓詞)’ 제정
1940년 02월 창씨개명 실행
1944년 04월 한국에서 징병검사 개시
1945년 08월 일본 패전

한국에서 이 조약은 ‘을사조약’이라 불리며 민족적 굴욕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전후에도 “(병탄조약은) 양자의 완전한 의사에 따라, 평등한 입장에서 체결되었다”는 견해가 강합니다.

나카즈카 교수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대등이나 평등 같은 건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병탄 전부터 있었던 일본군의 점령이 이후에도 계속되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현직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초대 조선총독으로 삼고 조약 체결 당시 저항이 발생하지 않도록 도호쿠(東北)의 센다이(仙台) 지역에 주둔하던 제2사단을 동원해 엄중한 경계 태세를 유지했습니다.”

더욱이 “고종 황제는 청일전쟁 개전 당시 왕궁(경복궁)을 점령하는가 하면 이듬해에는 일본 공사의 지휘하에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것을 목도했으므로, 스스로 통치권을 일본에 양도하겠노라고 말했을 리가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고바야카와(小早川), 가토(加藤), 고니시(小西)가 세상에 있었다면, 오늘 밤 떠 있는 달을 어떻게 바라보았겠느냐.”

이는 조선총독 데라우치가 한국병탄 축하연에서 득의만만하게 읊은 노래였습니다.

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으킨 조선 침략 전쟁의 주력군을 이끌고 한반도 사람들의 귀와 코를 잘라내거나 노예로 만드는 등 잔학함의 끝을 보여주다 결국 패배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당대에 살아 있었다면 오늘의 달을 분명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라는 자화자찬의 노래였던 것입니다. 당시 메이지 정부 수뇌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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