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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Sep 11. 2017

10. '전범'으로 여겨져 사죄도 받지 못하다.

<우리는 가해자입니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많은 조선인들은 군인·군속으로 침략 전쟁에 동원되었습니다. 한국 정부에 따르면 그 수가 27만 명에 이릅니다. 

“전범으로 죽어야 했던 동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싶습니다. 그것이 살아남은 우리의 책무예요.”


23명에게 사형 집행

전쟁이 끝난 뒤, 한반도에서 온 148명의 사람들이 일본인 B·C급 전범으로 기소되었고, 그중 23명이 사형을 당했습니다. B·C급 전범으로 사형 판결까지 받았던 이학래(90, 도쿄도 니시도쿄 시 거주)는 지금도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씨는 17세 때 육군 군속·포로수용소 감시원에 ‘응모’했는데, 표면상으로는 그러했지만 실제로는 각 행정구마다 할당이 내려온 강제징용이었습니다.

1942~1943년에는 일본군이 미얀마에 보급로 확보를 위해 만든 타이멘(泰緬, 태국·미얀마)철도 건설 현장에 파견됩니다. 영국과 호주, 네덜란드 포로와 아시아인이 공사에 동원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동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싶다”는 이학래                  


                       

이 씨는 포로 관리 업무에 종사했습니다. 상관의 명령에 따라 철도대가 필요로 하는 인원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포로들까지 파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식량도 의약품도 부족한, 가혹하기 짝이 없는 노동 환경 속에서 전염병 등으로 많은 포로들이 죽었지요.” 파견 전, 2개월여의 군사 훈련을 받았지만 포로의 대우에 관한 제네바협약에 대해서는 전혀 배우지 못했습니다.

이 씨는 타이에서 종전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도 잠시, 이내 B·C급 전범 재판에 회부됩니다. 포로 학대 혐의로 사형을 언도받았지만, 1947년 징역 20년으로 감형을 받아 도쿄에 있는 스가모(巣鴨)구치소로 송환되었습니다.

“구치소에서 전쟁과 평화에 대해 공부하면서, 제가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지 겨우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했어요.”


야스쿠니신사에 묻힌 동료

1950년대 초반부터 한반도 출신 B·C급 전범이 석방되면서 이 씨도 1956년에 스가모구치소를 나왔습니다. 지급받은 것은 군복과 약간의 교통비여서, 한국에 돌아가지도 못하다가 독지가의 호의로 동료들과 택시 회사를 세워 필사적으로 살았습니다.

일본인 전범에게 지급되는 연금도 받을 수 없습니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표되면서 조선인들은 자동적으로 일본인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이 씨는 일본에서 생활하는 한국·조선인 전 B·C급 전범들이 생활권을 요구하며 1995년에 결성한 ‘동진회(同進会)’의 회장입니다. 회원들 중에 90세인 이 씨가 가장 젊습니다.

몇 년 전, 이 씨는 사형을 당한 동료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사죄나 배상도 하지 않았으면서 야스쿠니신사에 합사시키다니, 경악스러웠습니다. 일본 정부의 태도가 너무 부조리하지 않습니까? 조선인 B·C급 전범 출신자들의 명예를 속히 회복시키고, 배상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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