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 위 미술관>
헬리오가발루스 황제의 장미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보자마자 감탄사를 연발할, 말 그대로 장미꽃잎이 폭발하는 것만 같은 작품이다. 보고 있으면 장미꽃 향기가 그림 밖까지 스며나올 것 같다. 도대체 무슨 장면이기에 캔버스 전체를 이렇게 장미로 가득 채운 걸까?
로렌스 알마-타데마 경(Sir Lawrence Alma-Tadema, 1836-1912) 作, <헬리오가발루스 황제의 장미(The Roses of Heliogabalus)>, 1888년, 캔버스에 유채, 132.7cm×214.4cm, 개인 소장.
반질반질 빛나는 대리석으로 지은 고대 로마제국의 어느 궁전 안. 온 사방을 뒤덮고 있는 분홍빛 장미꽃들 사이로 한 상 가득 차려놓은 음식을 먹고 마시며 연회를 즐기는 사람들과 장미꽃 더미에 파묻히듯 누워 사치스러운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보인다. 공간 내부의 화려함과 등장인물들이 입고 있는 옷의 고급스러움 등에서 소위 말하는 상위 0.1%에 속하는 높은 분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림 왼쪽 위, 술과 음식을 즐기는 사람들 뒤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한 여성이 보이는가? 오늘날에도 패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쯤 갖고 있다는 표범무늬 옷을 입고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그녀가 연주하는 악기 모양이 좀 생소한데, 고대 그리스에서 주로 사용하던 관악기의 일종인 아울로스(aulos)라는 악기다. 두 대의 관을 더블 리드에 연결해 리코더처럼 입으로 부는 것으로, 양손으로 각각 하나씩 관을 잡고 지관을 짚는 방법으로 연주한다. 이 악기 사용법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음색이나 연주법에 대해 자세히 알 순 없지만, 한쪽 관으로는 주선율을 다른 쪽 관으로는 반주를 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반면에 이 악기를 주로 사용하던 때와 장소, 목적은 명확하게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바로 고대 그리스에서 술의 신 디오니소스에게 바치는 제전에서 사용되는 악기였다. 앞으로도 미술작품을 볼 때 이 악기가 등장한다면 백이면 백 술의 신 디오니소스(로마 신화에서 바쿠스)와 관련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서양 미술에서 디오니소스의 상징물로는 표범, 호랑이, 포도, 티르소스(Thyrsos)라는 지팡이, 팀파논(Tympanon, 타악기의 일종) 등이 있다. 디오니소스는 종종 광란의 여인 마이나데스(Mainades)와 바카이(bacchae)라고 하는 신녀를 데리고 등장하기도 한다. 아울로스를 연주하는 여인이 표범무늬 옷을 입은 이유도 사실은 그녀가 시대를 앞서간 패션의 선두주자여서가 아니라 디오니소스의 상징물 중 대표적인 동물이 표범이기 때문이다.
화가는 디오니소스의 상징을 작품 속 곳곳에 녹여 넣음으로써 등장인물들이 즐기는 이 연회가 갖는 분위기 혹은 성격을 감상하는 이에게 암시하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한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보는 사람들의 첫 반응은 대체로 비슷하다. 쏟아지는 장미꽃잎의 폭포에 압도된 감상자는 “눈물 나게 멋져”라든지 “낭만적이야”라며 감탄사를 연발하곤 한다.
그런데….
이 작품 속에서 벌어지는 연회가 정말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저 즐겁고 신나고 낭만적인 완벽한 파티일까?
연회를 즐기는 한 무리의 사람들에 대한 관찰은 잠시 미뤄두기로 하고, 그들의 시선을 따라 우리도 작품의 아래쪽으로 시선을 옮겨보도록 하자.
장미꽃 더미에 푹 파묻혀 있는 남녀 한 무리가 보인다. 장미꽃잎이 왼쪽으로부터 쏟아져 내리고 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아래에서 속절없이 허우적거리는 두 남자의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인다.
이 낭만적인 상황을 즐기기는커녕 얼굴에는 다급한 표정이 떠올라 있고, 한 남자는 앞을 향해 필사적으로 팔을 뻗고 있다. 그 모습이 마치 기어서라도 꽃 더미를 빠져나가야 한다는 듯한 절박한 인상을 준다. 그러고 보니 옆의 다른 남자 역시 인정사정없이 쏟아지는 장미꽃 폭포에 얼굴이 묻히지 않도록 고개를 한껏 꺾어서 들어 올린 채 위쪽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다급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자세히 보면 이 남자의 왼손에는 청포도 한 송이가 들려 있다. 청포도. 우리는 방금 이 작품에 숨겨진 디오니소스의 상징물 한 가지를 더 발견했다.
두 남자 사이에서 마찬가지로 꽃잎에 파묻힌 한 소녀는 그림 밖의 우리와 시선을 맞추고 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 표정을 보면 두 남자와는 대조적이다. 마치 이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거나 혹은 이 상황이 상당히 재미있는 듯 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이제 그들이 위급한 상황에 처한 게 맞는지 좀 헛갈린다.
다시 작품의 중앙 쪽으로 시선을 옮겨보면 이쪽 사람들은 마치 장미꽃을 휘감고 노는 듯한 표정으로 누워 있다. 손에 흰 깃털부채를 들고 누워 있는 여인은 자신을 덮쳐 오는 장미꽃잎 더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햇볕을 즐기는 고양이처럼 기분이 좋아 보인다.
흰 깃털부채를 들고 있는 여인의 시선을 따라가 보면, 마찬가지로 비스듬히 누워 있는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화관을 쓴 그녀는 그림 밖의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데, 어딘지 모르게 무심한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우려 섞인 눈빛 같아 마음에 걸린다. “대체 당신이 걱정하고 있는 게 무엇인가요?”라고 묻고 싶어지는 표정을 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며 술과 음식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려보자.
가장 왼쪽 끝에 앉은 남자는 어깨에 황금빛 망토를 두르고 머리 위에는 얇은 금관을 쓰고 있다. 그의 차림새로 보아 왕이거나 그만큼 신분이 높은 사람이 분명하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구경하는 데 여념이 없는 다른 이들과 대조적이다. 그는 이 연회가 그다지 즐겁지는 않은 듯 감흥 없는 얼굴로 아래의 상황을 내려다보고 있다. 반대로 테이블에 함께 앉아 푸른색 술잔을 높이 들어 올린 남자는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을 흥미진진한 듯 지켜보고 있다. 머리에는 월계관을 비스듬히 쓰고 굉장히 흥분한 얼굴(혹은 취기가 오른 얼굴)이 마치 한참 경기에 과하게 몰입한 스포츠광의 얼굴과 흡사하다. 그리고 멀리 그들의 뒤에는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보인다.
다음 회에 이어서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