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길, 10대가 묻고 고전이 답하다>
제왕의 정치는 민중의 삶에 어떻게 반영되는가?
에드워드 핼릿 카의 역사관으로 이해하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 《사기》는 어떻게 집필되었는가?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86)
중국 각지를 여행한 사마천과 “역사를 집필하라”는 아버지의 유언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한무제 시절에 일종의 사관(史官)인 태사령(太史令)으로 직접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마천이 아버지로부터 ‘역사’ 서술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한 일입니다. 아버지에게서 역사뿐만 아니라 천문과 지리 등의 지식을 폭넓게 전수받았다고 합니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즐겨했던 여행은 중국의 풍물을 직접 체험하는 ‘살아 있는 지식’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10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한나라의 수도인 ‘장안’을 구경하면서 중국의 중심지 문화를 눈여겨볼 수 있었습니다. 20세부터는 중국의 전국 각지를 두루 여행하는 가운데 수년 동안 백성들의 생활방식과 양상을 직접 보고 익히면서 견문을 쌓았습니다. 사마천은 여행을 통하여 중국 문화에 관한 폭넓은 지식을 얻었습니다. 이 풍부한 지식은 필생의 대작 《사기》를 전한 시대의 왕조 기록물이 아니라 중국의 문명과 중국인들의 문화까지도 포괄적으로 담아내는 진정한 역사서로 승화시켰습니다.
사마천은 아버지 사마담으로부터 “역사를 집필하라”는 유언만 물려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마담은 죽기 전까지 《사기》의 서술 구조를 세우고 《사기》 속의 역사 이야기 37편을 거의 완성하여 아들에게 물려 주었습니다. 물론 이 위대한 역사서를 완성한 장본인은 사마천입니다. 그러나 이 책의 뼈대와 살을 어느 정도는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았기 때문에 그 은덕을 기리기 위해 사마천은 《사기》 를 ‘태사공서(太史公書)’라는 별칭으로 부른 것이 아닐까요? 아버지의 도움과 영향력을 칭송하고 그에게서 사명을 계승한 것을 만인에게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서도 사마천의 훌륭한 인격이 드러납니다. 지나친 명예욕에 사로잡힌 사람 같으면 아버지의 후광을 숨기고 자신의 이름만을 드높이려고 했을 테니까요.
《사기》는 공자의 《논어》와 함께 중국 문화를 대표하는 찬란한 문화유산입니다. 이 역사서는 사마천이 사관의 공직을 수행하던 시절에 한무제의 지시로 집필한 책이 아닙니다. 아버지 사마담의 유언과 사마천 자신의 사명감이 결합되어 탄생한 개인의 역사적 창조물입니다.
사마천에게 형벌을 내린 한무제
한무제의 총애를 받던 사마천은 자신의 인간다운 양심과 정의 때문에 인생에서 가장 큰 고난에 직면합니다. 한나라의 장군 이릉(李陵)이 북방의 흉노족과 전투를 벌이다가 패색이 짙어지자 적군에게 백기를 들고 투항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한무제의 분노를 폭발시켰습니다. 흉노에게 패배한 것도 모자라서 한나라 군대를 대표하는 장군이 적에게 투항했다는 것은 왕국과 왕조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한무제는 판단하였나 봅니다. 그런데 한무제의 분노를 부채질하는 사건이 또 일어났습니다. 국가의 문제아가 된 장군 ‘이릉’을 사마천이 변호하고 나선 것입니다.
이릉이 투항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빚어진 것이므로 그동안 한무제에게 충성을 다하고 한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장군에게 선처를 베풀어 달라고 호소하는 사마천. 그러나 사마천의 변론을 배신으로 받아들인 한무제는 남자의 생식기를 거세하는 ‘궁형’의 형벌을 그에게 부과하였습니다.
한무제(漢武帝)
사마천이 누구입니까? 한무제가 가장 아끼는 신하가 아닌가요? ‘궁형’은 그동안 한무제와 사마천 사이에 쌓았던 신뢰의 탑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사건이었습니다. 국법에 의해 칼로 허리를 잘리는 사형을 받아들이거나 현금 50만(錢)을 내고 풀려나는 벌금형을 택할 기회도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사마천은 거액의 벌금을 낼만큼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사형’을 받아들이면 아버지가 신신당부한 역사서의 서술을 포기하는 일이 되고 맙니다. 결국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고 자신의 사명을 실현하기 위해 남자에게는 ‘치욕’과 다름없는 ‘궁형’을 택할 수밖에 없었지요.
내시를 의미하는 환관들도 궁궐에서 아무 지장 없이 책무를 수행하는 것을 보아 왔던 사마천은 거세당하는 아픔을 지나가는 폭풍우로 여기고 《사기》의 집필에 모든 것을 집중합니다. 다만, 자신을 총애하였던 한무제로부터 궁형을 받은 것을 인간적인 배신으로 여긴 사마천은 《사기》의 문장 곳곳에 국왕에 대한 반감과 비판의식을 담아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가슴에 맺힌 자신의 한을 달래고 후대에 교훈을 전하려 했던 것입니다.
국왕의 신뢰를 회복하고 《사기》를 완성한 사마천
‘역사’란 국왕과 왕조에 의해 가꾸어지는 정원이 아닙니다. ‘역사’란 민중의 눈물과 땀방울로 일구어 나가는 대지입니다. 그것을 가슴 깊이 느끼게 해 주는 민중사관의 물결이 《사기》의 강물이 되어 유장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한무제의 분노가 누그러진 후에 ‘중서령(中書令)’이라는 관직을 부여받아 또 다시 국왕의 측근으로 문서를 다루게 된 사마천. 그러나 공직에 복귀한 것이 《사기》의 집필에는 그다지 큰 보탬이 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서술의 마무리 단계로 접어든 상황에서 한무제의 복귀 제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