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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Sep 12. 2017

04. 비평하고 풍자하며 교훈을 말하는 역사 이야기

<인간의 길, 10대가 묻고 고전이 답하다>

제왕의 정치는 민중의 삶에 어떻게 반영되는가?

에드워드 핼릿 카의 역사관으로 이해하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 비평하고 풍자하며 교훈을 말하는 역사 이야기의 보고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86)



‘역사’라는 집을 짓는 ‘역사가’의 역할

《사기》는 130편의 글로 이루어진 방대한 역사서입니다. 본래 ‘역사’란 사실(史實)과 사료(史料)라는 토대 위에 세워진 ‘집’과 같습니다.

역사가는 수많은 사실과 풍부한 사료를 조합하여 역사의 토대를 형성합니다. 이 토대 위에 ‘역사의식’이라는 기둥을 세우고 ‘교훈’이라는 벽돌을 쌓아 올려서 현재보다 나은 미래의 아침을 향해 드높은 비전의 창을 냅니다. 우리는 ‘역사’라는 집을 짓는 역사가의 건축가적 역할을 에드워드 핼릿 카(Edward Hallett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사마천도 카와 같이 자신의 역사의식에서 우러나오는 교훈과 비전을 후대에 전하고 있습니다.

《사기》 가 방대한 것은 그만큼 사마천이 수집한 사료의 수와 양이 많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는 집필을 위해 무려 103종의 문서와 문헌을 열람하였다고 합니다. 단지 책을 통해서만 사료를 모은 것은 아닙니다. 20세부터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유람과 여행을 즐겨하던 사마천은 역사적 사실을 증명할 만한 타당성이 있는 전설과 민담을 백성들의 증언을 통하여 직접 수집하였습니다. 그는 민중의 삶이 반영된 이야기와 책 속의 풍부한 지식을 적절히 조화시켰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기》는 일연의 《삼국유사》처럼 사료와 사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문학의 픽션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는 ‘역사 이야기’의 보고가 되었습니다.



에드워드 핼릿 카의 서술 방식에 가까운 《사기》

사마천은 역사상의 인물과 사건을 때로는 비평하고 때로는 비유적으로 풍자합니다. ‘비평’에는 역사가의 역사관이 반영되기 때문에 카가 말한 것처럼 현재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사회의 시대적 관점에 의해 비평을 시도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므로 역사가로서 본연의 임무인 객관적 ‘진실’을 알리는 성과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건과 인물을 기묘한 모습으로 비틀어서 비꼬듯이 비판하는 ‘풍자’에서는 문학적 주관성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사마천의 《사기》는 19세기 유럽 역사학의 주류를 이루었던 레오폴드 폰 랑케(Leopold von Ranke) 이후의 실증주의 역사학의 성향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실증주의 성향보다는 카의 서술 방식에 보다 더 가깝습니다.

카는 역사가를 생선 조리사에 비유했습니다. 

에드워드 핼릿 카(Edward Hallett Carr)         

                                 

과거의 사실을 현재 사회의 가치관에 의해 해석하고 평가하는 조리 과정을 통하여 후대의 사람들에게 ‘교훈’이라는 훈제 생선을 안겨 주고자 하는 역사 서술이 《사기》에서도 발견됩니다. 카의 말을 빌려 온다면 현재와 과거 사이의 대화라는 양상을 사마천의 《사기》에서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사마천 자신이 활동했던 한무제 시대의 인물들과 사실들을 다른 시대의 인물이나 사건보다 훨씬 더 많이,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직접 경험했던 시대라는 이유가 크게 작용했겠지요? 그러나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제왕의 권한을 남용하는 한무제에 대한 비판의식을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더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맹자가 전국시대의 제왕들에게 권면하였던 ‘왕도정치’란 인(仁)과 의(義)로써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이었지만 한무제는 사마천이 소망하는 왕도정치와는 동떨어진 임금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입니다.


‘열전’을 통해 살펴보는 제왕과 민중의 상호관계

인물의 공적을 중심으로 엮은 ‘열전’ 《사기》는 편년체로 기록된 ‘연대기’와 기전체로 기록된 ‘본기(本紀)’ 및 ‘열전(列傳)’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본기’는 12편에 불과하고 ‘열전’은 70편에 달해서 그 분량으로 보아도 ‘열전’이 중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마천이 써 내려간 ‘열전’은 인물들의 공적을 중심으로 역사적 의미가 있는 사실들을 역사가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인물과 사건을 바라보는 역사가의 사상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기》의 핵심은 ‘열전’입니다. 사마천의 《사기》를 ‘사기열전’이라 부르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70편의 ‘열전’ 속에는 <조선(고조선) 열전>이 제55편으로 서술되어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사마천은 ‘열전’의 순서를 어떻게 편성하였을까요? 


제1편 <백이 열전>부터 제70편 <태사공자서〉 이전까지 각양각색의 신분과 역할을 가진 인물의 일대기가 펼쳐집니다. 임금, 신하, 장군, 관리, 사상가, 작가, 협객, 해학가(諧謔家)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황무지를 개척하고 비옥하게 가꾸어 나간 다양한 농부들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제왕의 정치행위만을 조명하는 열전이었다면 역사서로서 갖는 《사기》의 역사학적 의미는 적었겠지요. 그러나 《사기》에서 서술된 인물의 전기는 매우 포괄적이고 다채롭습니다.

충성스런 신하의 대명사인 백이와 숙제, 노장사상의 창시자로 알려진 사상가 노자와 장자, 법가 사상의 대들보 한비자, 《손자병법》의 저자 손무(孫武), 공자(중니)의 유학을 이어받고 전파한 제자들, 공자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킴으로써 ‘유학’을 명실상부한 중국철학의 정점으로 끌어올린 맹자,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진 시인 굴원, 《삼국지》의 주인공인 유비와 조조, 우리나라의 ‘허준’과 비교되는 중국의 명의 편작, 대대로 중국을 괴롭혀 온 북방의 침략 민족 ‘흉노’, 한나라의 이웃이고 2천 년의 역사를 자랑했지만 결국 한나라에게 멸망당하는 ‘조선’, 관대한 마음으로 백성의 삶을 보살폈던 관리들, 우리나라의 홍길동과 임꺽정을 떠올리는 중국의 협객들, 만인에게 웃음을 선사했던 해학의 재주꾼들…. 정말로 다양하지 않습니까? 열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든 중국인이 관심을 가질 만한 역사의 증인들입니다.


검소한 일상생활과 ‘겸애’를 실천하는 제왕

사마천은 제왕과 귀족과 평민 모두가 자신들의 인생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 인물의 행적에 주목합니다. 맹자가 그토록 강조했던 인과 의로써 백성을 다스렸던 전설상의 두 임금이 있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요와 순 입니다. 사마천은 《사기》의 〈태사공자서〉에서 묵가의 글을 인용하여 요 임금과 순 임금의 “검소한 일상생활”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요와 순이 이끌었던 태평성대를 이른바 ‘요순시대’라고 부릅니다. 순 임금은 요 임금의 아들이 아님에도 그 인성과 능력을 인정받아 왕위를 계승한 인물입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섬김’의 정신과 겸손한 마음이 ‘요’ 임금을 감동시켰다고 합니다. 그만큼 요 임금은 혈연과 지연에 얽매이지 않고 인재를 공정하게 등용하는 ‘의(義)’의 왕이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백성을 사랑하여 백성의 살림을 돕는 일에 정치의 우선순위를 두었습니다. 요 임금은 언제나 백성의 미래를 염려했던 ‘인(仁)’의 왕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치와 방탕을 정치의 적으로 생각하고 백성과 동일한 삶의 수준을 유지하며 청빈한 제왕의 문화를 지속하였습니다. 성자 혹은 현자로 칭송받는 요임금의 정신은 고스란히 순 임금에게 계승됩니다.

중국 춘추시대의 노나라 학자 ‘묵자(墨子)’라는 이름을 들어 보셨나요? 겸애설(兼愛說)로 대표되는 묵자의 사상을 추종하는 학파를 ‘묵가(墨家)’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학파가 “요와 순의 도(道)를 숭상하여 그 덕행을 찬양하고 있다”고 사마천은 〈태사공자서〉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존경심을 담아 찬양하는 까닭은 사마천의 인용문에서 밝혀졌듯이 요와 순의 “검소한 일상생활”에 있습니다. 묵가 학파가 받드는 묵자의 ‘겸애’를 생각해 본다면 그들이 요와 순을 숭상하는 이유는 더욱 분명히 드러납니다. ‘겸애’란 조건과 이해관계 없이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하고 서로의 상호관계 속에서 서로를 이롭게 하는 이타적 마음과 행동입니다. 이 ‘겸애’의 관점으로 요 임금과 순 임금의 일상생활을 한 번 바라볼까요?

요와 순은 모든 백성을 차별 없이 사랑하고 백성의 살림을 먼저 이롭게 하는 ‘겸애’의 왕으로 묵가 학파에게 인식된 것입니다. 겸애를 실천하는 요와 순의 생활방식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칡베 옷을 입고 띠풀로 엮은 지붕” 아래 살면서도 만족할 줄 하는 검소와 청빈이었습니다. 사마천은 그들의 청빈과 검소에 주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왕의 정치가 민중의 삶에 어떻게 반영되는가에 사마천은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민중과 제왕 간의 상호관계가 조화로울수록 ‘역사’의 수레바퀴는 순탄한 길을 달려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인과 의를 제왕의 미덕으로 생각하는 유학의 정신이 사마천의 《사기》를 움직이는 리모컨 역할을 합니다. 민심을 천심으로 받들고 백성의 뜻을 헤아려 백성의 삶을 형통하게 하는 지도자의 정치가 ‘역사’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임을 후대에 알리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요?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대화”라는 카의 말이 다시 한 번 떠오릅니다. “현재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시대적 관점”의 두레박으로 “과거”의 우물 속에서 길어 올릴 교훈의 생수는 바로 이 인(仁)과 의(義)의 정치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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