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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Sep 14. 2017

06. 나눔의 덕을 실천하는 정신적 쾌락의 이상향

<인간의 길, 10대가 묻고 고전이 답하다>

나눔의 미덕을 실천하는 인간 공동체

마르크스, 볼테르, 루소의 사상을 키워 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나눔의 덕을 실천하는 정신적 쾌락의 이상향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



선량하고 건전한 쾌락 속에서 누리는 행복

유토피아의 주민들은 쾌락을 추구하면서도 “선량하고 건전한 쾌락” 속에서 행복을 누립니다. 다른 사람의 쾌락을 방해하거나 저해하는 행위를 통하여 쾌락을 얻는다면 그것은 선량하지도 않고 건전하지도 않는 쾌락입니다. 그들이 혐오하는 “거짓 쾌락”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들은 개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도구나 수단으로 이용하는 행위를 거부하고 멀리합니다.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인간’ 자신이니까요. 그러므로 그들은 인간을 도우면서 서로 베풀고 나누는 “덕”으로부터 “선량하고 건전한 쾌락”을 얻으려고 합니다. 즉 “어리석은 쾌락”의 오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인간다운 “정신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몹시 싫어하는 “어리석은 쾌락”과 “거짓 쾌락”이란 어떤 것일까요? 유형들을 살펴볼까요?

그들이 배척하는 쾌락 중의 한 가지는 “도박놀음”입니다. 물론 그들이 “직접 해본 적은 없고 들어서 알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만 도박놀음을 어리석은 쾌락의 목록에 포함시켜서 단 한 번의 경험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도박놀음을 어째서 거짓 쾌락으로 규정하는 걸까요? 도박은 일명 ‘한탕주의’라는 속물근성이 낳은 잘못된 문화이니까요. 성실하게 땀 흘려 일하지 않고 오로지 행운에만 의지해서 다른 사람들의 거액을 한순간에 거머쥐려는 탐욕스런 사행심이 낳은 문화이니까요.


‘재산공유제’에 따라 재산을 공동으로 관리하면서 모든 주민의 합의에 의해 개인과 가정의 필요를 충족시킬 타당성이 합리적으로 인정될 때만 ‘돈’을 나눠서 사용하는 것이 유토피아의 경제원칙입니다. 여기에 비추어 본다면 ‘도박놀음’이라는 것은 유토피아의 법률과 제도를 어기면서까지 불합리한 방법으로 ‘돈’을 독차지하여 편하게 육체적 쾌락만을 누리려는 천박한 이기주의의 산물입니다.

유토피아 주민들이 도박놀음을 어리석은 쾌락으로 단정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 아닐까요? 그 밖에 “짐승사냥과 매사냥” 등의 동물사냥도 유토피아인들이 거부하는 거짓 쾌락의 일종입니다. 개인의 사냥 능력을 과시하듯이 자랑하면서 “살육”을 즐기는 “잔학한 쾌락”에만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유토피아 주민들이 가장 혐오하는 거짓 쾌락은 남을 돕는 일에는 한 푼도 쓰지 않고 “돈을 쌓아 놓기”에만 집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돈을 쓸 줄 모르고 모으는 데만 혈안이 된다면 유토피아인들이 추구하는 ‘공유’의 생활에 동참할 수 있을까요? 재산을 공유하는 것은 돈을 공평하게 나눠 쓴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돈을 쌓아 놓기에만 급급하는 사람은 유토피아에서 살아갈 자격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에 등장하는 스크루지 영감 같은 인물입니다. 그의 친구말리의 유령이 이끄는 대로 과거와 현재 와 미래의 모습을 보고 나서 깨달음을 얻어 사랑을 베푸는 사람으로 바뀐 것은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러나 변화되기 전의 스크루지는 유토피아 주민들이 혐오할 수밖에 없는 거짓 쾌락의 소유자라고 비판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자신만이 아는 밀실에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꼭꼭 숨겨 두기만 하는 스크루지 같은 사람들은 “보물이나 보석에 흠뻑빠져” 있습니다. “소유지를 자랑으로 삼고” 땅을 소유하는 일에만 만족합니다. 돈과 보석과 땅을 소유하는 일에서만 즐거움을 누리는 “헛된 쾌락”과 “잘못된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적 쾌락을 궁극적 목적으로 추구하는 유토피아 주민들이 보기에는 못마땅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한 반응이 아닐까요?

상생의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유토피아 주민들과는 정반대로, 이 사람들은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의 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소유를 자랑하는 허영에만 길들여져 있으니까요.

유토피아 주민들의 눈에 비친 역겨운 거짓 쾌락으로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앞에서 소유를 자랑하는 허영을 이야기했지만 이번에는 명예를 자랑하는 헛된 욕망에 빠져있는 허영꾼들의 쾌락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귀족”이라는 사실을 내세우며 어깨를 으쓱거리고 신분을 자랑해야만 즐거움을 느낍니다. 남에게 존경받기를 갈망하면서 신분에 따른 “명예”를 부각시켜야만 흐뭇해집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노력이 아니라 가문에서 물려받은 신분을 앞세우고 요란하게 치장한 의복으로 이름값을 높이려는 행위들은 모두 다 유토피아 주민들이 싫어하는 어리석은 쾌락입니다. 싫어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찾는 즐거움은 정신적 쾌락이니까요. 정신적 쾌락이라니? 도대체 어떤 즐거움을 말하는 걸까요?


물질의 소유보다는 베풀고 나누는 정신적 쾌락을

모어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라파엘의 말에 따르면 “정신적 쾌락”이란 계산기를 만지며 돈을 모으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즐거움은 책을 읽으며 지식을 얻는 데서 생겨납니다. 소유를 자랑하는 데서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베풀고 나누는 “덕의 실천”에서 피어나는 꽃이 정신적 쾌락입니다. 유토피아 주민들의 마음이 하모니를 이룰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물질을 소유하는 일보다는 정신적 쾌락을 누리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들은 책에서 지식을 얻고 그 지식을 실생활에 적용하여 “덕을 실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생활하다 보니 부(富)가 소수에 집중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윤리의식이 점점 더 강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돈과 보석과 땅을 소유하려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권력을 가지려는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유명해지고 싶은 욕심이 없는 사람도 극히 드물 것입니다. 오해하지는 마세요. 유토피아 주민들이 돈과 권력과 명예에 관심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은 사람을 돕고 사람과 함께 나누는 일에 명예와 권력과 돈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아까워하지 않고 베풀며 나눌 때에 인간다운 삶에 만족하는 “참다운”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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