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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Sep 15. 2017

07. <적과 흑> '7월 혁명' 전후의 프랑스 역사

<인간의 길, 10대가 묻고 고전이 답하다>

평등한 사회로의 개혁을 향한 목마름

‘혁명’을 통해 이해하는 프랑스의 역사와 스탕달의 《적과 흑》
- ‘7월 혁명’ 전후의 프랑스 역사와 사회

스탕달 (Stendhal, 1783~1842)


‘7월 혁명’ 직후 출간된 《적과 흑》

1830년 7월 프랑스의 파리에서 일어난 혁명이 있습니다. 이 혁명은 역사책에 ‘7월 혁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은 1830년에 책으로 출간되었지만 원고는 1827년에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소설이 출간되기 바로 직전에 ‘7월 혁명’이 일어났는데, 출간 직후에 이 소설의 가공적인 이야기는 공교롭게도 ‘7월 혁명’의 분위기와 맞물려서 마치 현실의 이야기처럼 독자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다고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 상황이었던 것이죠. 여기서 잠시 ‘7월 혁명’ 전후의 프랑스 역사와 사회를 이해해 볼까요? 지난 시대를 돌아보는 것이 《적과 흑》 에 대한 이해를 도울 것입니다.


‘프랑스 대혁명’ 이전으로 돌아간 프랑스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역사상 처음으로 수립되었던 공화주의 체제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자코뱅 당을 비롯한 여러 당파들의 권력 다툼 속에서 프랑스 사회는 안정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혼란기를 틈타 군부 쿠데타를 일으킨 나폴레옹은 1799년 제일 집정(第一 執政)의 자리에 올라 정치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집중된 권력을 더욱 강화한 뒤에 마침내 1804년 ‘인민 투표’라는 형식을 통해 황제에 즉위하였습니다. 이른바 ‘제1제정’으로 불리는 황제 체제가 수립된 것입니다. 그 후 약 10년 동안 나폴레옹은 ‘나의 사전엔 불가능이 없다!’는 말을 증명하려는 듯이 유럽을 자신의 말발굽 아래 지배합니다.

그러나 영원할 것만 같았던 그의 철권 통치도 ‘워털루 전투’의 패배로 막을 내립니다. 프랑스 사회는 ‘대혁명’ 이전의 부르봉 왕조로 복귀합니다. 이 사건을 역사학자들은 ‘왕정복고(王政復古)’라고 부릅니다. 루이 16세와 그의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를 처형함으로써 종결시켰던 왕정이 다시 돌아 왔다는 뜻입니다.

개혁을 열망했던 민중은 허탈감에 빠졌습니다. 왕과 귀족이 결탁하여 민중의 자유를 억압하고 농민들과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시대로 회귀하였으니 민중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지요? 1814년 루이 18세가 부르봉 왕조의 국왕으로 등극하면서부터 국왕과 귀족과 성직자 계급이 결탁하여 민중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시대가 또 다시 시작됩니다. 1824년에 루이 18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샤를 10세는 전제정치를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언론을 마음대로 통제하고 선거권을 제한하며 신분제도를 확고히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정으로 인해 억압과 불평등에 시달리던 민중은 1830년 7월에 또다시 공화주의 혁명을 일으킵니다. 1789년 ‘대혁명’에 이어 프랑스 역사에서 두 번째 공화주의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역사학자들이 ‘7월 혁명’이라고 부르는 유명한 사건입니다.


혁명이 지향하는 자유와 평등

‘7월 혁명’은 아쉽게도 모든 민중이 염원하던 공화주의 체제를 이루어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루이 필립을 국민의 왕으로 추대하고 의회에서 헌법을 가결하여 ‘입헌군주 체제’를 수립했으니 반쪽의 성공은 거두었다고 볼 수 있네요. 부르봉 왕조를 받드는 왕당파 세력과 그들을 비호하는 성직자 세력의 세도(勢道) 정치 를 정지시키는 성과를 얻은 것입니다. ‘7월 혁명’이 일어나기까지의 역사적 상황은 《적과 흑》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문학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됩니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 떠오릅니다. 소설을 읽지 못한 사람도 영화나 뮤지컬을 통해서 줄거리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거예요. 이 작품에서 우리는 ‘7월 혁명’의 현장을 보았습니다.

혁명이 지향하는 자유와 평등이 《적과 흑》을 움직이는 정신적 원동력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을 통하여 프랑스 역사상 최초로 실현되었던 공화주의 사회를 부활시키려는 작가 스탕달의 의지가 《적과 흑》에서 왕정복고 체제에 대한 주인공 쥘리엥의 비판의식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스탕달의 ‘공화주의’ 비전과 쥘리엥의 야망

왕정복고 시대의 전제정치를 혐오하던 스탕달은 ‘쥘리엥’이라는 인물을 통해 자신의 ‘공화주의’ 비전을 펼쳐 보입니다. 소설의 주인공 쥘리엥 소렐은 가난한 목재상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평민층의 일원입니다. 그러나 여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빼어난 외모에 두뇌가 우수하고 재주가 비상한 청년입니다. 귀족 출신이었다면 벌써 출세의 길에 들어서고도 남았을 겁니다. 자신의 능력을 신분이 뒷받침해 주지 않는 까닭에 상대적으로 차별을 받는 것을 더욱 예민하게 느낍니다. 그럴수록 ‘왕정복고’ 이후의 불평등한 사회구조가 쥘리엥에게는 더욱 못마땅하게 다가옵니다. 자신의 능력과 재주와 외모가 신분 때문에 빛을 발하지 못한다는 결론에 이르면서 쥘리엥의 마음은 신분 상승의 야망으로 불타오릅니다. 그러나 낮은 신분의 위치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쥘리엥의 욕망은 신분상의 차별 대우와 불평등한 사회구조에 대한 반감으로부터 생겨난 것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쥘리엥의 내면 깊은 곳에는 평등한 사회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공화주의적 개혁의 비전이 잠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비전은 작가 스탕달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적과 흑(Le Rouge et le Noir)             

                            

당시에는 귀족이 아닌 평민이 신분이 높아지려면 ‘적색’의 옷을 입은 군인이나 ‘흑색’의 옷을 입은 성직자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흑색’ 제복을 착용한 성직자란 사제(司祭)를 의미합니다. 사제란 개신교의 성직자인 목사가 아니라 가톨릭의 성직자인 신부와 수도사입니다.

이웃 나라인 독일은 1517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대성당 정문에 게시하여 로마 교황청의 부패를 비판하면서부터 ‘프로테스탄티즘’이라 불리는 개신교가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개신교 중심의 종교 개혁이 많은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여전히 가톨릭이 종교문화를 지배하고 있었지요. 가톨릭의 사제에 입문하는 것은 왕정복고 시대를 살아가는 평민에게 열려 있는 신분 상승의 지름길이었습니다. 어렵지만 한 번쯤 도전해 볼 만한 절호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

《적과 흑》의 주인공 쥘리엥은 사제보다는 군인이 되려는 꿈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통치가 막을 내린 후부터 왕정복고 체제는 모든 평민에게 적색 제복의 군인으로 출세하는 길을 금지하였습니다. 제2의 나폴레옹이 출현할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쥘리엥은 신분 상승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성직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합니다. 베리에르의 셀랑 사제로부터 신학과 라틴어를 배울 정도로 성직자가 되려는 쥘리엥의 의지는 확고했습니다.

성직에 대한 소명은 없었지만 신분 상승의 열망만큼은 아주 강했으니까요. 그러나 파리의 명망 높은 귀족인 라 몰 후작 의 비서로 일하게 되면서 쥘리엥은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후작의 딸 마틸드의 마음을 사로잡아 마침내 신분 상승의 기회를 움켜쥔 쥘리엥. 더욱이 그의 아이까지 밴 마틸드의 사랑을 이용하여 출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쥘리엥. 그의 야망이 성취될 날이 점점 더 다가옵니다. 쥘리엥과의 결혼을 반대하던 라 몰 후작은 아기를 잉태한 딸의 처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를 받아들입니다. 그는 후작에게서 높은 신분을 하사받고 지위가 달라집니다. 그러나 결혼 직전에 그의 꿈은 태풍을 만난 모래성처럼 운명의 물결속에 휩쓸려 사라집니다.

쥘리엥은 후작의 비서로 일하기 전에 레날 시장의 가문에 라틴어 가정교사로 들어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쥘리엥은 자신의 타고난 미모와 재치를 발휘하여 레날 부인을 유혹합니다. 귀족 사회에 대한 반감 때문에 귀족의 일원에게 보복하려는 마음이 앞서서 시도 했던 일이었지만 부인에게 접근할수록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사랑의 감정을 부인할 수 없게 됩니다. 부인도 쥘리엥을 사랑하게 되어 두 사람은 뜨거운 연인 사이로 발전합니다.

쥘리엥을 가슴 깊이 사랑하게 된 레날 부인의 간절함뿐만 아니라 쥘리엥의 정열적 사랑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밀애에 관한 소문이 시내에 퍼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쥘리엥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레날 부인과의 관계가 세상에 알려지는 날에는 출세의 앞길이 막힐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기에 쥘리엥은 주저 없이 도피를 감행합니다. 도피의 방법은 다름 아닌 브장송 신학교에 입학하여 사제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사제’만 될 수 있다면 평민의 신분을 벗어 버리고 출세의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수 있으니까요. 두뇌가 명석한 쥘리엥은 한 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묘안을 짜낸 것입니다. 흑색의 제복을 입고 성직자로서 살아간다면 불륜을 비밀의 늪에 묻어 둘 뿐만 아니라 높은 신분의 자리에서 만인의 존경을 받게 될테니까요. 독자들의 눈길로 바라본다면 쥘리엥이 사제의 ‘흑색’ 옷을 입는다고 해도 그 옷은 거룩한 성직자의 옷이 아니라 ‘위선’의 흑색 옷으로 비추어질 것입니다. 물론 쥘리엥도 자신이 출세를 위해 위선을 선택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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