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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Sep 18. 2017

09. <올리버 트위스트> 유럽 민중의 비참한 생활


외면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한 사랑의 연대 의식

산업혁명 직후의 영국 사회를 통해 이해하는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
- 유럽 민중의 비참한 생활 이해하기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1812~1870)



시간, 임금,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노동자들

1838년에 발표된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 찰스 디킨스는 이 소설로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산업혁명의 열기가 번져가던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영국 사회를 돌아볼까요?

대규모 공장을 소유한 자본가들은 부유하게 살았지만 공장의 노동자들은 가난의 늪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시간과 임금과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삼중고를 겪어야만 했으니까요. 노동자들의 고통이 극심했던 곳은 영국만이 아니었습니다. 영국으로부터 산업혁명의 영향을 받은 서유럽 지역의 현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독일과 프랑스를 비롯하여 서유럽의 주요 나라에서 살아가는 모든 노동자들이 ‘착취’라는 비인간적 상황 속에서 고통스러운 인생의 길을 걸어가야만 했습니다. 하나의 사례가 되는 역사적 사건을 찾아볼까요? 1844년 6월 독일의 페터스발다우(Peterswaldau)와 랑엔빌라우(Langenbielau)의 직조공장에서 일하던 직조공들은 공장의 주인인 자본가에게 극심하게 착취당하는 현실을 극복하고, 노동에 따른 정당한 대우와 생존권을 보장받기 위해 집단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는 이 지역에서 일어난 직조공들의 봉기를 소재로 그의 대표적 저항시 〈슐레지엔의 직조공들(Die Schlesischen Weber)>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19세기 전반기 유럽의 대표적 국가인 영국, 독일, 프랑스에서 노동자들의 현실은 열악하고 비참하였습니다. 그들은 잠을 자고 밥을 먹는 시간만 빼놓고 하루의 모든 시간을 공장에서 땀 흘려 상품 만드는 일에 열중했습니다. 그러나 손에 쥐는 ‘돈’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이 부패한 관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럽 대륙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이런 비참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히는 것을 방관할 수 없었던 독일의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와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Engels). 이들이 ‘착취’의 현실로부터 노동자를 해방시키려는 비전을 품고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이라는 책을 발표한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 그만큼 노동자들의 생활은 인권과 생존권을 빼앗긴 채 공장 주인과 기업가의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하고 말았으니까요.


영국 유소년 세대의 비극과 ‘구빈원’의 현실

<올리버 트위스트>

                                  

주인공 올리버 트위스트는 영국 소년이므로 영국의 가난한 사람들의 인생을 먼저 살펴볼까요? 노동자들은 부당한 대우 때문에 언제나 생계를 염려하면서 살았지만 그들보다 더 불행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착취’보다 더 심각한 사회문제는 ‘실업’이었습니다. 일자리가 없어서 런던의 거리를 헤매는 떠돌이들이 도시의 곳곳에서 동전을 구걸하며 끼니를 이어 갔지요. 뒷골목을 헤매다가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기아를 면하려고 소매치기, 절도, 강도, 살인 등의 죄를 짓는 사람이 갈수록 늘어만 갔습니다.

당시에 범죄를 직업으로 삼아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무려 1만2천 명이었다고 합니다. 부모가 병들어 일찍 죽거나 감옥에 가게 되어 남겨진 자녀들이 고아의 신세로 전락하는 것은 낯설지 않은 현상이었습니다. 가난한 부모들이 많다 보니 그들의 어린 자녀도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생업 전선에 나서야만 했습니다. 남자아이들은 공장의 기계 손질, 굴뚝 청소, 구걸 행위, 소매치기 등으로 생계를 이어 갔습니다. 매음굴에서 열 살 남짓한 여자아이들을 보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19세기 전반기를 살아가는 영국 유소년 세대의 현실이었습니다. 소설의 ‘서문’이 영국 아이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말해 주고 있네요.

“사익스는 도둑놈이고 페이긴은 장물아비이며 소년들은 소매치기이고 여자애는 창녀다.”
- 찰스 디킨스, 《올리버 트위스트》, 이선주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2009

올리버 트위스트도 이와 같이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고아입니다. 일종의 빈민구제소인 ‘구빈원’에서 태어난 올리버. 그의 어머니는 그를 낳자마자 숨을 거둡니다. 고아원으로 보내졌던 올리버는 그곳에서 정신적 학대를 당하며 고통을 겪다가 또다시 구빈원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구빈원에서는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빈민들을 수용하여 먹여 주고 재워 주며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세워진 구빈원! 그러나 그곳의 현실은 설립의 목적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수용소의 생활보다 더 지독하고 비참한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죽 한 그릇으로 끼니를 때우는 아이들 구빈원의 소년들은 죄수처럼 자유를 억압당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며 체벌과 구타를 고스란히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하루 세끼의 식사도 오로지 몇 숟가락에 불과한 “죽” 한 그릇으로 때울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지극히 적은 양의 “죽”만 먹다가는 굶어 죽을 것이 뻔한 일이었습니다. 죽음을 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구빈원의 원장에게 “죽”을 더 달라고 애원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원장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소년들로서는 그에게 간청하는 것이 또 다른 고민거리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비굴하게 허리를 굽혀 애원한다고 해도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죽”이 아니라 독방에 수감되는 체벌 혹은 방출일 테니까요.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굶어 죽어가는 고문을 당하는 셈”이나 마찬가지인 고통 속에서 죽음의 공포가 시시각각으로 소년들을 엄습해 옵니다. 이보다 절박한 상황이 또 어디 있을까요? 막다른 골목에 몰린 소년들은 “제비뽑기”를 통해 구빈원의 원장에게 “죽을 더 달라고” 간청하는 대표로 올리버를 뽑았습니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라는 우화를 들어 보았죠? 어느 마을의 쥐들이 고양이의 공격으로부터 목숨을 지키기 위하여 머리를 맞대고 자신들을 구제할 방법을 연구했다고 합니다. 마침내 묘안이 떠올랐습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기’만 하면 고양이가 다가올 때마다 딸랑 딸랑 울리는 방울소리가 ‘사이렌’처럼 쥐들에게 위급한 상황을 알려 주는 경보음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날 듯이 환호하며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던 쥐들은 그러나 이내 새로운 고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저 무시무시한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다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잠자고 있는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달다가 고양이의 잠을 깨우는 날에는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닐까요? 방울을 달겠다고 자청하는 쥐는 단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결국 이 작전은 시도하지도 못한 채 쥐들의 희망만 좌절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그런데 이 고양이와 쥐들의 관계는 구빈원의 원장과 소년들의 관계를 생각나게 합니다. 올리버를 비롯한 소년들에게 언제나 엄격하고 몰인정하며 학대를 일삼는 원장 앞에서 소년들은 고양이 앞의 쥐들과 다를 바 없으니까요. 끼니마다 “죽 한 사발”만 배급받는 것이 구빈원의 규칙입니다. 이 규칙을 벗어나서 죽을 더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흔히 말하는 ‘매를 버는’ 행위와 같다는 것을 모두들 잘 알고 있습니다. 모질게 맞거나 쫓겨나는 것이 충분히 예상되는 결과입니다.

그럼에도 소년들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끔찍한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정하고 말았습니다. 혹시라도 간청이 받아들여져서 죽을 더 먹을 수 있는 행운이 찾아온다면? 굶주려 죽는 불행을 막을 수 있고 “자기 옆에서 자는 아이를 잡아먹는” 비극도 모면할 수 있겠지요. 결국은 제비뽑기를 통해 올리버를 대표로 뽑아서 등 떠밀 듯이 원장 앞으로 내보내고 말았네요. 올리버는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쥐의 임무를 떠맡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날마다 한 그릇의 죽으로만 한 끼의 식사를 대신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런 비인간적 원칙에 비추어 본다면 구빈원 소년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모든 소년들의 간절한 소망을 십자가처럼 어깨에 짊어진 채 구빈원의 원장에게 간청하는 올리버의 말입니다. 고기를 먹여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죽을 “조금만 더” 배급해 달라는 애원은 매우 당연한 것입니다. 영양을 공급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굶어 죽지 않도록 허기를 채워 달라는 뜻이니까요.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해 나갈 정당한 생명권을 지켜 달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생태주의’의 관점으로 본다면 인간만이 아니라 동식물을 포함한 자연도 ‘생명권’을 갖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연의 생명도 소중하거늘 하물며 자라나는 소년들의 생명을 함부로 방치한다는 것은 생명권을 침해하는 행위가 아닐까요? 인간에게 부여된 천부인권을 박탈하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구빈원에서 끼니마다 죽 한 그릇만 먹고 생활하다가 영양실조로 병들어 죽는 소년들이 속출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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