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길, 10대가 묻고 고전이 답하다>
외면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한 사랑의 연대 의식
산업혁명 직후의 영국 사회를 통해 이해하는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
- 외면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한 연대 의식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1812~1870)
장의사로 보내진 올리버
구빈원에 수용된 소년들은 생명권을 짓밟히고 인권을 말살당한 ‘노동’의 도구였습니다. 소년들의 노동을 통하여 이득을 키워 나가는 구빈원의 모습에서 그 당시 영국의 정치와 정책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실감할 수 있겠지요? 이는 디킨스가 비판하는 점이기도 합니다. “죽을 조금만 더 달라는” 정당한 애원조차도 거부당하고 독방에 수감되어 체벌을 받은 올리버. 그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긴 구빈원 직원 범블은 그를 장의사 주인 소워베리의 도제로 넘겨 줍니다. 소워베리의 장의사에서 일하는 동안 올리버는 수많은 구빈원 원생들의 시체를 목격했습니다.
굶주려 죽거나 병들어 죽은 무수한 백성들의 주검도 보았습니다. 소중한 목숨들이 폐기물처럼 버려지고 처리되는 것을 지켜보는 올리버의 마음속에는 눈물의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의 눈물에서 19세기 영국 민중의 애환이 느껴집니다. 그의 가슴에 맺힌 상처의 멍울에서 빅토리아여왕 시대의 민중이 얼마나 심각한 좌절감 속에서 살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소매치기가 된 올리버
장의사에서 일하던 올리버는 그곳에서 함께 일하던 힘센 소년 노아에게 줄곧 학대를 당합니다. 게다가 억울한 일로 누명까지 쓰게 되자 올리버는 날마다 민중의 시체를 보는 슬픔과 노아의 학대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가장 큰 도시 런던으로 떠납니다. 인생의 탈출구를 찾으려는 심정으로 런던행을 결심했지만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올리버의 동반자는 여전히 ‘굶주림’이라는 이름의 불청객뿐이었습니다. 노숙자 신세가 된 올리버는 이곳저곳을 헤매다 세상사에 닳고 닿은 소년 잭 도킨스를 우연히 만납니다. 잭은 ‘솜씨 좋은 미꾸라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소매치기 솜씨가 뛰어난 소년이었습니다. 슬쩍 지갑을 훔쳐 가면서도 좀처럼 들키지 않고 소리 없이 잘 빠져나간다고 해서 ‘미꾸라지’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지요. 올리버는 잭의 손에 이끌려 소매치기 일당의 두목 페이긴의 소굴로 흘러들어 갑니다. 올리버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어른들의 도구로 이용당하면서 소매치기와 도둑의 신세로 전락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올리버의 비참한 생활은 산업혁명 직후의 영국 사회에서 아이들이 겪어야만 했던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었다고 합니다.
영국 사회의 착취 구조 비판
돈을 안 주거나 조금 주고도 쉽게 부려 먹을 수 있는 약한 아이들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악용하는 그 당시 영국 어른들의 비인간적인 모습이 소설 속에서 적나라하게 고발되고 있습니다. 작가는 ‘자본’을 소유하기 위하여 약자를 기계의 부품처럼 이용하는 영국 사회의 ‘착취’ 구조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사회구조를 인간의 땅에서 사라지게 하려면 정치와 정책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해 줍니다. 찰스 디킨스는 《올리버 트위스트》를 통하여 국민 모두에게 유익을 줄 수 있고 약자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위정자들의 ‘민생’ 정치가 하루빨리 실현되어야만 한다는 메시지를 던져 줍니다. 물론, 사악한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도 타고난 선한 성품과 잰틀맨의 기질을 잃지 않기 위해 끝까지 자신과의 싸움을 멈추지 않은 올리버에게 찬사의 박수를 보내 달라고 호소하는 디킨스의 목소리도 들려옵니다.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나눠 지려는 마음
1843년에 디킨스가 발표한 또 다른 명작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의 사회적 배경도 《올리버 트위스트》와 다르지 않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럴》의 주인공인 구두쇠 할아버지 스크루지를 기억합니까?
그 사람의 집 문밖에서 동전을 구걸하던 소년도 어렴풋이 떠오를 거예요. 인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수전노 스크루지에게 거절당하여 얼어붙은 길거리를 헤매야만 했던 소년. 그가 바로 올리버 트위스트가 아닐까요?
예수의 ‘긍휼’과 석가의 ‘자비’와 공자의 ‘인(仁)’은 올리버 트위스트 같은 사람들을 향해 피어나야 할 아름다운 꽃입니다. 불우한 소년 올리버를 조건 없이 아들로 삼은 신사 브라운로처럼 가난한 자들의 눈물을 어루만지며 그들과 함께 고통의 짐을 나눠 지려고 하는 마음이 그들을 도와주는 길의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고통에 대한 연대 의식! 이것은 올리버가 살았던 산업혁명 직후의 영국 사회뿐만 아니라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가 아직도 남아 있는 현대사회에도 꼭 필요한 인간의 도리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