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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Sep 21. 2017

01. 잠, 예술과 만나다.

<잠에 취한 미술사>


여러 문화권의 고대신화에서 잠 이야기가 중요하게 다루어졌듯이 문학, 영화, 미술 등에서도 잠은 흥미로운 내용의 전개를 위해 유용하게 쓰여 왔다.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잠 이야기는 차이콥스키의 발레곡으로 유명하고 월트 디즈니의 만화영화로도 제작된『잠자는 숲 속의 공주』다.

애니메이션 영화, 잠자는 숲속의 공주(Sleeping Beauty)


원래 이 이야기는 샤를 페로의 동화집에 수록된 고전동화였다. 어느 먼 옛날 한 왕국에 아이를 간절히 원하던 왕과 왕비가 살고 있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공주가 태어나자 이를 축하하기 위해 나라 안의 일곱 요정들을 초대하고 축제를 열었다. 그러나 초대받지 못한 것에 화가 난 여덟 번째 요정은 아기 공주가 물레 바늘에 손가락을 찔려 죽을 것이라고 저주를 퍼붓는다. 이 저주를 들은 일곱 번째 요정은 공주가 100년 동안 잠을 자고 난 후에 아름다운 왕자를 만나 눈을 뜨고 결혼하리라고 예언을 고친다. 이 예언들처럼 공주는 15세가 되자 물레 바늘에 찔리고 깊은 잠에 빠진다. 그렇게 100년이 지난 어느 날, 근처를 지나가던 왕자가 소문을 듣고 성에 들어가 잠자는 공주 옆에 무릎을 꿇는다. 드디어 잠에서 깨어난 공주는 왕자와 결혼해서 아이들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공주의 시어머니가 공주와 아이들을 잡아먹으려다 실패한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다. 이 동화에서 잠은 소생과 운명적인 만남을 기다리는 지연장치로서 기능한다. 아마 대중들에게는 전체 줄거리보다도 잠자던 공주가 왕자의 입맞춤으로 깨어난다는 그림형제의 동화로 더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전형적인 잠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에서는 잠과 관련된 두 가지 대조적인 증상이 등장한다.

영화, 맥베스(Macbeth, 2015)

바로 불면증과 몽유병이다. 잠을 자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불면증과 너무 깊이 잠든 나머지 수면 상태에서 취한 행동을 기억하지 못하는 몽유병이 주인공들의 형벌로써 제시되고 있다. 스코틀랜드의 전사 맥베스는 왕이 되리라는 마녀들의 예언을 믿고 덩컨 왕을 살해한 후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다! 맥베스는 잠을 죽였다’라는 모종의 외침을 듣는다. 맥베스는 그가 저지른 악행으로 제대로 잠을 잘 수 없게 되고 복수를 하러 온 맥더프와의 결투 끝에 죽는다. 한편 덩컨 왕의 살해계획에 가담했던 맥베스 부인도 신경쇠약과 몽유병에 걸린다. 그녀는 잠을 자면서 저지른 일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몽유병을 앓다가 끝내 자살한다. 악행의 대가가 바로 불면과 몽유병인 것이다.

맥베스 부인 같은 몽유병자는 1919년에 개봉한 로베르트 비네 감독의 무성영화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Das Cabinet des Dr. Caligari)」에서도 등장한다.



영화,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Das Cabinet des Dr. Caligari)

영화는 정신병원에서 프란시스가 다른 환자에게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북부 독일 소도시의 최면술사인 칼리가리 박사가 체자레라는 몽유병자를 데리고 와서 마을사람들의 미래를 예언하는 쇼를 벌인다. 의문의 살인사건들이 이어지는 와중에 체자레는 프란시스의 친구 알란의 죽음을 예언하고 실제로 알란은 살해당한다. 프란시스는 연쇄살인범으로 의심되는 체자레와 칼리가리 박사를 추적하여 정신병원의 원장이 칼리가리 박사임을 확인한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이 이야기를 들려준 프란시스가 정신병자임이 드러난다.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효시라고 할 만한 이 영화의 독특함은 칼리가리 박사가 몽유병자인 체자레를 로봇처럼 조정한다는 데 있다. 잠을 자면서 한 행동을 깨어난 뒤에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몽유병자는 꿈꾸는 상태에서도 남에게 명령을 받아 행동함으로써 주체가 완전히 상실된다. 이런 경우에 몽유병자의 잠과 꿈은 매우 부정적인 의미일 수밖에 없다. 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운 사람을 두고 ‘몽매하다’고 표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타인의 꿈에 개입하고 조종하는 이야기는 2010년에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인셉션(Inception)」에서 매우 흥미진진한 형태로 나타난다.


드림머신이라는 기계로 타인의 꿈에 접속하여 생각을 훔쳐오고 정보를 심어서 꿈꾸는 사람의 기억과 생각을 바꾸어버리는 게 가능한 미래사회가 「인셉션」의 배경이다. 영화 「매트릭스(Matrix)」가 가상현실의 세계를 통해 잠과 꿈의 세계를 은유적으로 언급했다면 「인셉션」은 보다 직접적으로 꿈의 구조를 새롭게 보여준다. 등장인물들이 기계를 통해 꿈을 공유하거나 표적으로 삼은 인물의 심층의식까지 침투하기 위해 3단계 ‘꿈속의 꿈’을 이용한다는 설정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꿈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며 꿈을 꾸는 자각몽과도 관련이 있다. 현실과 꿈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장자의 「호접몽」처럼 「인셉션」에서도 다층적인 꿈들로 인해 현실과 꿈은 분간하기 어려워진다. 

우리에게 익숙한 「호접지몽(胡蝶之夢)」은 장자가 어느 날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꽃 사이를 자유로이 날아다니다가 잠에서 깨어난 후 홀연히 깨달았다는 이야기다. 장자 자신이 나비가 되어 날아다닌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자기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태, 즉 꿈과 현실이 뒤섞이고 만물에 대한 분별이 사라지는 순간을 경험한 것이다. 이는 물아일체의 경지이자 존재의 공허함이 공존하는 상태다. 장자에게 잠은 깨달음과 자유로운 소요유의 시공간이다. 장자 『제물론』에 나오는 「호접몽」 이야기는 동북아 미술사에서 여러 화가들이 다루는 주제가 되었다.

육치, 몽접(夢蝶) 부분도, 명(明)나라 시기


미술에서는 잠과 관련된 작품들이 흔하다. 앞에서 언급한 종교적인 도상들 외에도 수많은 예술가들이 잠자는 모습을 그리거나 조각했으며 꿈을 형상화했다. 신화 속의 잠에 얽힌 이야기들은 시대마다 화가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그려졌고 신화적인 이미지들이 현대적으로 재해석되기도 하였다. 일상에서 잠자는 모습을 포착한 미술작품들도 상당히 많다. 더욱이 이 책에서 다루지는 않지만 잠자는 동물들의 그림이나 일상생활을 생생하게 포착하는 사진의 영역까지 포함한다면 잠을 다룬 작품의 수는 너무 많아서 헤아릴 수조차 없다. 현대미술에서는 꿈과 무의식에 관심을 두었던 초현실주의에서부터 잠자는 퍼포먼스까지 다양한 실험이 계속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이렇게 미술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잠과 관련된 미술작품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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