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현재를 직시하고 관계를 파악하라.

<1인자의 인문학 한국편>

by 더굿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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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우유부단한 1인자) vs 최명길(현실적인 2인자)


1인자에게는 2인자의 역량이 대단히 중요하다. 1인자의 꿈을 이루는 데 절대적이다. 2인자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1인자를 보좌할 수 있어야 하고 당당하게 노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예스맨(Yesman)은 치명적이다. 2인자는 부단히 노력해서 가장 객관적인 직언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를 직시하고 관계를 파악하라.


광해군은 연산군과 함께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폭군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국왕으로 재위한 15년 동안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탁월한 중립외교로 나라를 보전한 인물이다. 그가 즉위할 당시 붕당정치는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실권을 장악한 북인 세력은 정적의 처리를 두고 소북과 대북에 이어 중북으로까지 분화되는 분열의 조짐을 보였다. 집권 세력인 대북 세력은 서인과 남인은 물론 한 뿌리에서 나온 소북과 중북까지 밀어내고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고립을 자초했다.


여기서 인조반정이 시작됐다. 이는 광해군의 ‘실리 외교’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뒷받침한다.


조카에게 폐위된 광해군의 대외 정책은 명나라의 무리한 군사 지원 요구를 절묘하게 피하면서 왕권을 다지고 황폐해진 나라의 형편을 개선하려는 것이었다. 즉 반정을 주도한 인물의 주장과 달리 그는 명나라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반정 당사자들은 그를 친명사대의 의리를 저버리고 패륜을 저지른 폭군으로 몰아갔다. ‘반란’을 ‘반정’으로 합리화하기 위한 역사 왜곡이었다. 그들이 내세운 것은 명분과 절의였다. 광해군이 후금(청나라)과 암합해 왜란 때 조선을 구해준 명나라에 대한 사대의 명분과 절의를 잃고, 영창대군과 임해군 등 형제를 죽여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패륜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왜란에 상처 입은 민생을 진작시키기 위해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광해군의 줄타기 외교였다.


인조의 리더십에 대한 학계의 평가가 비판 일색인 것도 실록과 같은 기록을 통한 정확한 사실 파악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재위 기간중 최대 위기인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자초한 인조는 난세의 1인자 리더십을 연구하기에 좋은 반면교사다. 척화(斥和)와 주화(主和)를 두고 입장이 갈린 조선은 매우 복잡한 상황이었다. 대부분이 척화의 입장을 취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김상헌이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해 조선의 사직을 살린 주화파 최명길 덕분에 조선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보여 준 2인자 리더십은 인조의 1인자 리더십과 연결해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우선 인조반정이 일어난 배경부터 살펴보자. 선조가 재위 41년에 57세의 나이로 갑자기 운명하자 광해군이 우여곡절 끝에 보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즉위한 뒤에도 안팎의 여러 사건으로 인해 곤경에 처했다. 광해군 5년에는 영창대군의 외조부인 김제남의 역모 사건이 터졌다. 5년 뒤에는 대북파가 폐모를 주장하고 나섰다. 소북 세력을 포함한 남인 세력과 이항복을 중심으로 한 서인 세력이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 와중에 만주에서는 누르하치가 이끄는 여진족이 날로 세력을 확장했다. 이들이 조선을 위협하기 시작한 것은 선조 40년인 1607년 무렵이었다.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이들의 동태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왜란 때 병조판서를 지낸 서인의 거두 이항복을 서북면도체찰사에 임명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를 계기로 서인에 속한 무인들이 서북변계의 무장으로 많이 발탁되었다. 이것이 훗날 인조반정의 불씨가 되었다.


광해군은 줄타기 외교를 통해 중원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한계에 부딪혔다. 광해군 11년에 벌어진 ‘사르후 전투’에서 명의 강압에 의해 출정했던 조선군사 13,000명이 후금군의 습격을 받고 대패한 것이다. 곧 강홍립이 남은 병력을 이끌고 투항했다.


1.jpg?type=w1200 『만주실록』 <강공립솔병귀항도>


3년 뒤 광녕 일대마저 후금에 넘어가자 조선과 명의 육로가 끊겼다. 명은 조선이 후금과 합세해 후방의 병참기지로 변할 것을 크게 우려했다.

광해군은 명의 의심을 풀어주기 위해 이정구를 변무사(辨誣使)로 파견하는 동시에 사르후 전투에서 분사한 선천부사 김응하를 현창하는 사업을 크게 벌렸다. 이때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새로운 골칫거리로 등장했다. 그는 평안도 일대를 오가며 요동에서 탈출해 조선으로 들어온 중국인들을 불러 모은 뒤 압록강 일대에서 후금군과 끊임없이 충돌하는 등 사단을 일으켰다. 간신히 그를 설득해 철산 앞바다의 가도로 들어가게 했으나 모문룡은 인조반정 이후에도 큰 두통거리로 남아 호란을 촉발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권에서 밀려난 서인 세력들이 광해군의 감시를 받는 능양군(인조)과 합세해 반정을 일으켰다. 능양군은 선조와 인빈 김 씨 사이에서 태어난 정원군의 장남이었다. 그는 광해군의 견제로 자신의 동생들이 죽어나가자 이내 권력에서 소외된 서인 세력과 연합해 반란을 꾸몄다. 율곡과 성혼, 이항복, 김장생 등의 문인들로 대부분 이항복에 의해 발탁된 자들이었다.

이들은 도중에 기밀이 누설돼 무산될 위기에 놓이기도 했으나 예정대로 거사를 단행했다. 어두운 저녁 도성의 북쪽 문인 창의문을 통해 궁궐 뒤쪽으로 진입한 뒤 훈련대장의 협조 아래 간단히 궁궐을 점령했다. 이어 인목대비의 허락을 얻어 능양군이 보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의관 안국신의 집에 피신하였다가 잡혀 폐서인이 되고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대북파의 거두인 이이첨과 정인홍은 모두 참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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