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시대>
‘압축 성장’이라는 말로 요약될 만큼 대한민국은 초고속 성장을 했다. 서구권 국가들이 몇백 년에 걸쳐 이룬 성장을 불과 50년도 안 되는 시간에 이뤄냈다. 1988년에는 서울에서 올림픽을 개최했고 1990년대 중반까지 매년 7~9%를 넘나드는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다. 1996년 10월에는 경제선진국 클럽이라는 OECD에 가입했다. 그동안 한국은 성장의 달콤함에 취해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다 사건이 터졌다. 1997년 1월 27일 당시 재계 14위였던 한보그룹의 부도를 시작으로 매시간 11개의 회사가 도산했다. 당시 실직자 수는 157만여 명에 달했다. 실직 사실을 가족에게 차마 알리지 못해 아침마다 양복 차림으로 집을 나와 공원 벤치에 앉아 있거나 산행을 하는 가장들의 이야기가 뉴스로 전해졌다. 멀쩡한 직장인에서 길거리 노숙자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일부 사람들이 겪은 일이 아니었다. 직장을 잃은 사람들 수에 가족 수를 더하면 전 국민의 4분의 1 이상이 고통받았다. 수많은 사회학자들은 한국이 겪어온 현대사의 숱한 사건 가운데 한국인의 삶에 가장 크고 깊은 영향을 남긴 것이 바로 IMF 외환 위기라고 입을 모은다. 2001년 우리나라는 IMF에게 빌린 195억 달러를 모두 갚았다. 외환보유고, 성장률 등의 경제지표가 살아나면서 떠났던 외국 자본도 돌아왔다. IMF 체제로부터 공식적으로 졸업했다. 그러나 IMF 외환 위기는 일회성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직장을 잃었던 사람들은 원래 직장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고, IMF 지원을 받기 위해 도입했던 노동법 개정안은 기업 구조 개선이라는 본질적인 문제 해결보다 고용 유연화, 즉 쉬운 해고와 비정규직 양산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사회의 근간을 이루던 중산층이 대량 실직으로 한꺼번에 몰락했다. 세상이 전혀 다른 형태로 재조직된 것이다. 그 한가운데 불확실성이 놓여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불과 30여 년 전에 누릴 수 있었던 예측 가능한 삶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졌다. 봉건사회에서는 주어진 사회적 지위에 맞는 행불행을 겪으며 비슷비슷한 삶을 살았다. 우리 사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70~80년대는 급격한 변화가 있긴 했지만 긍정적인 변화였다. 지속적이고 가시적인 발전이 오히려 개인의 기회와 가능성을 한없이 확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 위기로 더욱 가속화된 후기 자본주의는 우리 삶을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만들었다. 이제 사람들은 ‘안정’을 동기로 움직인다. 보통 인간이 움직이는 동기는 욕망과 안정, 이 두 가지다. 인간은 풍요롭고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환경에서는 호기심과 욕망에 따라 자발적으로 움직이지만, 불안하고 예측할 수 없는 환경에서는 안정을 우선순위로 두고 모든 행동을 결정한다.
2017년 국가공무원 9급 선발 예정 인원은 4,910명, 접수 인원은 228,368명으로 경쟁률이 46.5대 1에 달했다. 이 수치는 안정을 추구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는 이런 분위기에 쐐기를 박았다. 1997년에 이어 한국 사회는 취업 불안, 비정규직의 공포, 공동체의 붕괴, 살벌한 각자도생이 사회를 이루는 기본이 되었다. 이런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은 불안감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린다. 아버지 세대의 경제적 몰락은 자녀 세대의 항구적인 상처와 불안으로 이어져 대물림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