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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Oct 31. 2017

04. 명분이냐 vs 실리냐

<1인자의 인문학 한국편>



인조(우유부단한 1인자) vs 최명길(현실적인 2인자)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인조 일행이 간신히 남한산성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병력 1만 3,000명과 양곡 1만 4,000석만이 있었다. 피난 온 사람들이 40일가량 버틸 수 있는 양이었다. 적의 포위로 곧 산성 안에 갇힐 것을 우려한 김류는 계속해서 강화도로 옮길 것을 권했다.

다음날 새벽까지 성안이 시끄럽도록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결국 강화도행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새벽에 산성을 출발하는 그들에게 불평이라도 하듯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산길이 얼어붙어 빙판이 된 까닭에 말이 발을 내딛지 못했다. 할 수 없이 인조가 말에서 내려 걸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강화도에 도착할 가능성이 없었다. 일행은 이내 포기하고 산성으로 돌아왔다. 이때 적진으로 향했던 최명길이 돌아와 상황을 보고했다.
“그들의 말과 기색을 살펴보니 강화를 정하는 것 외에는 다른 마음이 없는 듯합니다.”

인조가 핀잔을 주었다.
“경은 필시 속은 것이오. 어찌 그것 때문에 이렇게까지 했겠소.”

김류가 다시 제안했다.
“사세가 매우 급하니 신료들은 모두 놓아둔 채 대장 십여 명만 이끌고 강화도로 달려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인조가 탄식했다.
“나 혼자 살아난들 무슨 의미가 있겠소.”
“그렇다면 세자라도 강화도로 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소현세자가 울음을 터뜨렸다. 얼마 후 청군의 사자가 와 임금의 아우와 재상을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논의 끝에 종친 한 사람을 인조의 아우로, 형조판서 심집을 정승으로 가장해 보내기로 했다. 이튿날 이들이 청군 진영에 도착하자마자 심문이 진행됐다.
“조선은 지난 정묘년에도 가짜 왕자로 우리를 속였다. 이 사람은 진짜 왕제인가?”

놀란 심집이 대답하지 못했다.

“그대는 진짜 정승인가?”

심집이 또 대답하지 못했다.

통역사 박난영에게 사실 여부를 묻자 그가 정색하며 대답했다.
“진짜 왕제이고, 진짜 대신입니다.”

화가 난 청군 장수가 박난영을 베어버렸다. 곧이어 더 큰 요구가 전달됐다.
“세자를 인질로 보내야만 강화를 의논할 수 있다.”

남한산성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이때 예조판서로 있던 김상헌이 오랑캐와의 강화는 있을 수 없다고 극언했다. 인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영화 <남한산성> 스틸컷


이틀 뒤 인조가 마침내 행궁의 남문에서 결사항전의 취지를 밝히고자 했다. 이때 심광수가 땅에 엎드려 한 사람의 목을 베 달라고 요청했다. 인조가 물었다.
“그 한 사람이 누구를 가리키는가.”
“최명길입니다.”

최명길이 이 말을 듣고 곧바로 자리를 피했다. 인조가 말했다.
“너의 뜻은 내가 이미 알고 있다.”

어느새 최명길은 척화파가 지목하는 첫 번째 제거대상이 되어 있었다.
인조가 말을 이었다.
“정묘년 때는 임시방편으로 강화를 허락했으나 이번에는 오랑캐가 스스로 황제라 칭하므로 내가 천하의 대의를 위해 그들의 사자를 단호히 배척한 것이다. 화의는 이미 끊어졌으니 다만 싸움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합심해 떨쳐 일어나면 깊이 들어온 오랑캐의 고립군이 아무리 강해도 쉽게 약화할 것이다.”

다음날 남쪽 성벽으로 육박했던 청군이 조선군의 화포 공격에 물러가자 인조의 호언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인조 일행은 더욱 헛된 기대를 키웠다. 그들은 명나라가 조만간 원군을 보내 주거나 여의치 않으면 청의 배후를 쳐서라도 조선을 도와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 덕에 척화파는 궁지에 몰렸음에도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이는 몽상에 지나지 않았다.

최명길만이 모든 상황을 통찰했다. 그는 계속해서 강화만이 사직을 보존하고 백성을 전쟁의 구렁텅이에서 구할 수 있다고 인조를 설득했다. 장유, 홍서봉, 이성구가 동조했다. 이들은 나아가 세자를 보내고 청태종을 황제로 인정하자고 주청했다. 그러나 인조가 단호히 거절했다.
“나는 결코 허리를 굽혀 스스로를 신하라 칭할 수는 없소.”

이 소식을 접한 김상헌이 슬픔에 북받쳐 외쳤다.
“분수에 넘친 건의를 한 자들의 목을 베어야 한다.”

최명길을 겨냥한 발언이었다. 김상헌은 최명길을 볼 때마다 마치 벌레라도 보듯 꾸짖었다.
“오직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하오. 어떻게 짐승 같은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고 수치를 당할 수 있겠소.”

그의 이런 주장은 바꿔 생각하면, 한 번 오랑캐는 영원한 오랑캐로 남아 있어야만 한다는 근거 없는 논리 위에 서 있는 것이었다. 척화파를 대표하는 김상헌의 무책임한 모습에 화가 난 최명길이 대꾸했다.
“이미 대항할 힘이 없는데 화친을 하지 말자는 것은 멸망을 재촉하는 것밖에 안 되오. 나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감히 강화를 성사시키려 하오.”

척화파는 최명길을 역적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일 상소가 빗발쳤다. 전부 ‘최명길의 목을 베고 김상헌을 재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야만 군사들도 힘을 내어 싸울 것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다. 그럼에도 최명길은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이 떠맡은 강화 사절의 임무를 차질 없이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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