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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Oct 31. 2017

02. 바퀴벌레들

<꼬마 철학자>



아, 아름다웠던 내 어린 시절이여! 그 시절은 내 마음에 결코 사라지지 않을 깊은 흔적을 남겨놓았다. 론 강을 여행했던 일이 꼭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그때 탔던 배와 승객들, 선원들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듯하다. 선륜(船輪)이 돌아가는 소리와 호루라기를 부는 것 같은 증기기관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것 같다. 선장의 이름은 제니에였고, 주방장 이름은 몽텔리마르였다. 나는 아직도 이 두 사람을 기억하고 있다.

사흘에 걸쳐 론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동안 나는 객실로 내려가 먹고 잘 때를 빼놓고는 대부분 갑판 위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 나머지 시간은 배의 맨 끝부분, 즉 닻 근처에서 보냈다. 그곳에는 항구에 들어갈 때 울리는 큼직한 종이 매달려 있었다. 나는 이 종 옆에 놓인 밧줄더미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앵무새 새장을 다리 사이에 내려놓은 채 하염없이 강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론 강은 어찌나 넓은지 양쪽 강가가 잘 안 보일 정도였다. 강이 조금만 더 넓었더라면 난 그걸 바다라고 불렀을 것이다. 하늘은 웃음을 머금은 듯 활짝 개어 있었고, 강물은 초록빛이었다. 커다란 배들이 물결을 따라 떠내려가고 있었다. 하천용수송선에 사는 사람들이 노새등에 올라탄 채 배를 타고 노래를 부르며 우리 옆을 지나쳐가기도 했다. 내가 탄 배는 가끔 골풀과 버드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섬을 스쳐 지나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어? 무인도네!”라고 중얼거리면서 뚫어지듯 바라보곤 했다…….

사흘째 되는 날의 저물어갈 무렵, 태풍이 불어닥칠 조짐이 보였다. 하늘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던 것이다. 짙은 안개가 강 위로 깔리기 시작했다. 뱃머리에 커다란 칸델라가 하나 켜져 있었다. 이 모든 심상찮은 징후 앞에서 나는 전율을 느꼈다. 바로 그때 내 곁에 있던 누군가가 외쳤다.
“리옹이다!”

동시에 그 큰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리옹에 도착한 것이다. 안개 저편으로 양쪽 강변에 불빛이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가 탄 배는 두 개의 다리 밑을 지나갔는데, 다리 밑을 지날 때마다 거대한 굴뚝이 허리를 90도로 숙인 채 마치 기침을 하는 것처럼 검은 연기를 세차게 토해냈다. 갑판 위는 온통 시끌벅적하니 북새통이었다. 승객들은 저마다 트렁크를 찾느라 수선을 피웠고, 선원들은 어둠 속에서 통을 굴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배의 반대편에 있던 어머니와 자크 형, 그리고 안누 누나에게 급히 달려갔다. 배가 부두 옆에 정박하고 하선이 시작되는 동안 우리 가족 넷은 안누 누나가 들고 있는 커다란 우산 밑에 꼭 붙어 서있었다.

정말이지, 아버지가 우리를 마중 나오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영영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우리 이름을 부르며 우리 쪽으로 힘들게 다가왔다.“ 자크! 다니엘!”귀에 익은 아버지 목소리가 들리자 우리는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동시에“여기예요!”하고 동시에 대답했다. 아버지는 재빨리 달려와 우리를 포옹하더니 한 손으로는 나를, 다른 손으로는 자크 형을 안고는 어머니와 안누 누나에게 말했다.
“날 따라와요.”

아버지는 앞장서서 걸음을 재촉했다. 아, 그 순간 아버지가 얼마나 남자답게 보였는지!

우리는 힘들게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새 주위는 어두워져 있었고, 부교(浮橋)는 미끄러웠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우리는 트렁크에 몸을 부딪치곤 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배 저편 끝에서 날카롭게 울부짖는 소리가 우리 귀에 들려왔다.
“로빈슨! 로빈슨!”
“아니, 이럴 수가!”

나는 아버지에게 잡혀 있던 손을 빼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가 미끄러진다고 생각했는지 내 손을 더욱더 꼭 움켜쥐었다.

다시 더욱 구슬프고 날카로운 울부짖음이 내 귓속을 파고들었다.
“로빈슨! 내 불쌍한 로빈슨!”
“앵무새! 내 앵무새!”

나는 다시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드디어 앵무새가 말을 하는 거야?”
자크형이 물었다.

앵무새가 말을 하는 게 틀림없었다. 앵무새 소리는 10리 밖에서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너무 정신이 없었던 나머지 배 끝부분의 닻 근처에 앵무새를 두고 그냥 왔던 것이다. 그러자 앵무새가 있는 힘을 다해서“로빈슨! 로빈슨! 내 불쌍한 로빈슨!”하고 울부짖으며 나를 찾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앵무새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더구나 선장까지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여러분, 서둘러주십시오!”
“앵무새는 내일 다시 와서 찾으면 돼. 배 위에서 뭘 잃어버리는 경우는 없으니까.”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울고 있는 나를 끌고 갔다. 다음날, 다시 앵무새를 찾으러 갔으나 앵무새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실망했을지 상상해보라. 방드르디도 앵무새도 모두 내 곁을 떠나버린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로빈슨 노릇을 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방법이라곤 랑테른느 거리에 있는 지저분하고 습기 찬 주택의 5층에 무인도를 건설하는 것뿐이었다.

오, 그야말로 소름 끼치는 집이었다! 나는 죽을 때까지 그 집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층계는 끈적거렸고, 마당은 우물과 흡사했다. 게다가 관리인을 겸한 구두장이의 가게가 펌프 옆에 붙어 있어서 마당은 한층 더 비좁아졌다.

리옹에 도착하던 날 저녁, 안누누나가 부엌에 들어서다 말고 비명을 내질렀다.
“악, 바퀴벌레다! 바퀴벌레야!”

우리는 부리나케 부엌으로 달려갔다. 아니, 세상에! 부엌은 온통 그 흉측한 벌레로 가득 차 있었다. 찬장 위뿐만 아니라 벽 가장자리, 서랍 속, 난로 위, 찬장 속 가릴 것 없이 그 고약한 녀석들이 득실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심전심, 아무 말 안 해도 마음이 통하기라도 한 듯 동시에 바퀴벌레 소탕작전에 나섰다. 안누누나는 이미 꽤 많은 바퀴벌레를 죽였다. 하지만 죽이면 죽일수록 바퀴벌레들은 어디선가 더 많이 기어 나왔다. 우리는 아예 수챗구멍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다음날 저녁이 되자 바퀴벌레들은 또 다른 곳을 통해 기어 나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퀴벌레들을 잡으려고 고양이를 사다 놓고 저녁마다 부엌에서 대살육전을 벌어야만 했다.

바퀴벌레들 때문에 나는 첫날 저녁부터 리옹을 증오하게 되었다. 다음날에는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 리옹에 오면서부터 그 이전의 생활습관은 모조리 버려야 했다. 식사시간도 바뀌었다. 빵은 랑그독에 있던 집에서 먹던 것과는 우선 모양부터 달랐는데, 식구들은 그걸‘왕관빵’이라고 불렀다. 무슨 빵 이름이 이렇담! 안누누나가 푸줏간에 가서 ‘숯불구이용 쇠고기’를 달라고 할 때마다 푸줏간 주인은 노골적으로 누나를 비웃곤 했다. 도대체‘숯불구이용 쇠고기가 뭔지도 모르다니, 미개인 같으니! 아, 정말 지겨운 곳이었다.

우리 식구들은 일요일만 되면 분위기를 좀 바꿔보려고 양산을 받쳐 들고 론 강 강둑으로 산책을 나갔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들 남프랑스 방향인 프라슈쪽을 향해 걸었다.

“이렇게 걷노라면 우리가 살던 곳에 점점 더 가까워질 것 같아.”
나보다 훨씬 더 괴로워하고 있음에 틀림없을 어머니가 그렇게 말했다. 모처럼 가족끼리 나온 산책이었는데 분위기는 침통하기만 했다. 아버지는 투덜거렸고, 자크 형은 계속 눈물을 짰다. 나는 뒤에 처져서 걸었다. 길거리에 나온다는 게 왠지 창피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가난해서 그랬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리옹에서 살기 시작한 지 달포 남짓 됐을 때 안누누나가 병에 걸렸다. 안개 때문에 건강을 해친 것이었다. 우리 가족은 누나를 남프랑스로 다시 보내야만 했다. 어머니를 끔찍이 사랑하던 이 노처녀는 우리와 헤어져야 한다는 게 너무나 슬퍼서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누나는 리옹에서 계속 살아도 절대 죽지 않을 테니 함께 살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그래서 누나를 강제로 배에 태워야만 했다.

남프랑스에 도착한 그녀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결혼을 해버리고 말았다 한다.

안누누나가 떠났지만, 너무나 가난했던 탓에 새로운 하녀를 구할 수가 없었다. 힘든 일만 관리인의 아내가 가끔씩 올라와서 거들어주곤 했을 뿐이었다. 내가 즐겨 입 맞추곤 했던 어머니의 부드럽고 하얀 손은 화덕에 그을려 점점 검고 거칠어졌다. 시장에 가는 일은 자크 형 차지가 되었다.

“자크야, 가서 이것도 사 오고 저것도 사 오렴.”
어머니가 커다란 바구니를 들려주며 이렇게 일러주면 자크 형은 계속 눈물을 흘리면서도 물건들은 하나도 빼먹지 않고 잘 사 왔다.

불쌍한 자크 형! 형 역시 행복하지 못했다. 자크 형의 눈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는 걸 보다 못한 아버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크 형을 미워하고 때리기까지 했다.
“자크, 이 바보 같은 놈! 이 얼간이!”

식구들은 이 소리를 하루 종일 들어야만 했다. 아버지가 옆에 있으면 불쌍한 자크 형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쓰는 바람에 그의 얼굴은 흉하게 일그러지곤 했다. 아버지 때문에 자크형은 날이 갈수록 불행해져갔다.

어느 날 저녁, 식사를 하려고 모두들 식탁에 둘러앉고 나서야 집안에 물이 한 방울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가 가서 떠올게요.”

마음씨 착한 자크 형이 이렇게 말하더니 커다란 사기 단지를 집어 들었다.

아버지는 의외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근데 네 녀석이 가면 틀림없이 단지를 깨고 말걸.”
“자크야, 조심해야 해. 단지를 깨면 안 돼.”

어머니가 차분하게 타일렀다. 그러자 아버지가 또 나섰다.
“그런 말해봤자 아무 소용없어. 틀림없이 깨먹을 테니까.”

자크형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아버지는 꼭 제가 단지를 깨버렸으면 하고 바라시는 것 같네요.”

아버지는 더 이상의 말대답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한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잘라 말했다.
“난 네가 단지 깨는 걸 바라지 않아. 그냥 네가 단지를 깰 거라고 말하는 것뿐이지.”

자크 형은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은 채 단지를 휑하니 들고 서둘러 나갔는데, 말은 하지 않았으나 얼굴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흥! 내가 단지를 깰 거라고? 좋아요, 어디 두고 보라구요.’

그런데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자크 형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걱정이 되는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제발 그 아이한테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아무렴! 그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기야 했겠어? 단지를 깨뜨리고 집에 못 들어오는 것뿐이겠지.”

이렇게 말하고 난(그 무뚝뚝한 표정! 정말 대단한 양반이다)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더니 자크 형이 어떻게 됐는지 직접 두 눈으로 보아야겠다는 듯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자크 형이 문 앞 층계 위에 두 손을 축 늘어뜨린 채 입을 꼭 다물고 화석처럼 서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모습을 보자 형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서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들릴 듯 말 듯 말을 꺼냈다.
“단지를……깨뜨리고……말았어요.”

불쌍한 형은 단지를 깨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는 그 이후로 이 일을‘단지 사건’이라고 부르게 될 것이다.

리옹으로 이사 온 지 두 달쯤 지났을 때 비로소 부모님은 우리에게 공부를 시켜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시게 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를 중학교에 보내고 싶었지만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갔다.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저 애들을 성가대학교에 보내면 어떨까요? 거기 다니는 아이들, 괜찮아 보이던데.”

아버지는 어머니의 제안에 동조하는 미소를 지어 보였고, 생니지에 성당이 우리 집과 제일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나와 자크 형은 생니지에 성가대학교에 가게 되었다.

성가대 학교에서의 생활은 정말 재미있었다. 다른 학교에 다니는 애들처럼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머릿속에 꾸역꾸역 집어넣는 대신 우리는 예배하는 법과 찬송가 부르기, 무릎을 얌전히 꿇는 법, 깔끔하게 향을 피우는 법 등을 배웠는데, 이런 학습은 몹시 까다롭고 어려웠다. 간혹 하루에 한두 시간씩 라틴어 문법과 교회사 수업을 받기도 했지만, 그건 그냥 구색 맞추기로 끼워 넣은 것에 불과했다. 우리가 학교를 다니는 건 무엇보다도 종무(宗務)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미쿠 신부님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 우리에게 이렇게 엄숙하게 말하곤 했다.
“여러분, 내일은 아침 수업이 없다! 장례식에 참석해야 하니까.”

그럼 우리는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정말 재미있었다! 그러고 나면 영세식이나 결혼식에 참석하기도 하고, 지체 높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병을 앓는 사람들에게 성량(聖糧)을 주기도 하는 것이었다. 아, 신부님을 모시고 갈 때마다 얼마나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는지!

성체(聖體) 할 때 쓸 빵과 성유(聖油)를 두 손에 든 미쿠 신부님이 작고 빨간 비로드 닫집 아래 서면 두 아이가 그 닫집을 양쪽에서 받치고 걸어갔다. 그리고 다른 두 아이는 커다란 금빛 초롱을 들고 신부님을 수행한다. 다섯 번째 아이는 따르라기를 흔들며 맨 앞에서 걸었다. 이 일은 보통 내가 맡았다. 성량 행렬이 지나가면 남자들은 모자를 벗고, 여자들은 성호를 그었다. 행렬이 초소 앞을 지나가게 되려면 흩어져 있던 군인들도 보초병의“받들어 총!”이라는 고함소리를 듣고 달려와서는 열을 맞추곤 했다. 장교가 구령을 내질렀다.
“받들어……총!”
“무릎 꿇어!”

총소리가 진동하고, 북소리가 저 멀리 들판에까지 울려 퍼져 나갔다. 그러다가 내가 삼성창(三聖唱)을 부를 때처럼 들고 있던 따르라기를 힘차게 세 번 연거푸 흔들면 행렬은 다시 움직인다. 성가대 학교생활은 정말 재미있었다.

우리들은 각자 자신의 작은 사물함 속에 성직자들이 지녀야 할 장구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긴 꼬리가 달린 검은색법의, 장백의(長白衣), 빳빳하게 풀 먹인 긴 소매 중백의(中白衣), 검은색 명주 양말, 순모와 비로드로 만들어진 빵 모자 두 개, 가장자리에 작고 하얀 진주 무늬를 수놓은 가슴장식 등은 우리 성가대원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이었다.

이런 복장은 내게 아주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우리 다니엘, 그렇게 입고 있으니까 정말 멋져 보인다.”
어머니는 곧잘 그렇게 말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늘 속상했다. 불행하게도 내 키가 너무 작았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커지고 싶어서 발돋움하며 아무리 안간힘을 써봤자 우리 성당의 예장(禮裝) 순경인 카뒤프씨의 가슴팍에도 닿을락 말락 했던 것이다. 게다가 또 몸은 얼마나 약했던지!

언젠가 미사를 드릴 때였다. 복음서를 옮겨놓아야 했는데 어찌나 무거웠던지 내가 책을 들고 가는 건지, 책이 나를 들고 가는 건지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 결국 나는 제단으로 올라가는 층계 위에서 나뒹굴고 말았다. 악보대가 넘어지고, 미사는 중단되었다. 더구나 그날은 바로 ‘성신강림(聖神降臨) 축일’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창피했겠는가…….

키가 너무 작아서 당해야 하는 이런 불편만 빼놓는다면 나는 내 운명에 만족했기 때문에 밤이 되면 옆 침대에 누워 있는 자크 형에게 이렇게 속삭이곤 했다.
“형, 어쨌거나 이 성가대학교라는 데는 정말 재미있는 곳이야.”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 학교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남프랑스에 있는 어떤 대학교의 총장으로 재직하는 아버지 친구가 만일 우리 두 사람 중 한 명을 리옹 중학교의 장학생으로 보내고 싶다면 자기가 주선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야! 이건 바로 다니엘을 두고 한 말이군.”
아버지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그럼 자크는요?”
어머니가 물었다.

“아, 자크 말인가? 그 애는 내가 데리고 있겠어. 쓸모가 아주 많거든. 그 애는 장사에 소질이 있는 것 같아. 그러니 그 애는 장사꾼을 시킵시다.”

어떻게 해서 아버지는 자크 형이 장사에 소질이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던 것일까? 그 당시 불쌍한 형은 우는 것밖에는 소질이 없는 것 같았는데……. 그래도 본인하고 상의를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아버지는 이 문제에 대해서 자크 형과도 나와도 일언반구 상의하지 않았다.

맨 처음 리옹 중학교에 등교하던 날, 오직 나만 작업복을 입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무척 놀랐다. 리옹의 부잣집 아이들은 작업복을 입지 않았다. 그걸 입은 건 ‘곤트’라고 불리는 거리의 불량아들뿐이었다. 내가 허름한 작업복을 입고 있어서 곤트처럼 보였던 모양이었다. 내가 교실에 들어서자 아이들이 히죽히죽 웃으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야, 저 애 좀 봐! 작업복을 입고 있잖아.”

선생님마저 오만상을 찌푸리며 나를 징그러운 벌레 대하듯 했다. 그때부터 선생님의 태도가 부자연스럽게 변하더니 나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 선생님은 내 이름은 절대 부르지 않고 늘“어이, 거기 꼬마!”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내 이름이 다니엘 에세트라고 고쳐주었다. 결국 우리 반 급우들도 나를‘꼬마’라고 불렀고, 어느새 ‘꼬마’는 내 별명이 되고 말았다.

내가 다른 아이들과 구별되었던 것은 항상 작업복을 입고 다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른 아이들은 예쁜 노란 가죽 가방과 향긋한 냄새가 풍기는 회양목 잉크병, 하드커버로 장정된 노트, 밑에 많은 주석이 달린 새 책들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강둑을 따라 늘어서 있는 헌책방에서 산 내 책은 너무나 오래되어 곰팡이가 슬고, 바래고, 기름 썩은 냄새가 났다. 겉표지는 너덜너덜했고, 군데군데 없는 페이지도 많았다.

보다 못한 착한 자크 형이 끙끙대면서 풀과 판지를 이용하여 책들을 다시 제본해주었다. 그런데 자크형이 풀을 너무 덕지덕지 바르는 바람에 내 책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자크 형은 또 내게 주머니가 무지하게 많이 달린 책가방도 만들어주었는데, 편하기는 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풀을 너무 많이 발라놓았다.

어쨌든 자크 형은 우는 일만큼이나 풀을 바르고 판지로 장정하는 일에 열중했다. 자크형은 일하는 가게에서 빠져나오기만 하면 늘 자그마한 풀단지들을 불앞에 늘어놓은 다음 열심히 풀을 바르고, 제본하고, 판지로 장정을 했다. 정말 너무 열심이었다. 그리고 그 나머지 시간에는 시내에서 짐을 나르고, 불러주는 대로 받아쓰고, 물건을 사러 가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장사를 배우는 것이었다.

장학생이기 때문에, 작업복을 입었기 때문에,‘ 꼬마’라고 불렸기 때문에 남들보다 두 배는 더 열심히 공부를 해야만 그들과 동등해질 수가 있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그리하여 나는 열성을 다해 공부했다.

겨울에 불기 하나 없는 방에서 다리에 이불만 겨우 덮고 책상 앞에 앉아 밤낮없이 공부하던 나를 생각하면 새삼 대견스러워진다. 유리창에는 성에가 하얗게 끼어있었다. 그렇게 공부를 하고 있노라면 가게에서 아버지가 자크형에게 무언가를 불러주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저는 이달 8일부로 귀하가 보내주신 서한을 잘 받아보았습니다.”

그러고 나면 자크형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는 이달 8일부로 귀하가 보내주신 서한을 잘 받아보았습니다.”

이따금 방문이 살그머니 열리곤 했다.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살금살금 내게 다가오신다. 쪼옥!
“공부하니?”
“네, 엄마.”
“안 추워?”
“아……아니요!”

나는 몹시 추웠지만 그렇게 거짓말을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오랫동안 내 곁에 앉아 뜨개질을 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그물코를 새기도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기도 하셨다.

불쌍한 어머니! 어머니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그 아름답고 정든 마을을 생각하고 계신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우리에게 몰아닥친 또 하나의 불행, 우리 모두에게 닥친 그 불행 때문에 곧 그 마을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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