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굿북 Oct 31. 2017

06.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

<당신이 알지 못했던 걸작의 비밀>



대중은 당혹스러워하면서도 깊은 감동을 받았다. 신문에는 다양한 반응들이 실렸다. 한 나이 많은 여성은 큰 소리로 이런 기도를 중얼거렸다. “신이여, 제가 이 그림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한 젊은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끔찍하네.” 그림이 끔찍하다는 뜻이 아니라 끔찍한 느낌이 들었다는 의미였다. 이 그림 속에서 ‘4차원’을 보았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 비평가는 다소 이상하지만 이렇게 주장했다. “내게 이 그림은 극도로 현대적인 방식의 대규모 회화이다. 기술적으로는 다소 부족하지만 오늘날에는 이것이 죄가 아니다. 사실 솜씨 있는 화가나 어린아이는 채색을 잘 못해도 볼 만한 그림을 만들어낸다.”


<게르니카>는 지치지도 않고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뉴욕으로 돌아왔지만 그곳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유럽과 태평양 지역 모두에서 끔찍한 전쟁의 소식이 들려오면서 이 그림을 찾는 곳은 더욱 늘어났다. 1940년 1월에는 시카고 미술관, 1941년에는 오하이오의 콜럼버스 미술관, 그리고 1941년 가을과 1942년 여름에는 하버드 대학 포그 미술관에서 전시되었다. 포그 미술관 측은 이 그림을 이렇게 설명했다. “피카소의 끔찍한 작품 <게르니카>는 폭격으로 인한 고통을 부르짖으며, 고속 엔진의 고음으로 진동한다. 이 비인간적인 광경은 외부의 재난에 의해 부서지고 고통받는 우리의 인간성 그 자체이다.” 2차 세계대전의 끔찍한 장면들을 뉴스 영화로 접한 미국인들은 전쟁에 대한 피카소의 예술적 해석을 숨을 죽이고 감상했다. 이 그림은 노골적인 뉴스 속 장면들에 철학적인 무게를 더했다.


계속되는 여행은 그림 자체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이동시킨다 해도 워낙 크고 무거운 그림이었기 때문에 뒤판에서 떼어낸 후 특수 제작된 통에 말아 넣어 옮길 때가 많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뉴욕 현대 미술관은 이 그림을 계속 소장한 채 피카소가 처분 방법을 결정하기를 기다렸다. 아무도 서두르지 않았다. 프랑코 장군이 여전히 마드리드에 있었고, 스페인은 한동안 그림을 돌려받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스페인은 역사 속의 부끄러운 순간을 되살리고 싶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전쟁으로 파괴된 유럽은 피카소의 걸작에 매료되었다. 이미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그림으로 자리매김한 <게르니카>는 더 많은 순회 전시를 통해 그 명성을 확고히 하게 된다. 1953년 10월에는 밀라노의 팔라초 레알레에서 대규모의 피카소 전시회가 열렸고 <게르니카>는 이 전시의 히트작이었다.


-“파블로 피카소의〈게르니카〉-〈게르니카〉의 여행” 중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02. 바퀴벌레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