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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Oct 31. 2017

06. 누가 끝까지 리더와 함께할 것인지 통찰하라.

<1인자의 인문학 한국편>


인조(우유부단한 1인자) vs 최명길(현실적인 2인자)

영화 <남한산성> 김상헌과 최명길 스틸컷


정온이 말한 ‘매국흉(賣國兇)’은 최명길을 지칭한 것이다. 그는 이후 화의가 이뤄지자 사직한 뒤 덕유산에 들어가 은거하다 5년 만에 죽었다. 정온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상헌은 아들과 조카 등 여러 사람이 주위에 있을 때 자결을 시도했다. 그러나 자결하는 시늉만 했을 뿐 실제로 자결을 하지는 못했다. 그는 이로 인해 적잖은 구설에 시달렸다. 훗날 인조도 심한 배신감을 토로했다. 『인조실록』의 기록이 그 증거다.

“벼슬이 영화롭고 녹이 많은 때 떠나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위태로워 망하게 되자 다투어 나를 버리니 누가 우리나라를 예의지국이라고 하겠는가. 김상헌이 평소 나라가 어지러우면 같이 죽겠다는 말을 해 나도 그렇게 여겼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먼저 나를 버리고서 젊고 무식한 자의 앞장을 서 또 다시 척화를 주장하고 있으니 내가 매우 아까워한다.”

김상헌이 성 밖으로 나가기 전과 후에 보여준 행보는 앞뒤가 전혀 맞지 않았다. 그가 주장한 척화론의 이론적 근거는 임금과 왕실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근왕(勤王)이었다. 그러나 출성하는 인조를 버리고 고향으로 떠난 그의 행위는 근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교과서에 그가 심양으로 끌려갈 때 읊었던 시조인 「가노라 삼각산아」가 실린 것은 그를 오랫동안 절의의 상징처럼 여긴 잘못된 시각이 이어지고 있음을 뜻한다. 그의 모순된 행보는 당시에도 커다란 비판의 대상이었다. 기록은 그를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
“군주가 큰 위험에 빠진 때 멀리 달아났고, 일이 안정되고서도 찾아와 알현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절의를 지킨다고 하니 이는 자신의 명예를 구하느라 군주를 팔아먹고 붕당을 세워 나라를 그르친 것이다.”

인조는 최명길을 통해 무조건 항복을 청하는 국서를 보내면서 윤집과 오달제를 함께 보냈다. 인조는 그들이 청군 진영으로 떠난 다음 날 항복의식을 치르기 위해 소현세자와 함께 산성을 나섰다. 한겨울에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지 45일 만의 일이었다. 실록은 그가 항복의식을 치르는 모습을 이같이 묘사해놓았다.
“주상이 시종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을 통해 성을 나갔다. 주상이 세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항복예식을 올렸다. 간단한 잔치와 술을 올리는 의식이 끝나고 청태종의 하사품인 백마와 담비의 모피로 만든 갖옷을 전하자 주상이 이 옷을 입고 뜰에 들어가 사례했다. 주상이 밭 가운데 앉아 진퇴를 기다리자 해질 무렵에 비로소 도성으로 돌아가게 했다.”

비참한 모습이다. 청태종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의 왕자들과 척화파의 괴수로 지목된 오달제와 윤집을 볼모로 데리고 심양으로 돌아갔다. 소현세자의 북행길에는 대소 신료를 포함해 300명의 수행원이 뒤따랐다. 이들이 심양의 숙소에 거주하자 사람들은 이곳을 심양관으로 불렀다. 조선과 청은 모든 문제를 심양관을 통해 처리했다.

최명길은 청군이 물러간 지 얼마 안돼 우의정에 제수되었다가 이내 좌의정으로 승진했다. 그는 다시 상소를 올렸다. 국내정치를 혁신해 자강의 토대를 마련하고 명과 협력해 청나라에 복수하는 방안을 찾아보자는 게 골자였다. 그는 그리하여 승려 독보를 명나라로 보내 정세를 살피게 했다. 그러나 당시 명나라는 이미 농민반란이 각지에서 일어나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조선에 있던 최명길이 이런 사실을 알 리 없었다. 결국 승려 독보의 파견은 안 하느니만 못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는 심양으로 들어가 포로 송환 문제를 협의하는 등 흐트러진 정국을 일신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송환된 부녀자들이 시댁에서 쫓겨나는 ‘환향녀(還鄕女) 문제’가 드러났다. 환향녀는 여인에 대한 욕설로 사용되는 ‘화냥년’의 어원이 된 말이기도 하다. 왜란 때도 유사한 일이 있었다. 선조는 이혼을 청하는 상소를 허락지 않았다. 이미 다시 장가를 들었다가 아내가 일본에서 쇄환되자 나중에 얻은 부인을 첩으로 삼으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최명길은 이런 전례를 들어 인조에게 사대부들이 ‘환향녀’를 내치지 못 하도록 강력하게 조치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환향녀’를 내쳤다. 사건은 신풍부원군 장유가 돌아온 자신의 며느리를 받아들일 수 없으니 이혼을 허락해 달라고 예조에 신청한 데서 비롯되었다. 얼마 후 전 승지 한이겸은 정반대로 자신의 사위가 돌아온 자신의 딸을 내치며 다시 장가를 들려 한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인조실록』에 최명길의 애절한 마음이 실려 있다.


“예전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처를 그대로 데리고 살면서 자식을 낳고 손자를 낳아 명문거족이 된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신이 심양에 갔을 때 속환하기 위해 따라온 사족들 모두 아내를 만나 부둥켜안고 통곡하기를 마치 저승에 있는 사람을 만난 듯이 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반복해 생각해 보아도 끝내 이혼하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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