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시대>
일터에서의 차별은 서럽다. 서울의 어느 대학 병원에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식권 색깔을 달리했다. 어떤 회사에서는 비정규직들이 통근 버스에서 먼저 자리를 차지해 정규직이 앉을 자리가 없다며 통근 버스 좌석 지정제를 시행했다. 서울대는 비정규직에게 정규직에 비해 5배 높은 주차비를 물리다 사회적 지탄을 받았다. 이와 같은 일상적 차별은 노동자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훼손하지만 정당화를 위해 쉽게 내면화된다.
문제를 제기했다가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고 직장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문제를 외면할 변명거리를 만든다. 하지만 그렇게 용인된 차별은 재생산되고 구조화되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고착화된다. 그 결과 비정규직의 권리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사람들은 ‘좀 더 노력해서 정규직이 되지, 무임승차를 하려고 한다’라는 식의 싸늘한 반응을 보인다. 더 나아가 노동자 스스로 ‘어차피 잠깐 일할 곳’, ‘세상은 원래 그런 곳’하며 무시하거나 체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일상적인 모욕을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내부에서도 자신보다 더 열악한 상황의 노동자들을 차별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더 어려운 여건의 이주 노동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더 힘든 일을 맡기거나, 함부로 대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내면화된 차별이 불러온 부작용이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인정받지 못할 때, 사람들은 더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무시함으로써 자존감을 지키려 한다. 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가혹한 태도는 좌절감의 부산물이다.
<모멸감>에서 김찬호 교수는 이런 한국 사회의 모습을 김우창 교수의 ‘오만과 모멸의 구조’라는 말을 빌려 설명한다. 제도적인 신분이 붕괴된 후에도 한국 사회에는 신분의식이 지속되었는데, 이것이 ‘타자와의 관계를 힘의 우열이라는 프리즘으로 가늠하는 습관’으로 남았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진 세상이 되었지만, 그 풍요를 얻기 위한 경쟁이 점점 더 가혹해지면서 차별과 배제가 관성으로 굳어진 것이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들은 도리어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권리와 존엄을 확인하고 각성하게 만든다. 마트 노동자로 살아오면서 느낀 모멸감을 다른 사람에게 되갚아주는 대신, 노동조합을 결성해 연대하여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자각하고 이를 확산시켜 나간 것처럼 말이다. 같은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은 공감을 나누며 그들의 감정을 존중받기 위해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냈다.
다산콜센터의 ‘원스트라이크 아웃’제나 계산대에 놓인 의자뿐만 아니다. 2016년 10월 17일, 고용노동부는 고객으로부터 성희롱과 폭언을 들은 충격으로 적응장애를 앓고 있던 박수미 씨의 사례를 산업재해로 인정했다. 대형 마트에 근무하는 감정노동자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산업재해로 인정한 것은 이번 사례가 처음이다. 어쩌면 이것이 첫 걸음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