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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03. 2017

05. 네 밥벌이를 해라.

<꼬마 철학자>



사를랑드는 세벤느 지방의 한 작은 도시로서, 마치 병풍처럼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좁다란 골짜기 안에 자리 잡고 있다. 그곳의 날씨는 변덕이 심해서 해가 내리비칠 때면 푹푹 찌는 무더위로 숨통이 막힐듯했고, 북풍이 몰아치면 매서운 추위가 살을 에는 듯한 곳이었다.

내가 도착한 날 저녁에는 아침부터 몰아치기 시작한 북서풍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사를랑드로 들어가는 순간, 합승마차 위 좌석에 앉은 나는 비록 봄철이기는 하지만 냉기가 가슴속까지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길거리는 어둡고 인적도 끊겨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연병장으로 쓰이는 광장 한켠에 있는, 윤곽만 어슴푸레 보이는 사무실 앞에서 몇 사람이 발을 동동 구르며 마차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마차 지붕에서 내려오자마자 나는 즉시 안내를 받아 내가 근무하게 될 학교로 향했다. 한시바삐 일을 시작하고 싶었던 것이다.

학교는 광장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정적만 감도는 거리를 두세 번 꺾어들자 내 트렁크를 들고 가던 짐꾼은 오래전부터 버려져있는 듯한 커다란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췄었다.



“다 왔습니다. 여기예요.”
그는 문에 달린 큼지막한 쇠고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쇠고리가 육중한 소리를 내며 밑으로 떨어지자 문이 스르르 열렸다. 나는 짐꾼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 어둠에 잠긴 현관문 아래서 잠시 기다렸다. 바닥에 트렁크를 내려놓은 짐꾼은 내게서 돈을 받자 유령처럼 어디론가 사라졌다. 곧이어 문이 다시 닫히는 소리가 무겁게 들려왔다. 잠시 뒤, 손에 큼직한 등을 든 수위가 졸린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새로 온 학생 이우?”

내가 학생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전 학생이 아니고 자습감독 교사로 여기 온 겁니다. 교장실까지 절 좀 안내해주시겠어요?”

수위는 내 말에 놀라는 눈치였다. 그는 모자를 벗더니 나더러 수위실 안에 잠시 들어가서 기다리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지금은 교장이 학생들과 함께 교회에 가있기 때문에 저녁기도가 끝나는 대로 교장실로 안내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수위실 안에서는 방금 저녁식사를 끝낸 모양이었다. 다부진 체격에 금발 수염을 기른 키 크고 잘생긴 남자가 브랜디를 마시고 있었고, 그 곁에는 마르멜로 열매처럼 노란색 피부에 바짝 마르고 병약해 보이는 여자가 허름한 숄을 귀까지 덮어쓴 채 앉아있었다.

“이분은 누구신가요, 카사뉴 씨?”

수염 난 남자가 나를 보며 수위에게 물었다.

“새로 오신 자습감독 선생님이신데……, 키가 너무 작아서 처음엔 학생인 줄 알았답니다.”

수위가 나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그러자 수염 난 남자가 술잔 너머로 나를 쳐다보며 대꾸했다.

“사실 이 학교에는 선생님보다 키도 크고 나이도 많은 학생들도 더러 있어요. 음, 누구더라? 베이용도 그렇고…….”

수위가 덧붙였다.

“크루자도 그렇지요.”

이번에는 여자가 거들었다.

“수베이롤도 있잖아요.”

그렇게 한마디씩 하고 난 뒤 그들은 브랜디 잔에 코를 박은 채 나를 곁눈질하며 자기들끼리 낮은 소리로 뭐라고 지껄였다. 밖에서는 매서운 북풍이 몰아치는 섬뜩한 소리와 성당에서 목청껏 기도문을 외우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종이 울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현관 쪽에서 쿵쿵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카사유 씨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기도가 끝난 모양입니다. 교장실로 올라가시죠.”

그가 램프를 집어 들더니 앞장서서 수위실을 나갔다.

학교는 굉장히 넓어 보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복도, 높다란 현관, 정교하게 세공된 쇠난간이 달린 넓은 층계……. 이 모든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검게 변했다. 수위는 1789년까지만 해도 이곳은 귀족계급 출신의 학생만 입학할 수 있는 해군학교로서 한창때는 8백 명에 이르는 학생들을 수용했다고 내게 알려주었다.

수위의 얘기가 끝나갈 무렵 우리는 교장실 앞에 다다랐다. 카사뉴 씨는 쿠션을 넣은 이중문을 조심스럽게 밀면서 가볍게 두 번 두드렸다.


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오시오!”

우리는 교장실로 들어갔다.

아주 널찍한 교장실은 벽이 온통 초록색 벽지로 도배되어 있었다. 교장은 방 안쪽에 놓인 긴 책상 앞에 앉아서 갓이 완전히 내려진 램프의 희미한 불빛을 받으며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교장선생님! 세리에르 씨의 후임 선생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수위가 내 등을 앞으로 슬며시 떠밀면서 말했다.

“아!, 그래요?”

교장은 여전히 글을 쓰는 데 몰두하며 말했다.

수위는 꾸벅 인사를 하더니 교장실에서 나갔다. 나는 초초해진 나머지 모자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면서 교장실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쓰던 걸 다 쓴 듯 교장이 내게로 몸을 돌렸고, 나도 창백하고 마른 얼굴에 차갑고 색깔 없는 두 눈만이 빛나고 있는 교장의 자그마한 얼굴을 여유 있게 관찰할 수가 있었다. 그는 나를 좀 더 자세히 보려고 램프 갓을 위로 끌어올리더니 코 안경을 바짝 추켜올렸다.

“아니, 어린애 아냐!”

교장이 의자에서 펄쩍 뛰어오르더니 소리쳤다.

“어린애를 데리고 뭘 어떡하라는 거야!”

교장의 푸념을 듣자 나는 몹시 두려워졌다. 순간, 돈 한 푼 없이 길거리로 내쫓긴 초라한 내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간신히 두세 마디 더듬거리고 난 나는 교육감이 써준 소개장을 머뭇거리며 교장에게 내밀었다.

편지를 받아든 그는 읽고 또 읽고 접었다가 다시 펴서 또 읽더니 결국 교육감이 특별히 추천하기도 했고 또 우리 가족들의 명예를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도 있으니, 너무 어려서 걱정되기는 하지만 자습 감독교사로 받아들 이겠노라고 마지못해 허락했다. 그는 이어 내가 해야 할 일의 중요성에 대해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내 귀에는 그의 말이 한마디도 들어오지 않았다. 내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건 해고를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내 가슴은 터질 듯 기뻤다. 설사 교장의 손이 천 개였더라도 난 그 천 개의 손 전부에 입을 맞추었으리라.

그렇게 한동안 얼이 빠져 서 있던 나는 요란한 쇳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놀라서 돌아보니 붉은 구레나룻을 기른 껑충하게 키가 큰 남자가 소리 없이 교장실로 들어와서는 내 앞에 우뚝 서 있는 것이었다. 바로 자습 감독 주임교사였다.

그 남자는 머리를 옆으로 약간 기울인 채 크고 작은 열쇠들을 검지에 꿰고 흔들면서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미소를 보니 그에게 호의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열쇠들이 부딪치면서 내는 그 끔찍한 짤랑! 짤랑! 짤랑! 소리 때문에 여전히 나는 두렵기만 했다.

“비오선생, 이번에 세리에르 선생 후임으로 오신 분입니다.”

비오 씨는 고개를 숙이면서 내게 예의 그 다정다감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가 들고 있는 열쇠는‘이 꼬마가 세리에르 선생 후임이란 말이지? 꺼져라, 꺼져! 웃기지 말라고!’하며 빈정거리는 듯 더욱 요란하게 흔들거렸다.

교장도 주임교사가 무슨 뜻으로 그렇게 열쇠들을 흔들어대는지를 알아차린 듯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덧붙였다.


“나도 세리에르 선생이 떠남으로 해서 우리가 회복하기 힘든 손실을 입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요(이 대목에서 주임교사가 또 열쇠 꾸러미를 흔들어댔다). 하지만 비오 선생께서 새로 오신 선생님에게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감싸주시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주의해야 할 사항을 설명해주신다면 세리에르 선생이 떠났다고 해서 학교 질서나 규율이 엉망으로 흐트러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서는군요.”

비오 씨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진심으로 환영하며 성심껏 조언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열쇠들이 부딪치는 소리는 그다지 관대하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내 귀에는 그 소리가 꼭‘난쟁이 꼬마야, 조심해라’하고 경고하는듯한 소리로 들렸던 것이다.

“에세트 선생, 이제 가보셔도 좋습니다. 오늘 저녁은 호텔에 가서 주무셔야 되겠군요. 내일 아침 8시까지 출근하셔야 합니다. 그럼…….”

교장이 내게 점잖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비오 씨는 조금 전보다 더욱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현관까지 배웅해주었다. 그리고 내가 돌아서려 하자 내 손에 조그만 수첩 한 권을 쥐여주었다.

“학교 규칙이 써 있소. 읽어보시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러 가지 잘 생각해보시오.”

말을 마친 그는 내게 문을 열어주더니 열쇠를 흔들면서 문을 닫았다. 짤랑! 짤랑! 짤랑!

그 사람이 불 켜주는 것을 잊어버리는 바람에 나는 어두운 복도에 남아 길을 찾으려고 벽을 더듬거리며 한동안 헤매야만 했다. 어스름한 달빛이 높이 나있는 창문의 창살을 통해 새어 들어왔기 때문에 그나마 방향을 가늠할 수가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복도의 어둠 속에서 별안간 불빛 하나가 흔들거리며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몇 발자국 앞으로 나갔다. 불빛은 점점 커지면서 내게로 다가오더니 내 옆을 그냥 지나쳐 사라져버렸다. 환영을 본 것 같았다. 하지만 비록 그 환영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긴 했어도 나는 그 환영을 세세하게 볼 수가 있었다.

두 여자, 아닌 두 그림자가 바로 그 환영의 실체였다. 한 사람은 쭈글쭈글한 주름투성이 얼굴의 반을 차지할 만큼 큼지막한 안경을 쓰고 허리가 완전히 구부러진 노파였고, 또 한 사람은 날씬한 몸매에 마치 유령처럼 훌쭉하기는 했지만 분명히 아주 크고 새까만 두 눈을 가진(유령들에게는 대부분 눈이 없는데 말이다) 젊은 여자였다. 노파의 손에는 조그만 구리 램프가 들려 있었고, 검은 눈동자의 여인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두 그림자는 나를 보지 못한 듯 소리도 없이 순식간에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두 사람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 무언가에 홀린 듯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여 같은 자리에 서있었다.

다시 더듬거리며 복도를 걸어갔지만 내 가슴은 마구 방망이질 쳤고, 어둠 속에서 여전히 그 안경잡이 마귀할멈이 검은 눈의 젊은 여인과 함께 걷고 있는듯한 환상에 시달려야만 하였다.

어쨌든, 문제는 밤을 지낼 숙소를 찾는 것이었다.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도 수위실 앞에서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던 그 수염 난 남자가 내 사정 얘기를 들어보더니 선뜻 나를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귀족처럼 극진한 대우에 그다지 비싸지 않은 작은 여관으로 안내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구레나룻 남자는 꼭 천진난만하기 짝이 없는 어린아이 같아 보였다. 함께 걸어가면서 그는 자기 이름이 로제이며, 사를랑드 중학교에서 춤과 마술(馬術)·펜싱·체조를 가르치는 교사이고, 아프리카에서 엽보병(獵步兵)으로 오랫동안 근무했다고 하였다. 아프리카에서 군인으로 복무한 적이 있다는 말을 듣자 나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어린아이들은 항상 군인들을 좋아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관 앞에서 힘찬 악수를 나누면서 이제부터 친구로 지내자고 굳게 약속하고 헤어졌다. 독자 여러분, 여러분께 고백할 게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낯선 마을의 누추한 여관 침대에 홀로 걸터앉은 나는, 위대한 꼬마 철학자라는 자부심도 팽개친 채 미어지는 가슴을 억누르지 못하고 어린애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삶이 무섭게 느껴졌던 것이다. 삶 앞에서 나 자신이 무기력하고 허약하게 느껴져서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그렇게 한없이 눈물을 쏟고 있는데 별안간 가족들의 얼굴이 내 눈앞을 줄지어 지나갔다. 버려진 집과 어머니는 이리, 아버지는 저리,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이제 내겐 가족도 집도 없다!

마침내 나 자신의 괴로움은 잊어버린 채 오직 가족 모두의 불행만을 생각하기 위해서 나는 거창하고 갸륵한 결심을 했다. 그건 바로 거덜 난 에세트가문을 혼자 힘으로 일으켜 세우겠다는 결심이었다. 나는 내 평생을 바쳐 달성해야 할 목표를 정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며, 집안을 일으켜 세우게 될 남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눈물을 닦고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새로운 임무를 숙지하기 위해 즉시 비오 씨가 건네준 수첩을 펼쳤다.

비오 씨가 손수 정성 들여 베낀 그 규율은 영락없는 조약문으로서 세 부분으로 체계적으로 나뉘어있었다.

1. 상급자에 대한 자습감독 교사의 의무
2. 동료들에 대한 자습감독 교사의 의무
3. 학생들에 대한 자습감독 교사의 의무

거기에는 창유리가 깨졌을 경우에서부터 두 학생이 동시에 손을 들었을 경우에 이르는 모든 경우가 언급되어 있었다. 또한 교사들의 봉급 액수에서부터 식사 때는 포도주를 반 병만 마셔야 한다는 것에 이르기까지, 교사 생활에 관한 지침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규율집은 규율의 효용성을 찬양하는 한편의 감동적인 연설로 끝을 맺고 있었다. 물론 나는 비오 씨의 이 작품에 대해 경탄을 금할 수가 없었지만, 도저히 끝까지 읽을 여력이 없어서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날 밤 나는 악몽에 시달렸다. 이상야릇한 환영들이 수없이 꿈속에 나타나 나를 괴롭혔다. 비오 씨가 짤랑! 짤랑! 짤랑! 끔찍한 소리를 내는 열쇠 꾸러미를 들고 나타나는가 하면, 안경잡이 마귀할멈이 내 머리맡에 다가와 앉는 바람에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뜨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이번에는 매혹적인 검은 눈동자 아가씨가 내 침대 발치에 앉아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기도 했다.

다음날 아침 8시에 나는 학교에 도착했다. 열쇠 꾸러미를 손에 든 비오 씨가 정문에 버티고 선 채 등교하는 학생들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감시하고 있었다. 나를 본 그는 한껏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맞았다.

“현관에서 기다리세요. 학생들이 다 등교하고 나면 다른 선생님들께 소개시켜드리지요.”

그의 말대로 현관에서 기다리던 나는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가 교사인 듯싶은 사람이 다가오면 고개가 땅에 닿을 정도로 정중하게 인사를 했지만, 그들은 숨을 헐떡거리며 그냥 달려가버렸다. 그런데 딱 한 사람이 내 인사를 받아주었다. 비오 씨 말에 따르면, 그는 신부이자 철학교사이며,‘ 괴짜’라는 것이었다. 왠지 모르게 나는 그 괴짜라는 사람이 금세 좋아졌다.

그때 종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교실마다 학생들로 가득 찼다.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얼굴에 남루한 옷을 걸친 스물다섯에서 서른 살가량의 키 큰 청년 네댓 명이 촐랑거리며 뛰어 들어오다가 비오 씨와 마주치자 흠칫 놀라면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비오 씨가 나를 가리키며 그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새로 온 동료인 다니엘 에세트 씨를 소개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난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잠자코 서 있다가 여전히 미소 띤 얼굴에, 여전히 머리를 옆으로 약간 기울인 채 변함없이 그 끔찍한 열쇠 꾸러미를 흔들어대며 사라졌다.

내 동료들과 나는 한참 동안 아무 말없이 서로 쳐다보았다.

그들 가운데에서 가장 키가 크고 뚱뚱한 사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이 바로 나의 전임(前任)인 세리에르, 이 사람 저 사람한테서 얘기를 들은 그 세리에르 씨였다. 그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렴! 선생들이 계속 뒤를 잇긴 하지만 서로 닮지는 않았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로군.”

자신의 장대 같은 키와 짜리 몽땅한 내 키를 빗대어 표현한 게 분명했다. 그러자 모두들 폭소를 터뜨렸고, 나는 오히려 그들보다 먼저 웃었다. 하지만 그 순간, 만일 내 키가 단 몇 인치라도 커질 수만 있다면 기꺼이 내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넘겼으리라는 말은 독자 여러분께 꼭 하고 싶다. 그 뚱보 세리에르 씨가 내게 손을 내밀며 덧붙였다.

“신경 쓰지 말아요. 키 차이가 난다고 해서 술 한 잔 같이할 수 없는 건 아니니까. 우리랑 같이 갑시다, 친구. 수업 시작하기 전에 바르베트카페에서 내가 이별주 한잔 사겠소. 자, 에세트 선생께서도 참석해주었으면 해요. 모름지기 술 한 잔씩 나누다 보면 허물이 없어지는 법이라오.”

그는 내가 대답할 틈도 없이 내 팔을 끼더니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동료들이 날 데려간 바르베트 카페는 연병장으로 쓰이는 광장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을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의 하사관들이 카페의 단골손님인 듯, 카페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나는 모자걸이에 걸려 있는 수 많은보병용군모(軍帽)와 혁대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학교를 떠나는 날이라고 세리에르 씨가 이별주를 한잔 사기로 해서였는지 카페에는 단골손님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모두들 기다리고 있었다. 세리에르 씨로부터 나를 소개받은 하사관들은 진심으로 나를 환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 나의 출현은 별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는지 나는 그들로부터 금세 잊혀져서 카페 한구석에 조심스럽게 앉아있어야만 했다.

술잔이 채워지는 동안 뚱뚱보 세리에르 씨가 내 옆에 다가와 앉았다. 코트를 벗은 그는 자기 이름이 새겨진 기다란 사기(砂器) 파이프를 입에 물었다. 바르베트카페에 온 다른 자습감독교사들도 모두들 그런 파이프를 하나씩 물고 있었다. 뚱보 세리에르 씨가 내게 말했다.

“음, 친구. 보다시피 자습감독 선생을 하다 보면 이렇게 즐거운 시간도 갖게 되지요. 말하자면 사를랑드는 에세트 선생의 초임지로는 안성맞춤이라는 얘기요. 우선 바르베트 카페의 압생트 술맛은 아주 일품인데다가 저기 저 감옥도 과히 나쁘진 않을 거요.”

감옥이란 학교를 이르는 말이었다.

“선생은 하급반을 맡게 될 겁니다. 엄하게 다뤄야 해요. 내가 그놈들을 얼마나 엄격하게 다루는지 보셨어야 하는 건데! 교장은 나쁜 사람은 아니오. 동료 교사들도 다들 좋은 사람들이고. 다만 그 노파와 비오 신부는…….”
“노파라니요?”

내가 몸을 떨면서 물었다.

“아, 곧 다 알게 될 거요. 큼직한 안경을 걸친 그 노파는 밤이고 낮이고 상관하지 않고 학교를 어슬렁거리고 다니지……. 교장선생의 친척 아주머닌데 학교 회계 일을 하고 있소. 하여간 지독하게 고약한 할멈이야!”

세리에르 씨가 인상착의를 설명해주자 전날 밤 복도에서 만난 마귀할멈의 모습이 되살아나면서 나도 모르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열두 번도 넘게 그의 말을 가로막고“그럼 그 검은 눈동자의 아가씨는요?”하고 물을 뻔했던 것이다. 하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바르베트 카페에서 검은 눈동자의 아가씨 얘기를 하다니!

그 사이에 잔이 돌았고, 다시 빈 잔이 채워졌으며, 채워진 잔은 또 비워졌다. 그들은 건배! 소리와 오! 아! 하는 소리를 연발하면서 당구 큐대를 공중으로 던지고, 서로 떠밀고 잡아당기고, 웃고 욕설을 퍼붓고 귓속말을 하는 등 온통 난장판을 벌였다.

나도 점점 대담해져갔다. 구석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술잔을 손에 든 채 그들에게 질세라 큰 소리로 떠벌리며 여기저기 망아지처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즈음, 하사관들은 벌써 내 친구가 되어 있었다. 뻔뻔스럽게도 나는 우리 집은 대단한 부자인데 젊은 혈기에 그만 철없는 짓을 저지르는 바람에 집에서 쫓겨났다고 떠벌렸다. 그래서 순전히 먹고살려고 자습 감독 교사가 됐지만 학교에 오래 남을 생각은 없다고 말이다. 내가 굉장한 부잣집 아들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아, 그 순간 리옹에 있는 가족들이 내 말을 들었더라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아, 인간들이란 얼마나 우스운 존재들인가! 바르베트 카페에 있던 사람들은 내가 가난해서 선생질을 하는 게 아니라 방탕한 기질 때문에 집에서 쫓겨난 괴짜 청년이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는 모두들 나를 호감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고참 하사관들도 감히 내게 말을 걸려 하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술자리가 끝날 무렵에는 전날 밤 친구가 되었던 체육 교사 로제가 일어나더니 다니엘 에세트를 위해 건배까지 하는 게 아닌가. 그 순간에 내가 얼마나 우쭐했는지, 그건 독자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나를 위한 건배가 끝나자 우리는 술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벌써 9시 45분이었고, 우리는 학교로 돌아가야 했다.

비오 씨가 정문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이별주에 취해 비틀거리는 뚱보 세리에르 씨에게 그가 말했다.

“세리에르 씨, 마지막으로 학생들을 데리고 자습실로 들어가도록 하세요. 학생들이 교실에 다 들어가면 교장선생님과 내가 새로 오신 선생님을 학생들에게 소개하지요.”

잠시 후 교장과 비오 씨, 그리고 나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자습실로 들어갔다.

학생들이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장이 약간 길기는 하지만 위엄에 가득 찬 연설을 통해 나를 학생들에게 소개했다. 교장이 교실을 나가자 이별주에 취해서 고주망태가 된 뚱보 세리에르 씨가 그 뒤를 따라나갔다. 비오 씨만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짤랑! 짤랑! 짤랑! 하고 울리는 열쇠가 그 어떤 말보다도 더 위협적이었는지 모두들 책상 밑에다 머리를 처박았고, 나 역시 안심이 되지를 않았다.

드디어 그 무서운 열쇠 소리가 사라지자마자 장난기 어린 수많은 얼굴들이 책상 밑에서 하나씩 고개를 들며 나타났다. 아이들은 펜 끝에 달린 깃털을 입술에 갖다 댄 채 눈을 반짝이며 겁을 먹은 표정으로, 혹은 조롱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저희들끼리 귓속말로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좀 당황한 나는 천천히 교단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매서운 눈초리로 교실을 한번 쭉 휘둘러보고는 힘껏 목청을 돋운 뒤 책상을 세게 내려치면서 고함쳤다.

“자, 공부합시다! 여러분, 공부하자구요!”

내 자습 감독교사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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