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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03. 2017

06. 아이들

<꼬마 철학자>



내가 맡고 있던 하급반 아이들은 모두 착했다. 다른 반 아이들과는 달리 내 속을 썩이거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이 결코 없었다. 나 또한 그들을 몹시 좋아했는데, 아직 중학생 티가 배지 않은 데다가 그들의 눈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맑은 영혼을 갖고 있나 그대로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벌을 준 적이 없었다. 벌은 줘서 뭐 하나? 새들에게 벌을 주는 법도 있나? 그들이 너무 시끄럽게 짹짹거리면 나는 그냥 이렇게 소리치기만 하면 되었다.

“조용히 해!”

그러면 내 새장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최소한 5분 동안은 말이다.

하급반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아이는 열한 살이었다. 열한 살! 그런데도 그 뚱뚱보 세리에르 씨는 어린애들이란 엄하게 다뤄야만 말을 듣는다고 으스대며 충고하듯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엄하게 다루지 않았다. 늘 잘 대해주려고 애썼을 뿐이었다.

가끔 그들이 얌전하게 굴면 그 대가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이야기라는 말만 해도 그들은 열광했다. 후다닥 책이며 공책을 덮고 잉크병과 자, 펜대 등을 책상 속에 쓸어 넣은 다음 책상 위에 팔짱을 끼고 눈을 똥그랗게 뜬 채 귀를 기울 이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들려주기 위해서‘매미의 첫 무대’,‘ 장라팽(토끼)의 불행’등 환상(幻想) 동화를 대여섯 편 가량 지어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라 퐁텐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학가였으며, 내가 지어낸 이야기는 그의 우화에 주석을 단 것에 불과했다. 말하자면 거기다가 나 자신의 얘기를 뒤섞어놓은 것이었다.

내 이야기에는 나처럼 자기 생활비를 자기가 벌지 않으면 안 되는 불쌍한 귀뚜라미나, 자크 형처럼 밤이나 낮이나 훌쩍거리며 판지로 장정을 하고 앉아있는 무당벌레들이 등장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아이들도 즐거워했고, 나도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비오 씨는 우리들이 이런 식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납득하지 못했다.

비오 씨는 무거운 열쇠 꾸러미를 흔들어대면서 모든 게 다 규칙대로 움직이고 있는지 감시하려고 일주일에 서너 번씩 학교 안을 돌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장 라팽 이야기가 감동적인 장면으로 접어드는 바로 그 순간, 비오 씨가 우리 자습실에 들어섰다. 그가 들어오자 아이들이 모두 화들짝 놀랐다. 아이들은 겁에 질린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내가 말을 멈추자 이야기의 주인공인 장도 당황했는지 그 큰 귀를 쫑긋 세운 채 앞발을 공중에 쳐들고 있었다.

능글맞은 웃음을 머금고 교단 앞에 선 비오 씨는 아이들 책상 위에 종이 한 장 놓여 있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는 놀란 눈으로 오랫동안 교실을 둘러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손에 들린 열쇠 꾸러미는 이리저리 흔들리며 이렇게 말하는듯했다.

“짤랑! 짤랑! 짤랑! 정말 놀라운 일이야. 이제 여기선 더 이상 공부를 안 하는군!”

나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그 무시무시한 열쇠 꾸러미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아이들은 요즘 들어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서 상(賞)으로 짤막한 얘기를 하나 해주고 싶었답니다.”

비오 씨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희미한 미소를 띠며 몸을 숙여 한동안 자기 발끝을 내려다보던 그는 마지막으로 열쇠 꾸러미를 흔들더니 교실에서 나가버렸다.

오후 4시, 휴식시간이 되자 내게로 다가온 비오 씨는 여전히 능글거리는 웃음을 흘리면서 아무 말없이 규율집의 12쪽을 펼쳐서「학생들에 대한 자습 감독교사의 의무」를 보여주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이후로 다시는 이야기란 단어조차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며칠 동안 나로서는 아이들을 위로할 길이 없어 막막했다. 그들은 장 라팽을 그리워했으며, 장을 그들에게 들려줄 수 없었던 까닭에 내 마음도 몹시 아팠다. 나는 그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른다. 우리는 결코 서로 떨어져 있어본 적이 없었다.

학교는 상급반, 중급반, 하급반의 세 반으로 확연히 구분되어 있었다. 각 반은 운동장과 기숙사, 자습실 등을 따로 사용했다. 나는 하급반 아이들을 맡았다. 그래서 내가 꼭 서른다섯 명의 자식들을 거느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아이들을 빼고 나면 내겐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비오 씨가 미소를 지어 보이며 휴식시간마다 다정하게 내 팔을 잡고 규칙에 대해 충고를 해주었지만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그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열쇠 꾸러미만 보면 등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겁이 났다. 교장은 아예 만나기조차 힘이 들었다. 교사들은 나를 경멸하고 얕잡아보았다. 자습감독교사들로 말하자면, 열쇠 꾸러미를 든 비오 씨가 내게 호감을 보이는 듯하자 나를 경원시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하사관들을 소개받은 이후로 바르베트 카페에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더니 그들 역시 나를 싹수없는 인간으로 취급하는 것이었다.

수위인 카사뉴 씨와 체육 교사인 로제마저 내게서 등을 돌렸다. 특히 로제는 내게 깊은 악의까지 품고 있는 듯했다. 어쩌다 내가 곁을 지나갈 때면 그는 꼭 백 명도 넘는 아랍인들의 목을 시퍼렇게 날이 선 칼로 내려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사나운 표정으로 콧수염을 비비 꼬고 커다란 눈을 부라렸다.

언젠가 한 번은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자기는 염탐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카사뉴 씨에게 큰 소리로 말하는 걸 들은 적도 있었다. 카사뉴 씨는 아무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그 역시 염탐꾼 같은 놈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염탐꾼을 말하는 것일까? 나는 그 뜻을 곰곰 생각해보았다.

어쨌든 나는 모든 사람들의 적의(敵意)를 대담하게 무시해버리기로 결심했다. 나는 4층에 있는 지붕 밑 다락방을 중급반 교사와 함께 썼다. 아이들이 정규수업을 받고 있는 시간에는 거기서 혼자 시간을 보내곤 했다. 같은 방 동료 교사는 바르베트 카페에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그 방은 내 방이나 다름없었다. 그 방이야말로 바로 나의 방, 오직 나만의 방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방에 들어가면 곧장 단단히 문을 걸어 잠그고는 온통 잉크자국과 칼자국투성이인 낡은 책상 앞에다 트렁크를 끌어다 놓은 다음(내 방에는 의자가 없었다) 책상 위에 책을 있는 대로 다 펼쳐놓고 공부를 했다.

봄철이었다. 고개를 들면 벌써 잎사귀가 돋아난 안뜰의 키 큰 나무들과 짙푸른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밖은 너무나 조용했다. 학생이 책을 읽는 단조로운 목소리와 잔뜩 화가 난 선생의 고함소리, 나뭇가지에 앉아 말다툼을 하는 참새들의 짹짹거리는 소리만 이따금씩 들려올 뿐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엔가 모든 것이 다 침묵 속에 잠겨들고 나면 학교는 마치 깊은 잠 속에 빠진 듯 적막에 싸였다.

나는 한시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꿈도 꾸지 않았는데, 그것이야말로 잠을 푹 자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쉴 새 없이 공부하면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머릿속에 잔뜩 집어넣었다.

내가 그 무미건조한 공부에 한창 열중해 있을 때면 이따금 어떤 신비한 손가락이 문을 두드리곤 했다.

“누구세요?”
“당신의 옛 친구, 당신의 빨간 수첩에 등장하는 뮤즈 여신이랍니다. 빨리 문을 열고 저를 맞아주세요.”

나는 문을 열어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빨간 수첩이여, 내 눈앞에서 멀리멀리 사라져다오! 지금 당장 중요한 건 무엇보다 열심히 그리스어를 공부해서 학사학위를 받아 정식교사로 임명되는 거야. 그래야 하루빨리 흩어진 우리 가족이 모여 살 만한 멋진 가정을 다시 꾸릴 수 있단 말이야.

가족들을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절로 용기가 솟아나면서 흐뭇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누추한 방도 더욱 아늑해 보였다. 아, 나는 그 지붕 밑 방에서 얼마나 보람찬 시간을 보냈는지 모른다. 거기서는 얼마나 공부가 잘 되었던가. 정말이지, 거기서는 나 자신이 얼마나 용감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그러나 즐거운 시간이 있으면 괴로운 시간도 있는 법. 일주일에 두 번씩, 일요일과 목요일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야외로 나가야 했는데, 이건 내게 형벌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보통 우리는 프레리라는 곳으로 가곤 했는데, 이곳은 사를랑드에서 2킬로미터쯤 떨어진 산 밑에 푹신한 양탄자처럼 펼쳐져 있는 드넓은 잔디밭이었다. 몇 그루의 아름드리 밤나무와 노란색으로 칠해놓은 서너 채의 자그마한 술집, 짙푸른 녹음 속에서 솟아나는 맑은 샘이 있어서 즐겁고 유쾌한 곳이었다.

세 반은 따로 떨어져 야외수업을 하게 되어 있었다. 언젠가 한 번은 세반의 학생들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적이 있었는데, 교사라고는 나 혼자뿐이었다. 다른 두 교사는 상급반 학생들이 한턱낸다고 해서 근처 술 집에 가고 없었고, 나는 한 번도 초대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남아서 학생들 뒤치다꺼리나 해야 했다. 이 아름다운 곳에서 힘겨운 일을 해야만 하다니!

푸르른 풀밭 위나 밤나무 그늘 속에 드러누운 채 졸졸 흐르는 샘물소리를 들으며 백리향(百里香)에 취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감시하고 소리 지르고 벌주는 일만 끊임없이 되풀이해야 했으니……. 나는 모든 아이들을 책임져야만 했던 것이다. 정말 끔찍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끔찍한 건, 프레리에서 학생들을 감시하는 일이 아니라 하급반 아이들을 데리고 마을을 통과하는 일이었다. 중급반이나 상급반 학생들은 꼭 나폴레옹 근위대처럼 구두굽 소리를 저벅저벅 내면서 발을 착착 맞추어 걸어갔다. 꼭 잘 훈련된 병사들이 북소리에 발을 맞추어가는 모습을 보는듯하였다.

하급반 학생들은 그런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열도 제대로 맞추지 않은 채 서로 손을 잡고서 종알대며 큰길을 따라 걸었다. 간격을 유지하면서 걸으라고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소용이 없었다. 아이들은 내 말은 들은 척도 않고 삐딱하게 걸어갔다.

앞에서 걸어가는 아이들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학생복을 입은 얌전하고 키 큰 아이들을 맨 앞에 세웠던 것이다. 하지만 뒤쪽은 뒤죽박죽, 무질서 그 자체였다. 이 조무래기들의 머리는 까치집처럼 헝클어지고, 손에서는 땟물이 흐르고, 반바지는 넝마나 다름없었다. 나는 이 아이들을 도저히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가끔 재치 있는 말을 내뱉기도 하는 비오 씨가 그걸 보더니 능글능글한 표정으로“데시니 트인 피스켐(‘용두사미’라는 뜻의 라틴어)”이라고 한마디 했다. 사실, 끝줄은 한심한 꼬락서니를 하고 있었다.

그런 아이들을 데리고 사를랑드의 큰길에 나설 때의 그 절망스러운 기분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일요일에는 더 그랬다. 교회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고, 길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우리는 만과(晩課)에 참석하러 가는 여자 기숙생들이나 장밋빛 모자를 쓴 여성복 재봉사들, 담회색(淡灰色) 바지 차림의 멋쟁이 남자들을 만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친 이 우스꽝스러운 학생들을 데리고 그들 사이를 헤집고 지나가야 했다. 정말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내가 일주일에 두 번씩 데리고 시내를 통과해야만 했던 그 까치집 머리 개구쟁이들 가운데 지지리도 못생긴 데다가 보잘것없는 옷차림으로 나를 절망에 빠뜨렸던 아이가 한 명 있었다.

그 녀석은 절로 웃음이 나올 정도로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난쟁이였다. 게다가 추하고, 더럽고, 머리는 지저분하고, 옷은 남루하고, 몸에서는 역겨운 시궁창 냄새가 풀풀 풍기고, 그것도 모자라서 다리까지 휜 아이였다.

물론 그 녀석도 학생으로 불리기는 했지만, 학교의 학생 명부에 이름이 실리지는 못했다. 학교의 명예를 훼손시킨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도 그 녀석을 미워했다. 산책을 나갈 때마다 그 녀석이 꼭 미운 오리 새끼처럼 끝줄에서 뒤뚱거리며 쫓아오는 모습을 보노라면, 하급반의 명예를 빌미로 녀석의 궁둥이를 구둣발로 힘껏 차서 쫓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다.

방방(우리는 녀석이 뒤뚱거리며 걷는다는 이유로 절름발이라는 뜻의‘방방’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은 물론 부잣집 아이가 아니었다. 태도나 말투, 특히 그 녀석 이사를 랑드에서 알고 지내는 친구들의 면면을 보면 어렵잖게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를랑드의 부랑아들은 모두 방방의 친구였다.

우리가 야외에 나가는 날이면 구름처럼 모여든 부랑아들이 우리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땅재주를 넘고 너나없이 방방의 이름을 부르며 손가락질하거나 먹다 버린 밤 껍질을 집어던지는 등 온갖 우스꽝스러운 짓을 다 하며 법석을 떨었다. 그걸 보면서 우리 하급반 아이들은 몹시 즐거워했지만 나는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나는 방방 때문에 일어난 온갖 소란에 대해 상세하게 적은 보고서를 거의 일주일에 한 번씩 교장에게 올렸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교장은 내 보고서에 대해 일언반구 언급이 없었고, 결국 나는 날이 갈수록 더욱 더러워지고 더욱 다리를 절름거리는 방방을 데리고 거리를 지나다녀야 했다.

축제가 벌어진 어느 화창한 일요일, 우리 모두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괴상한 차림을 한 방방이 산책을 나가겠다고 나타났다. 정말이지 그런 모습은 두 번 다시 보기 힘들 것이다. 두 손은 새까맣고, 구두에는 아예 끈이 붙어 있지 않았으며, 머리는 온통 진흙투성이였고, 반바지는 어디다 벗어놓고 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정말이지 영락없는 괴물이었다.

그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건, 누군가가 그를 기막히게 예쁘게 치장해 준 다음 학교로 보냈다는 사실이었다. 머리는 평소보다 훨씬 더 잘 빗질을 하고 포마드를 발라서 꼿꼿했으며, 목에 정성껏 맨 타이에서는 어머니의 손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학교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수많은 개울을 건너야 했다. 방방은 그 많은 개울을 엎어지고 뒹굴며 건너왔던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웃으며 다른 아이들 틈에 끼어드는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두려움과 분노가 동시에 나를 덮쳤다.

나는 그에게 소리쳤다.

“꺼져버려!”

방방은 내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는지 계속해서 웃고만 있었다. 그날 그는 자신이 아주 멋지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다시 소리 질렀다.

“꺼져! 꺼져버리란 말이야!”

방방은 내 기세에 눌려 체념한 듯 슬픈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눈길은 애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끄덕도 하지 않자 아이들은 길 한가운데서 꼼짝 않고 있는 그를 혼자 내버려 둔 채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만큼은 그를 떨쳐버릴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마을을 빠져나갈 때쯤 뒤에서 웃음소리와 쑥덕거리는 소리가 나기에 고개를 돌렸다.

방방이 심각한 표정으로 행렬에서 네댓 걸음 떨어져서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맨 앞에서 걸어가는 두 아이에게 말했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절름발이 방방을 놀려먹는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아이들이 맹렬한 스피드로 걷기 시작했다.

방방이 따라오는지 보려고 이따금씩 뒤를 돌아보곤 하던 아이들은 이제는 아주 멀찌감치 떨어져 주먹만큼이나 작아 보이는 방방이 먼지가 뽀얗게 일어나는 큰길에서 과자장수, 레몬수장수들이랑 같이 열심히 종종 거름을 치는 모습을 보며 배를 잡고 깔깔댔다.

잔뜩 화가 난 방방은 어찌나 열심히 뛰었던지 우리랑 거의 같이 프레리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는 한꺼번에 몰려드는 피로 때문에 얼굴색이 백지장처럼 하얘졌으며 가엽게도 다리를 끌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내 잔인한 행동을 부끄러워하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방방을 불렀다.

방방은 붉은색 체크무늬의 빛바랜 작업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리옹중학교 시절에 입었던 작업복이었다.

나는 그 작업복을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말했다.

‘불쌍한 녀석, 넌 부끄럽지도 않니? 네가 이렇게 즐기면서 학대하고 있는 아이는 바로 너란 말이야.’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그 불우한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시작했다.

방방은 다리가 몹시 아픈지 내 곁에 와서는 주저앉고 말았다. 나는 그 아이 옆에 앉았다. 그리고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오렌지도 한 개 사주었다. 발이라도 씻겨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날 이후 방방은 내 친구가 되었다. 그 녀석의 눈물겨운 사연도 알게 되었다.

방방은 자식을 교육시켜보겠다는 일념 아래 온갖 희생을 마다 않는 대장장이의 아들이었다. 그는 아들을 중학교에 보내려고 갖은 애를 썼다. 하지만 슬프게도 방방은 공부에는 소질이 없는 아이였다. 아무리 학교를 다녀도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방방이 처음 학교에 등교하던 날 한 교사가 그에게 글씨본을 주면서 “글씨 연습을 하거라”말했다. 그래서 방방은 1년 전부터 글씨 연습을 계속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방방의 글씨는 말 그대로 이리 삐뚤, 저리 삐뚤, 들쑥날쑥, 우중충, 괴발개발 그 자체였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쏟지 않았다. 그는 특별히 어느 학급에 속해 있지도 않았다. 학교에 오면 그냥 문이 열려 있는 교실로 들어가곤 했다. 언젠가는 철학반 교실에서 글씨 연습을 하고 있는 그를 발견한 적도 있었다. 참 이상한 아이였다!

나는 이따금 자습실에서 공책 위로 몸을 구부린 채, 힘이 드는지 진땀을 흘리며 혀를 내밀고 펜대를 꽉 움켜쥐고는 마치 책상을 뚫어버리겠다는 듯 있는 힘을 다해서 눌러 쓰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곤 했다. 한 자 한 자 쓸 때마다 그는 잉크를 새로 찍었으며, 한 줄이 끝나면 다시 혀를 집어넣고는 손을 비비며 휴식을 취하곤 했다.

방방은 나와 친구가 된 뒤로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그는 한 페이지를 끝내자마자 교탁까지 엉금엉금 걸어와서는 아무 말없이 그 위에 자신의 걸작품을 올려놓았다.

그러면 나는 아이를 다정하게 토닥거려주며 말했다.

“참 잘 썼구나!”

사실 그건 끔찍하게 못 쓴 글씨였지만, 나는 그의 사기를 꺾고 싶지 않았다.

방방의 글씨는 차츰차츰 나아졌으며, 펜에서는 잉크가 덜 튀겼고, 공책에도 잉크가 덜 묻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 아이에게 뭔가 가르쳐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불행히도 운명이 우리를 갈라놓고 말았다. 중급반을 맡았던 교사가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교장은 학기가 끝나가고 있다는 이유로 새로운 교사를 채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턱수염이 난 수사학급 학생 하나가 하급반을 맡고, 나는 중급반을 맡게 되었다.

내게 있어 이 일은 크나큰 불행이었다.

우선 나는 중급반 학생들이 너무나 무서웠다. 야외에 나갈 때마다 그들을 먼 발치에서 보곤 했는데, 막상 그들과 함께 생활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꽉 막히면서 답답했다.

더군다나 내가 무척 사랑했던 하급반 아이들과 헤어져야만 했다. 턱수염 난 그 수사학급 학생이 내 아이들을 어떻게 다룰지 눈에 보이듯 선했다. 방방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정말 불행을 타고난 인간이었다.

하급반 학생들도 나하고 헤어지는 걸 슬퍼했다. 마지막 수업시간을 끝내는 종이 울렸을 때 나는 잠시 감동을 맛보았다. 모든 아이들이 나를 껴안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들 중 몇몇은 내게 다정한 말을 해주기도 했다.

근데, 방방은 어디 있지?

방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내가 교실 문을 나서려는 순간, 얼굴이 홍당무같이 빨개져서 다가오더니 나에게 주려고 온 정성을 다해 쓴 멋진 글씨본을 내 손에 쥐여주는 것이었다.

불쌍한 방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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