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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06. 2017

07. 자습감독 교사

<꼬마 철학자>


그렇게 해서 나는 중급반 자습감독 교사가 되었다.

이 반에는 볼이 통통한 열두 살에서 열네 살 사이의 산골 출신 악동들이 쉰 명쯤 있었는데, 그들의 부모는 자기 자식들을 프티부르주아로 만들기 위해 석 달에 120프랑씩 수업료를 내면서 학교에 보낸 터였다.

무례하고, 불손하고, 건방지고, 알아들을 수 없는 거친 세벤느 지방 사투리로 저희들끼리 쑥덕거리는 이들은 동상에 걸려서 시퍼렇게 언 솥뚜껑만 한 손, 병든 수탉 같은 목소리, 흐리멍덩한 시선 등 유아기에서 사춘기로 넘어가는 그맘때의 중학생 모습 그대로였다.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려 하지도 않고 무턱대고 경멸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의 적인 자습감독 교사였다. 내가 중급반 자습감독 교사가 된 첫날부터 우리 사이에는 휴전도 정전도 없는 불꽃튀는 전쟁이 벌어졌다.

아, 그 잔인한 아이들! 그들은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아무런 악감정 없이 그때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때의 슬픔은 이제 멀리멀리 사라져버렸으니까! 아니,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내 손이 흥분과 혼란으로 떨리고 있는 게 느껴진다. 내가 아직도 그곳에 있는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내 생각을 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라는 인물도, 좀 더 근엄하게 보이려고 걸치고 다녔던 멋진 코안경도 그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렸으리라.

나의 옛 제자들은 이제 점잖은 어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수베이롤은 세벤느 지방 어디에선가 공증인 노릇을 하고 있을 것이며, 그의 동생인 베이용은 재판소 서기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루피는 약사가, 부장케는 수의사가 되었겠지. 부족한 것 없이 다 갖춘 그들은 불룩하게 배를 내민 채 유지 행세를 하고 있으리라.

그러나 이따금씩 사교클럽이나 교회 앞 광장 같은 데서 자기들끼리 우연히 마주치게 되면 그 즐거웠던 중학시절을 회상할 것이고, 어쩌면 내 얘기도 하게 될지 모르겠다.

“야, 베이용. 너 우리가 사를랑드 중학교 다닐 때 자습감독하던 그 에세튼가 하는 키 작은 선생 생각나냐? 머리 길고, 얼굴이 꼭 딱딱한 종이처럼 창백하던 사람 말이야. 우리가 실컷 골려먹었잖아?”

그들은 나를 실컷 골려먹었고, 그들의 옛날 자습감독 교사였던 나는 그들을 아직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다.

아, 난 참 불쌍한 자습감독이었지. 그들은 나 때문에 실컷 웃었지만, 나는 그들 때문에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래,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을 정도로 울었어! 그들은 짓궂은 장난을 쳐서 나를 울려놓고는 저희들끼리 재미있다며 깔깔대곤 했지.

수난의 하루가 지나고 나면 침대에 쪼그리고 앉아 행여나 그들이 들을까 봐 담요를 깨문 채 소리 죽여 흐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린 악동들에게 둘러싸여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두려워하면서 잠시도 경계를 게을리하지 못하고 신경을 곤두세운 채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었다. 벌을 주고(사람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불공평한 짓을 하게 마련이다), 의심하고, 도처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걸 보고, 제대로 된 식사 한번 못하고, 잠도 편안히 잘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었다. 심지어는 휴식시간 중에도‘오, 하느님! 저 자식들이 또 무슨 꿍꿍이수작을 꾸미는 겁니까?’라고 생각하며 전전긍긍해야 했으니 정말 끔찍한 나날이었다.

그렇다. 백 살까지 산다 하더라도 자습감독 교사 다니엘 에세트는 중급반 자습시간에 처음 들어갔던 그 음산한 날부터 사를랑드 중학교에서 겪었던 그 온갖 고통을 잊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하급반에서 중급반으로 옮겨가면서 얻은 것도 있었다. 그 검은 눈동자의 아가씨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루에 두 번 휴식시간 때마다 나는 중급반 운동장에 면한 건물 2층의 창문 뒤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검은 눈동자 아가씨를 멀리서나마 볼 수가 있었다. 전보다 더욱 검어지고 더욱 커진 그 여자의 눈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바느질감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여자는 온종일 바느질만 하면서도 조금도 싫증이 나지 않는듯했다. 안경을 쓴 그 마귀할멈이 고아원에서 검은 눈동자의 아가씨를 데려온 것은(그녀는 아버지가 누군지도 몰랐고, 어머니가 누군지도 몰랐다) 오직 바느질을 시키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그녀는 옆에서 안경잡이 마귀할멈이 물레에서 연신 실을 뽑아내면서 날카롭고 차가운 시선으로 감시하는 가운데 1년 내내 쉴 새 없이 바느질만 했다.

휴식시간만 되면 나는 2층 창문을 우두커니 올려다보곤 했다. 휴식 시간은 늘 너무 짧게 느껴졌다. 검은 눈동자의 아가씨가 있는 그 건물의 2층 창문 아래서 내 평생을 보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여자 역시 내가 자기를 올려다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이따금 그 여자는 바느질감에서 눈길을 들어 내 쪽을 바라보곤 했고, 그러면 우리는 말없이 오직 눈길로만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신은 정말 불쌍하군요, 에세트 씨.’
‘당신도 그런 것 같은데요, 검은 눈동자 아가씨.’
‘전 어머니도 안 계시고 아버지도 안 계세요.’
‘저도 아버지 어머니가 멀리 계신답니다.’
‘당신도 아시겠지만, 안경잡이 마귀할멈은 정말 무서워요.’
‘저도 학생들 때문에 몹시 힘들답니다.’
‘용기를 가지세요, 에세트 씨.’
‘당신도 힘을 내세요,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

우린 더 이상 길게 얘기를 나누지 못했다. 나는 비오 씨가 열쇠 꾸러미를 흔들면서(짤랑! 짤랑! 짤랑!) 나타날까 봐 늘 두려웠고, 그 여자 역시 자신을 감시하는 마귀할멈이 두려워 항상 마음을 졸여야 했다.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순간도 잠시, 검은 눈동자 아가씨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커다란 철테 안경을 걸친 마귀할멈의 매서운 눈총을 받으며 다시 바느질을 해야 했다.

내 소중한 검은 눈동자 아가씨! 우리는 그렇게 먼 거리에서 남몰래 서로를 엿보며 은밀한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그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내가 무척 좋아했던 또 한 사람은 제르만 느 신부였다.

이 제르만느 신부는 철학 교사였다. 그는 괴짜로 통했는데, 학교 안의 모든 사람이, 심지어는 교장이나 비오 씨까지도 그를 두려워했다.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거의 말이 없는 과묵한 인물로서 우리 모두에게 반말을 했고, 머리를 뒤로 젖힌 채 꼭 용기병(龍騎兵)처럼 구두 뒤축에 달린 박차가 쩡쩡 울릴 정도로 신부복을 펄럭이며 성큼성큼 걸어 다녔다. 그는 키도 크고 체구도 듬직했다.

한동안 나는 그가 굉장히 잘생겼다고 믿었다. 하지만 나중에 가까이서 보니 사자처럼 위엄 있는 얼굴에는 천연두 자국이 끔찍하게 박혀있었다. 더구나 얼굴 전체가 온통 꿰맨 칼자국투성이여서 꼭 혁명가인 미라보가 신부복을 입고 있는듯했다.

신부는 구교사(舊校舍)라고 불리는 건물 반대쪽의 작은방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우리 중급반의 못돼먹은 말썽꾸러기 두 녀석이 바로 그의 동생들이었는데, 그 둘을 제외하고는 신부의 방에 들어가 본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밤에 기숙사로 돌아가려고 운동장을 가로질러가다 보면 다 쓰러져가는 그 음침한 건물에서 가느다랗고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걸 볼 수 있었다. 바로 제르만느 신부가 켜놓은 램프 불빛이었다. 나는 그 이튿날 아침 6시에 자습시간을 감독하기 위해 내려가다가 램프 불빛이 희뿌연 안갯속을 뚫고 여전히 타오르고 있는 걸 자주 보곤 했다. 제르만느 신부는 그때까지도 잠을 자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는 방대한 철학서를 집필하고 있다고 했다.

그 이상한 신부와 친분을 맺기 이전부터 나는 그에 대해 묘한 공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그의 끔찍하지만 잘생긴 얼굴에서 매력을 느꼈다. 다만 성격이 괴팍하고 거칠다는 얘기를 하도 많이 들었던 탓에 지레 겁을 먹고 감히 접근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나는 그를 찾아가고 말았다.

저간의 사정을 얘기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나는 철학사에 완전히 심취해 있었는데, 아직 어린 나로서는 몹시 힘든 공부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콩디야크의 작품을 읽고 싶다는 욕구에 사로잡혔다. 사실, 그의 작품을 굳이 애써서 읽어봐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사이비 철학자였으며, 그의 철학 세계는 하찮고 보잘것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젊은 시절에는 인간사에 대해서 삐딱한 생각을 갖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콩디야크의 작품을 읽어보려고 했던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 도 그의 작품을 구해야만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학교 도서관에는 그의 책이 단 한 권도 없었고 사를랑드 시립도서관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나는 제르만느 신부에게 부탁해보기로 결심했다. 제르만느 신부의 방에 2천 권도 넘는 장서가 구비되어 있다는 얘기를 언젠가 그의 동생들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중에는 분명히 콩디야크의 책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 사람이 너무도 무서웠기 때문에 찾아갈 용기가 선뜻 나지 않았다. 콩디야크의 책을 정말 간절히 원하지 않았더라면 제르만느 신부의 방에 올라갈 마음은 먹지도 못했을 것이다.

드디어 문 앞에 도착했지만 내 두 다리는 여전히 두려움으로 바들바들 떨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시오!”

우렁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무시무시한 제르만느 신부는 검은색 비단 양말 사이로 굵은 근육이 툭 불거져 나온 것이 보일 정도로 신부복을 걷어올리고는 다리를 쭉 뻗은 채 낮은 의자에 말 타듯 걸터앉아 있었다. 그런 자세로 의자 등받이에 팔꿈치를 기댄 채 뱃사람들이나 피우는 그 사기(沙器)로 만든 작고 짧은 갈색 파이프 담배를 요란하게 피우면서 빨갛게 장정된 2절판 책을 읽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책에서 눈을 드는 둥 마는 둥 내게 물었다.


“자네로군! 그래, 잘 지내고 있나? 그런데 웬일인가?”

그의 단호한 목소리, 책으로 꽉 들어차 있는 그 방의 엄격한 분위기, 꼭 기사처럼 앉아 있는 그의 모습, 그가 이빨 사이에 물고 있는 짧은 파이프, 이 모든 것들이 나를 두려움 속으로 밀어 넣었다.

나는 내가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고 콩디야크의 책을 빌려달라고 부탁하는 데 그럭저럭 성공했다. 제르만느 신부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콩디야크이라! 콩디야크을 읽고 싶단 말이지? 참, 이상한 생각을 갖고 있군그래. 그보다는 나랑 파이프 담배나 한 대 피우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지 않나? 저기 벽에 걸려 있는 저 멋진 파이프로 한번 피워보게……. 이 세상에 있는 콩디야크을 다 합친 것보다 그게 훨씬 나을 걸세.”

나는 얼굴을 붉히며 사양한다는 몸짓을 했다.

“싫은가? 자네 편한 대로 하게나……. 자네가 찾는 콩디야크는 저위, 왼쪽 세 번째 책장에 있다네. 가져가도 좋아. 빌려주지. 찢거나 낙서는 하지 말게. 안 그러면 내가 자네 귀를 잘라버릴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왼쪽 세 번째 책장에서 콩디야크의 책을 집어 든 뒤 방에서 나가려는데 그가 나를 붙잡았다. 그가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자네가 철학에 몰두해 있단 말이지? 자넨 우연히 철학이라는 걸 믿게 되었겠지? 철학, 그거 말도 안 되는 얘기야. 순전히 꾸며낸 거짓말이라구! 근데 난 그놈의 터무니없는 얘기를 믿는 바람에 이렇게 철학 선생이 되었단 말이야. 내가 뭐 한 가지 묻겠네! 도대체 뭘 가르친단 말인가? 없어, 아무것도 없다구……. 그런 황당무계한 얘기를 믿었으니……. 난 별을 감독하는 사람이나 파이프 담배연기를 검사하는 사람으로 임명될 수도 있었어……. 아, 난 정말 불쌍한 신세가 됐어! 하기야, 밥 먹고살려면 이따금씩 별 이상한 일을 다 해야 하는 거니까……. 자네도 그런 건 좀 알 텐데, 안 그런가? 아, 얼굴을 붉힐 것까진 없네. 우리 불쌍한 꼬마 자습감독 선생, 난 자네 마음이 결코 편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어. 아이들이 자넬 못살게 군다는 걸 말이네.”

여기까지 말하고 난 제르만느 신부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는 몹시 화가 난 사람처럼 파이프를 손톱에 갖다 대고는 탁탁 두드렸다. 그토록 존경했던 사람이 이렇게 내 운명을 동정하는 말을 하자 나는 목이 멜 정도로 감격하여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감추느라 얼른 콩디야크의 책을 눈앞에 갖다 댔다.

잠시 후,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자네한테 물어볼 게 있었는데 깜박 잊고 있었군……. 자네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나? 자네,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네. 알겠나? 여보게, 하느님을 믿고 열심히 기도하게. 안 그러면 자넨 절대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난 인생의 가장 큰 고통을 덜기 위해선 오로지 세 가지 치료 방법밖에 없다고 믿고 있지. 일과 기도와 파이프……. 흙으로 빚어 구운 작은 파이프 말일세. 자네도 잘 기억해 두게……. 철학자들은 믿지 않는 게 좋아. 자넨 그들한테서 절대 아무것도 위로받지 못할 테니까 말일세. 하지만 난 그 정도는 아니니까 믿어도 좋을 걸세.”

“전 신부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럼 됐네. 이젠 나가주게. 피곤하군……. 책이 필요하면 그냥 와서 가져가도 좋네. 방 열쇠는 항상 문턱 위에 있고, 철학 책은 왼쪽 세 번째 책장에 꽂혀 있다네. 더 이상 내게 아무 말하지 말게……. 그럼 잘 가게.”

이렇게 말하고는 그는 다시 아까처럼 책에 빠져들더니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고, 내가 나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제르만느 신부의 방을 마치 내 집 드나들 듯 노크도 하지 않고 마음대로 들락거리면서 세상의 모든 철학자들을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내가 가는 시간에는 그가 수업을 하고 있어서 방이 비어있었다. 그 자그마한 담배 파이프는 책상 가장자리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책상은 단면이 붉은색으로 칠해진 2절판 크기의 책들과 깨알만 한 글씨투성이인 서류들로 뒤덮여있었다.

방에서 제르만느 신부를 만날 때도 종종 있었다. 그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도 했고, 방 안을 이리저리 성큼성큼 걸어 다니기도 했다. 방 안에 들어서면 나는 수줍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셨어요, 신부님!”

그러나 그는 대답을 잘 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왼쪽 세 번째 책장에서 읽고 싶은 철학 책을 집어 든 뒤 살그머니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방을 나오곤 했다. 한 해가 다 지나가도록 우리는 스무 마디도 채 나누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이랴! 내 가슴속 깊숙한 곳에는 우리가 이미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는 확신이 굳게 자리 잡고 있었다.

방학이 다가오고 있었다. 음악반 학생들이 종업식 때 부를 폴카곡과 행진곡을 연습하는 소리가 하루도 빠짐없이 들려왔다. 아이들은 폴카곡을 들으며 모두들 즐거워했다. 그들은 마지막 수업이 끝날 때마다 책상에서 작은 달력을 꺼내서는 하루하루 날짜를 지워가며 방학을 손꼽아기다렸다.

“이제 한 달도 안 남았다!”

학교 운동장에는 연단을 만들 판자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고, 아이들은 의자를 두들겨대는가 하면 양탄자를 뒤흔들어대는 등 수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규율도 잡히지가 않았다. 오직 끝까지 자습감독 교사를 놀려대는 장난에만 몰두하고 있을 뿐이었다.

드디어 그날이 되었다. 방학이 조금만 더 늦게 시작되었더라면 나는 아마 더 이상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종업식은 중급반 학생들이 사용하는 운동장에서 거행되었다. 알록달록한 천막, 벽에 둘러쳐놓은 하얀 휘장, 갖가지 깃발을 꽂아놓은 짙푸른 거목(巨木)들, 그리고 기수모(騎手帽), 경관모(警官帽), 군모(軍帽), 철모, 꽃으로 장식된 헝겊 모자, 예쁘게 수놓은 오페라 모자, 깃털, 리본, 깃 장식, 술 장식 따위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학교의 지체 높은 양반들은 운동장 정면에 설치된 연단 위의 담홍색 소파에 위엄을 갖추고 앉아 있었다. 아, 그 연단 앞에 서 있던 나 자신이 얼마나 왜소하게 느껴지던지! 연단 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우월감에 가득 찬 표정으로 연단 아래 서 있는 사람들을 경멸하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양반들에게서는 평소의 모습을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제르만느 신부도 연단 위에 앉아 있었으나 그들과는 달랐다. 그는 안락의자에 눕듯이 앉아 머리를 뒤로 젖힌 채 옆 사람 얘기는 듣는 둥 마는 둥, 파이프 담배연기가 나뭇가지 사이로 번져가는 것을 상상하고 있는듯하였다.

연단 아래쪽에서는 트롬본과 오피클라이드가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세 반 학생들은 간격을 좁혀서 긴 의자에 빽빽하게 앉아있었고, 교사들은 마치 하사관들처럼 줄 끝에 서서 학생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 뒤편으로는 학부모들이 혼잡을 이루고 있어서 중급반 교사 한 명이“좀 비켜주실래요? 좀 비켜주세요!”라고 소리치며 열심히 안내를 하고 있었으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비오 씨의 모습은 인파에 휩쓸려 보이지 않고, 언제나 그렇듯이 그의 열쇠 부딪치는 소리만 사방에서 요란하게 울렸다.

“짤랑! 짤랑! 짤랑!”

식이 시작되었다. 날씨는 무더웠지만 천막 안은 바람 한 점 통하지 않았다. 더위에 얼굴이 새빨개진 뚱보 부인네들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대머리 신사들은 진홍 색 넥타이로 얼굴에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내고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 양탄자, 깃발, 의자 등 모든 게 다 붉은색이었다.

세 사람이 연설을 했고, 많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는 연설을 듣고 있지 않았다. 2층 창문 뒤편에 앉아 언제나처럼 바느질을 하고 있는 검은 눈동자 아가씨한테 온통 정신이 쏠려 있었던 것이다. 불쌍한 검은 눈동자 아가씨! 그 안경잡이 마귀할멈은 오늘 같은 날도 그녀를 부려 먹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급반의 준우수상을 받을 학생 이름이 불리고 악대가 개선행진곡을 연주하기 시작하자 장내는 소란스러워졌다. 운동장은 금세 난장판이 되었다. 교사들은 연단에서 내려오고, 학생들은 가족들을 찾아가려고 의자에서 뛰쳐 일어났다. 서로 껴안고, 서로 부르느라 다들 난리였다.“ 여기다, 여기. 이리로 오렴!”상을 받은 아이들의 여동생들은 오빠의 월계관을 쓴 채 의기양양하게 걸어 다녔다. 비단옷이 의자를 스치면서 살랑살랑 소리를 냈다.

나는 나무 뒤에 꼼짝 않고 서서 예쁜 부인네들이 지나가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낡아빠진 옷을 입은 나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고 왜소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운동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교장과 비오 씨는 교문 앞에 서서 지나가는 아이들을 쓰다듬기도 하고 머리가 땅에 닿을 만큼 허리를 숙여 학부형들에게 인사를 하기도 했다.

교장이 간사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자, 내년에 뵙겠습니다. 내년에 뵙겠어요.”

비오 씨도 열쇠를 흔들며 맞장구쳤다.
“짤랑! 짤랑! 짤랑! 자, 다음 학기에 보자꾸나.”

아이들은 그저 건성으로 포옹을 하고 단숨에 층계를 뛰어내려갔다.

그들은 자기 집 문장(紋章)이 박힌 멋진 자동차에 올라탔고, 그들의 어머니와 여동생들은 갈아입을 옷이든 트렁크를 차 안에 챙겨 넣었다. 자, 이제 그들은 제각기 별장을 향해 떠나갈 것이다. 드넓은 동산과 잔디밭, 아카시아 나무에 매달아놓은 그네, 희귀조들이 가득 찬 새장, 백조가 노니는 연못, 저녁때면 아이스크림을 먹는 드넓은 테라스를 향해 서둘러 떠나갈 것이다.

어떤 아이들은 긴 의자가 놓인 가족용 이륜마차로 기어 올라가서 흰 모자 아래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고 있는 소녀들 옆에 앉았다. 목에 금목걸이를 한 여성이 마차를 몰았다……. 속력을 내, 마튀린느! 우린 이제 농장으로 가는 거야. 그들은 그곳에서 버터빵을 만들어 먹고, 사향(麝香) 포도주를 마시고, 하루 종일 새 사냥을 다니고, 구수한 내음의 건초더미 속에서 뒹굴며 휴가를 보낼 것이다.

행복한 아이들! 그들은 가버렸다. 모두 떠나버린 것이다. 아, 나도 떠날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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