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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07. 2017

08. 검은 눈동자

<꼬마 철학자>



이제 학교는 텅 비었다. 모두들 떠나버린 것이다. 고양이만큼이나 큰 쥐 떼들이 마치 기병대가 행군을 하듯 한낮에도 온 기숙사 안을 설치고 돌아다녔다. 아이들의 잉크병은 말라붙은 채 책상 속에 처박혀있었다. 운동장에 서있는 나무에서는 참새떼들이 지저귀며 축제를 벌였다. 학교의 주인이나 된 듯 주교와 군수의 저택에 살고 있는 친구들을 모조리 초대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귀청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짹짹 거리는 것이었다.

나는 지붕 밑 다락방에서 참새들이 짹짹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가며 공부를 했다. 교장이 호의를 베풀어준 덕분에 방학 동안 그 방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주어진 기회를 이용하여 죽어라고 그리스 철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방은 지독하게 더웠고, 게다가 천장이 너무 낮았다. 영락없는 찜통이었다. 창문에는 덧문도 없었다. 해는 꼭 횃불을 들이대듯 들어와서는 방안 구석구석에 불을 질렀다.

한 번은 대들보에 발라놓은 석회가 와지끈 소리를 내며 깨지더니 부스스 떨어져 내렸다. 더위에 지쳐 움직임이 둔해진 왕파리들도 창문에 착 달라붙어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잠을 쫓느라 갖은 애를 다 썼다. 머리는 납덩이처럼 무거웠고, 눈꺼풀은 바들바들 떨렸다.

공부를 해라, 다니엘 에세트!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다짐하고 애를 써보아도 어쩔 수가 없었다. 책 속의 글씨들이 눈앞에서 춤을 추더니 책이, 책상이, 그러고 나서는 방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참으려고 애써도 자꾸만 밀려오는 졸음을 쫓기 위해 일어나서 몇 걸음 걸어보았다. 그러면서 문 앞까지 갔는데 다리가 휘청하는 순간 도저히 졸음을 견딜 수가 없어 꼭 바윗덩어리처럼 방바닥에 쿵 쓰러졌다.

밖에서는 참새들이 짹짹거리고 매미들은 목이 터져라 노래하고 있었다. 플라타너스 나무가 햇빛을 받아 기지개를 켜자 거기 하얗게 앉아 있던 먼지가 비늘처럼 부서져내렸다.

그때, 나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며 우렁찬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다니엘! 다니엘!”나는 그게 누구 목소리인지 알 수 있었다. 옛날에“자크, 이 당나귀같이 멍청한 놈아!”라고 소리치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더욱더 커졌다.“ 다니엘, 네 애비다. 빨리 문 열어라!”

아, 정말 끔찍한 악몽이었다. 나는 얼른 대답하고 빨리 가서 문을 열고 싶었다. 팔꿈치를 딛고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머리가 너무나 무거워 다시 쓰러지면서 의식을 잃고 말았다.

다시 깨어난 나는 푸른색 커튼이 드리워진 순백색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빛은 부드러웠고, 방 안은 정적에 싸여 있었다. 벽시계의 똑딱거리는 소리와 수저가 사기 접시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와 있는 걸까……. 하지만 몸은 편안했다. 그때 누군가 커튼을 살짝 들추며 들어왔다.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입에는 미소를 띠고 손에는 잔을 든 아버지가 다가와서 내게 몸을 숙였다. 나는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 말했다.

“아버지세요? 정말 아버지세요?”
“그래, 다니엘, 아버지란다.”
“근데 여기가 어디예요?”
“의무실이야. 벌써 여드레째다. 이젠 다 나았어. 다니엘, 넌 그동안 무척 아팠단다.”
“그런데 아버지. 아버진 여기 어떻게 오셨어요? 아버지, 절 안아주세요! 아버지를 보다니 정말 꿈만 같아요.”

아버지는 나를 껴안아주었다.

“자, 이불을 잘 덮으렴. 우리 아기, 착하지? 의사 선생님이 네가 말을 하면 안 된다고 하셨어."

아버지는 내가 말을 하지 못하도록 이르고서 그간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여드레 전에 지금 다니고 있는 포도주 회사에서 세벤느 지방으로 출장을 가라고 하더구나.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우리 다니엘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니까 말이야. 그래서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네 이름을 부르며 찾았지만…… 넌 보이지 않더구나. 그러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네 방으로 나를 데려다주었어. 그런데 방문이 안으로 잠겼는지 아무리 두드려도 대답이 없더구나. 그래서 있는 힘을 다해 방문을 발로 걷어찼더니 넌 방바닥에 쓰러져 있고 머리가 펄펄 끓을 정도로 열이 심하더구나…….



아이고, 우리 불쌍한 아기! 얼마나 아팠던지 닷새 동안이나 헛소리를 했단다. 1분도 네 곁을 떠나지 않고 너를 지켜봤는데…… 계속해서 헛소리를 해대더구나. 집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던데……, 도대체 무슨 집 말이냐? 말해보렴. 넌 또‘열쇠 없어요? 자물쇠에서 열쇠를 빼내요!’라고도 소리치더라……. 지금 웃는 거냐? 맹세코 난 안 웃었단다. 세상에! 내가 너 때문에 며칠 밤을 지새웠는지 아니? 너도 알아야 한다. 그 비오 씨라는 사람이……, 이름이 비오 맞지? 그 사람이 날 학교에서 못 자게 하는 거야, 글쎄! 규정을 들먹이면서 말이야. 그래, 그 규정 말이다. 내가 그 사람이 말하는 규정을 다 알아야 되는 거냐? 그 우습지도 않은 선생 나부랭이는 내 코밑에 대고 열쇠를 흔들어대면 내가 겁을 먹을 거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난 그 인간한테 따끔한 맛을 보여줬단다.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말이야!”

나는 아버지가 그처럼 대담하게 행동했다는 얘기를 듣자 온몸이 떨려왔다. 하지만 비오 씨의 열쇠를 금방 잊어버린 채 마치 곁에 어머니가 있어서 껴안기라도 하려는 듯 팔을 내밀며 물었다.

“어머니는요?”

아버지는 화난 어조로 대답했다.
“그렇게 이불을 차고 그러면 아무 말도 안 해줄 테다! 자, 이불을 잘 덮어야지. 네 어머닌 잘 계셔. 지금도 바티스트 외삼촌댁에 있단다.”
“자크형은요?”
“자크? 자크는 당나귀 같은 놈이야! 아니, 너도 잘 알겠지만 내가 자크를 당나귀라고 부르는 건 순전히 내 말버릇이란다. 자크는 아주 착한 아이지……. 그렇게 이불을 끌어내리지 말라니까, 이 녀석아. 하지만 자크의 그 버릇은 여전하단다. 늘 질질 짜는 그 버릇 말이다. 그것 말 곤 아주 만족스러워하면서 지내고 있지. 그 아이의 사장님은 그 앨 비서로 생각하고 있더라……. 그저 불러주는 대로 받아쓰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썩 괜찮은 일자리지.”
“그렇다면 그 불쌍한 자크 형은 평생 동안 남이 불러주는 걸 받아쓰기만 해야 되겠군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나는 거리낌 없이 웃기 시작했고, 아버지도 내게 제발 이불을 자꾸 차지 말라고 계속 야단치면서도 내가 웃는 걸 보고 좋아서 따라 웃었다.

아, 아픈 것이 어쩌면 축복인지도 모른다. 나는 푸른색 커튼이 드리워진 의무실 침대에 누워 정말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아버지는 한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 머리맡에 앉아 하루를 보냈으며, 나는 아버지가 영원히 내 곁을 떠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포도주 회사는 아버지를 필요로 했다. 아버지는 세벤느지방을 다시 순회해야만 했다.

아버지가 떠나고 나자 나는 적막한 의무실에 홀로 남게 되었다. 나는 의무실 창가에 있는 커다란 둥근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하루 종일 책을 읽었다. 아침과 저녁에는 안색이 노란 카사뉴 부인이 식사를 날라다 주었다. 나는 수프를 한 사발 마신 다음 닭 날개에서 고기를 발라 먹고는“고맙습니다. 부인!”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뿐이었다. 노란빛이 감도는 얼굴로 보아 황달을 앓고 있을 거라 생각되어 그 부인이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 부인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평소처럼 아주 냉랭한 목소리로“고맙습니다, 부인!”이라고 말했을 때, 느닷없이“오늘은 좀 어떠세요. 다니엘 씨?”라고 몹시 다정하게 묻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깜짝 놀라 머리를 들었다. 과연 내 눈앞에 누가 서 있었겠는가? 바로 검은 눈동자의 아가씨였다. 그 아가씨가 미소를 띤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고 서있는 것이었다.

검은 눈동자의 아가씨는 카사뉴 부인이 아프기 때문에 자기가 부인의 일을 대신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면서 내가 건강을 회복해서 자기도 무척 기쁘다는 말을 덧붙인 다음 저녁때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공손하게 방을 나갔다. 그날 저녁 그녀는 정말로 다시 왔으며, 그 다음날 아침도, 또 저녁에도 식사를 들고 나를 찾아왔다.

너무나 기뻤다. 나는 내가 병에 걸린 것을, 안색이 노란 카사뉴 부인이 병에 걸린 것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병에 걸린 것을 축복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만일 이 세상에 병에 걸린 사람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그녀와 이렇게 단둘이서 있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가질 수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아, 그 축복받은 의무실 창가의 둥근 소파에 파묻혀 나는 얼마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가……. 아침이면 그녀의 검은 눈동자는 마치 햇살을 받고 반짝이는 금가루처럼 반짝였다. 밤이 되면 그녀의 검은 눈동자는 부드러운 빛을 발하며 마치 하늘의 별처럼 주변의 어둠을 밝혀주었다.

나는 밤마다 그녀 꿈을 꾸느라 잠을 설쳤다. 동녘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오기 시작하면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녀를 맞을 준비를 하곤 했다. 그녀에게 해줄 비밀 이야기가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그녀가 나타나면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의 그런 침묵을 몹시 의아하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녀는 안절부절못하고 의무실 안을 서성거리면서 내 곁에 좀 더 오래 머물 수 있는 방법들이 없을까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녀는 내가 입을 열어주기를 무척 바라는듯했지만 소심한 나는 용기를 내지 못하고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이따금 나는 한껏 용기를 내서 그 여자에게 말을 붙이기도 하였다.

“아가씨!”

그녀는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미소와 함께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미소 짓는 모습을 보면 불행하게도 나는 그만 정신이 아뜩해져서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제게 이렇게 호의를 베풀어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라든가, 아니면“오늘 아침 수프는 정말 맛있군요”라고만 얼버무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러면 검은 눈동자 아가씨는 입을 예쁘게 삐죽거리곤 했는데, 꼭 ‘아니, 겨우 그 말뿐이에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러고 나서는 한숨을 내쉬며 방을 나갔다.

정작 그 여자가 나가고 나면 나는 내 자신이 정말로 한심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아! 내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말을 해야지. 꼭 하고 말 거야.’

그렇지만 그 다음날이 되면 여전히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곤 하는 것이었다.

결국, 내 생각을 털어놓을 만한 용기가 나 자신에게 없음을 느낀 나는 그녀에게 편지를 쓰기로 작정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중요한, 아주 중요한 편지를 써야 하니까 잉크와 종이를 가져다 달라고 그녀에게 정중하게 부탁했다……. 그녀는 틀림없이 내가 무슨 편지를 쓰려고 하는지 눈치챘을 것이다. 아주 영리한 여자였으니까. 그녀는 후다닥 뛰어가더니 잉크와 종이를 찾아서 내 앞에 놓아둔 다음 살짝 웃음 지으며 방을 나갔다.

나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밤새도록 쓰고 또 썼다. 그러나 아침이 되었을 때 나는 이 장문의 편지에 겨우 세 마디밖에 쓰여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이 세 마디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이었으며, 나는 이 세 마디가 엄청난 효과를 불러일으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 드디어 그녀가 올 시간이 되었다! 몹시 흥분되었다. 나는 그녀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즉시 편지를 건네주리라 다짐하며 준비하고 있었다. 잠시 후 벌어질 광경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그녀는 문을 열고 들어와서 탁자 위에 수프와 닭 요리를 내려놓고“안녕하세요, 다니엘 씨!”라고 말하겠지. 그러면 나는 즉시 한껏 용기를 내어“친절한 검은 눈동자 아가씨, 여기 편지를 썼으니 한번 읽어보세요”라고 말할 거야.

쉬잇! 복도를 사뿐사뿐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눈동자 아가씨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나는 편지를 집어 들었다. 방망이 질하듯 가슴이 마구 뛰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

문이 스르르 열렸다……. 아니, 이럴 수가!

검은 눈동자 아가씨 대신 늙은 안경잡이 마귀할멈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나는 웬일이냐고 감히 물어볼 수조차 없었다. 그저 아연실색할 뿐이었다. 왜, 무엇 때문에 그녀는 오지 않았을까? 나는 밤이 되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밤에도, 그 다음날에도, 그리고 그다음 다음날에도, 영원토록 오지 않았다.

그녀는 쫓겨난 것이었다. 다시 고아원으로 돌려보내져 어른이 될 때까지 4년 동안 갇혀 있어야만 했던 것이었다. 설탕을 훔쳤다는 이유로 말이다…….

의무실에서의 즐거운 나날과도 이제 작별을 고해야만 했다.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 아가씨는 떠나버렸고, 설상가상으로 학생들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니, 벌써 개학이라니……. 아, 무슨 방학이 이렇게 금세 끝나버린단 말인가!

나는 6주일 만에 처음으로 운동장에 내려갔다. 핼쑥하고, 야위고, 전보다 더 작아진 모습으로…….

학교는 잠에서 깨어나 서서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대청소가 시작되었다. 복도에서는 물이 철철 흘러내렸다. 비오 씨가 다시 열쇠 꾸러미를 흔들어대며 설치고 다녔다. 비오 씨는 방학을 이용해서 자기가 만든 규칙에다 몇 개 조항을 덧붙이는 한편 열쇠 꾸러미에다가도 열쇠를 몇 개 더 달아놓았다. 나는 그냥 얌전하게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 되었다.

학생들이 속속 도착했다. 부르릉! 부르릉! 종업식 때 봤던 이륜마차와 문장(紋章) 달린 차들이 교문 앞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출석을 불러보니 안 나온 아이들도 더러 있었지만 그 자리는 새로 온 아이들로 채워졌다. 학급도 새로 편성되었다. 나는 다시 중급반을 맡게 되었다. 벌써부터 온몸이 떨려왔다. 하지만 어찌 알겠는가? 이번 아이들은 저번 아이들보다는 착할지도 모른다.

개학날, 예배당에서는 음악 소리가 드높이 울려 퍼졌다. 성신(聖神) 미사를 올리는 것이었다. 베니, 크레아토르스피리투스……. 교장은 단춧구멍에 자그마한 은빛 교육공로훈장이 달린 예복을 입고 있었고, 그 뒤로는 교수 예복 차림의 교사들이 죽 자리를 잡았다. 이공 과목을 맡은 교사들은 귤색 담비 교수복을, 인문 과목을 맡은 교사들은 흰색 담비 교수복을 입고 있었다. 경박하기로 소문이 난 중급반 교사만 희한하게 생긴 챙 없는 모자에 연한 색깔의 장갑을 끼었다. 비오 씨는 만족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베니, 크레아토르스피리투스…….

예배당 한구석, 학생들 사이에 끼여 앉은 나는 그 멋진 예복과 은빛 교육공로훈장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난 언제 정식 교사가 되나? 언제 우리 집안을 재건할 수 있게 될까? 아, 슬프다! 이 고통스런 나날이 얼마나 더 계속되어야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베니, 크레아 토르스피리투스…….

그러자 나 자신이 무척 불쌍하게 생각되었다. 오르간 소리를 듣고 있자니 문득 울고 싶어졌다. 그때, 저쪽 성가대 한 모퉁이에서 나를 보며 미소 짓고 있는 초췌한 차림의 잘생긴 얼굴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제르만느 신부의 미소 띤 온화한 얼굴을 보자 내 마음은 편안해졌다. 그의 얼굴은 용기와 원기로 그득했던 것이다. 베니, 크레아토르 스피리투스…….

성신미사가 있고 난 이틀 뒤 다시 새로운 의식이 거행되었다. 교장의 집안에서 모시는 성인을 기념하는 축제였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그래왔듯이 이날은 학교 전체가 냉동육과 리무산(産) 포도주가 잔뜩 쌓인 풀밭에서 생테오필 축제를 거행했다. 여느 때처럼 이번에도 교장은 학교에는 조금도 누를 끼치지 않으면서 자신의 자비로운 본능을 만족시키는 이 작은 가족 축제가 흡족한 결과를 낳을 수 있도록 뭐 하나 아끼지 않았다.

동이 트자마자 사를랑드 시(市)를 상징하는 깃발로 장식된 대형 합승마차들이 학생과 교사들을 가득 태운 채 출발했고, 거품이는 포도주 광주리와 음식 바구니를 가득 실은 두 대의 운송차가 그 뒤를 이었다. 맨 앞에 가는 꽃마차에는 지체 높은 사람과 악대가 타고 있었다. 오피클라이드를 힘차게 연주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채찍 소리, 방울 소리, 그리고 쌓아올린 접시 더미가 양철 반합에 부딪치는 소리……. 아직도 나이트캡을 쓰고 있는 사를랑드 사람들이 축제 행렬을 구경하려고 다들 창가로 몰려나왔다.

축제는 프레리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풀밭 위에는 식탁보가 펼쳐졌고, 마치 애들처럼 제비꽃 위에 앉는 교사들을 보고는 아이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파이 조각을 담은 접시가 한 바퀴 돌았고, 병 마개가 튀어 올랐다. 눈들이 반짝반짝 빛났고, 다들 열심히 떠들어댔다. 모두들 즐거워하는데 오직 나만은 불안을 감출 수가 없었다. 별안간 내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방금 교장이 종이쪽지 하나를 손에 들고일어난 것이었다.

“여러분, 나는 방금 어느 무명 시인이 내게 쓴 시 한 편을 건네받았습니다. 우리의 핀다로스[옮긴이 주 - 기원전 5세기 경의 그리스 서정시인]인 비오 씨가 금년에는 호적수를 만난 것 같군요. 이 시가 이 사람을 좀 과찬하는 경향이 있어서 과연 여러분들에게 읽어드려야 할지…….”

“괜찮아요, 괜찮아요……. 읽으세요! 읽으세요!”

교장은 종업식 때의 예의 그 부드러운 목소리로 시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운(韻)이 풍부하고 표현이나 문체가 아주 잘 다듬어진 시로서 교장과 교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찬사를 보내는 내용이었다. 시인은 안경잡이 마귀할멈도 빠뜨리지 않고 언급,‘ 식당에서 일하는 천사’라고 매혹적으로 표현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환호를 보냈다. 작가가 도대체 누구냐고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마치 석류 열매처럼 얼굴을 붉히며 일어나서는 겸손하게 절을 했다. 모두들 감탄사를 연발하며 환호했다. 나는 그날 축제의 주인공이 되었다. 교장은 나를 껴안으려고 했으며, 나이 든 교사들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내 손을 힘주어 잡았다. 중급반 담임 교사는 내 시를 신문에 실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대단히 기분이 흡족해졌다. 이 사람 저 사람한테서 칭찬을 받으니 기분이 우쭐해지면서 술기운이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제르만느 신부와 비오 씨의 얼굴이 떠오르는 순간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신부는‘이 바보 같은 녀석!’이라고 중얼거리는 듯했고, 이제 나의 라이벌이 된 비오 씨는 한층 더 사납게 열쇠를 흔들어대는 것 같았다.

온통 시끌벅적 흥분된 분위기가 좀 가라앉자 교장은 조용히 하라며 손뼉을 친 다음 말했다.

“자, 자, 여러분. 이제 비오 씨의 차례입니다. 익살스러운 뮤즈 여신의 차례가 끝났으니 이제 근엄한 뮤즈 여신의 시를 들어봅시다.”

약속어음처럼 두툼하게 제본된 수첩을 호주머니에서 꺼낸 비오 씨는 나를 힐끔힐끔 곁눈질하면서 시를 읽기 시작했다.

비오 씨의 작품은 학교 규율에 경의를 표하는 로마 시인 버질 풍의 목가적인 전원시였다. 학생인 메날크와 도릴라가 한 구절이 끝날 때마다 번갈아가며 거기에 답하는 시를 읊었다. 메날크는 규정이 아주 잘 지켜지는 학교의, 도릴라는 규정이 전혀 지켜지지 않는 학교의 학생 역을 했다. 메날크는 엄격한 규칙을 지킬 때 느끼는 엄숙한 즐거움에 대해, 도릴라는 어리석은 자유가 가져다주는 헛된 즐거움에 대해 읊었다.

결국 도릴라가 졌다. 그는 자기를 정복한 자의 손에 투쟁의 전리품을 갖다 바쳤고, 두 학생은 박수를 치면서 함께 목소리를 합쳐 규율의 영광스러움을 찬양하는 환희의 노래를 부르면서 시를 끝맺었다.

시 낭송은 모두 끝났다. 그러나 죽음과도 같은 침묵만이 흘렀다……. 아이들은 시를 읊는 동안 접시를 들고 풀밭 끝으로 가서 메날크와 도릴라가 뭐라고 떠들어대건 상관없다는 듯 파이를 먹었다. 비오 씨는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교사들은 비록 잘 참아 내긴 했지만, 용기를 내어 박수를 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비오 씨의 완전한 패배였다. 교장이 그를 위로하려고 애썼다.

“주제가 너무 딱딱했던 것 같군요, 여러분. 하지만 우리 시인은 그 딱딱한 주제를 아주 잘 처리했습니다 그려.”
“전 비오 선생님의 시가 아주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처럼 뻔뻔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승리했다는 사실에 겁이 나기 시작했다.

비겁한 패배자인 비오 씨는 위로받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아무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인 채 계속 쓰디쓴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그날 하루 종일 그러고 있었다. 그리고 밤이 되어 학생들의 노랫소리와 박자도 안 맞는 음악 소리, 합승마차가 잠든 도시의 아스팔트 위를 구르는 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지는 동안, 나는 어둠 속에서 내 라이벌의 열쇠 꾸러미가 사납게 쨍그렁거리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짤랑! 짤랑! 이봐, 시인 선생, 언젠가는 자네한테 복수하고 말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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