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트렌드 노트>
편의점이 뜬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18 트렌드 노트>에서 다루는 트렌드가 이전에 없었다가 새롭게 나타난 현상이라면 편의점을 굳이 다룰 필요는 없다. 하지만 트렌드는 2017년에 아무도 몰랐는데 2018년에 혜성처럼 나타날 그런 키워드가 아니다. 트렌드는 큰 흐름과 경향성이며, 그 흐름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상징적인 현상이 있다면 언어의 경제성을 고려해 ‘키워드’라는 형태로 표현할 뿐이다.
소셜미디어에서 편의점의 상승이 포착된 것은 2013년부터였다. 이후 유통업에서도 편의점에 주목하고 있다. 일례로 신세계그룹이 자사 편의점 상호를 ‘위드미’에서 ‘이마트24’로 바꾸고 공격적인 투자를 하기로 했다. 트렌드라고 말하기에 편의점은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지만, 우리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편의점이 보여주는 삶이 우리의 현재와 변화 방향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편의점은 남성들이 좋아하는 채널이다. 여성들의 먹거리 쇼핑채널의 반 이상이 마트인 반면, 남성들의 1등 먹거리 쇼핑채널은 편의점이다. 여성들은 커피, 과자, 음료 등의 간식을 구매하기 위해 편의점에 들르지만, 남성들은 주로 도시락, 라면, 삼각김밥 등 끼니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편의점을 찾는다. 담배나 주류 등 기호식품을 구매하는 장소임은 물론이다. 편의점이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는 장소에서 질이 결코 낮지 않은 한 끼 식사를 제공하는 곳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것은 1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여기서 주목할 편의점에서 엿보는 삶의 진화 방향은 3가지다. 최소한의 인간관계, 부스러기 성공들, 유목민적인 삶.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편의점 점원이 손님에게 아는 척하는 것은 반칙이다. 무심코 담배를 사는데 ‘담배 바꾸셨네요’라고 손님의 담배 취향을 알고 있는 내색을 하거나,‘ 오랜만이네요.’ 하며 손님의 방문주기를 체크하는 인상을 준다면 그 점원은 친절하다고 칭찬받기보다는 규칙을 어겼다고 경고를 받을 것이다. 손님 역시 마찬가지다. ‘가장 맛있는 도시락을 추천해주시겠어요’라거나,‘ 오늘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서 커피 대신 탄산음료 샀어요’라고 점원의 추천을 요구하거나 자신의 상황을 지나치게 설명하는 것도 규칙 위반이다. 실제로 규칙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인간관계 사이의 암묵적 규칙이다‘.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기’‘, 알아도 내색하지 않기’‘, 불필요한 설명을 요구하지 말고 하지도 말기.’
편의점 점원과 손님이 맺는 최소한의 인간관계는 회사 동료 사이, 스터디 모임의 친구 사이, 명절 때 만나는 친척 사이에도 적용된다. 그러니 이제부터 규칙에 대한 이해도가 달라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모를 때는 편의점을 생각하시길. 물론 편의점에서도 허용되는 말이 있다.‘ ○○○ 어디 있어요?’,‘ ○○○ 얼마예요?’, ‘멤버십 회원입니다’ 같은 말은 해도 된다. 편의점에 물건을 사러 왔으므로, 구매와 관련된 질문은 해도 된다. 다른 곳에서 나의 정체성에 대해 말할 때에도 편의점의 맥락에 비추어 이야기하면 된다. 그러나 나의 사생활과 커피 취향은 대화의 주제가 아니다. 그 장소에 꼭 맞는 주제로 대화하고, 그 장소에 필요한 정체성만 공유하는 사이. 편의점에서 새로운 인간관계 규칙을 배운다.
편의점은 신상품을 체험하는 장소다. ○○ 사러 갔는데 새로운 게 있기에 호기심에,‘ 2+1’이라기에, 지난번 것은 이랬는데 이번 것은 어떤가 싶어 한번 먹어보게 된다.
우리 시대의 선(善)은 새로움이다. 새로움 그 자체가 가치다. ‘먹어보다’, ‘시도하다’, ‘찾아보다’라는 단어의 빈도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좋아서 먹는 게 아니라 새로워서 먹어본다. 다양한 제품의 끊임없는 시도, 변주, 금방 생기고 금방 사라지고, 다른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한정판이어서 구하러 다니다 금세 질려 돌아보지 않는 소비자. 그에 발맞춘 제품들. 일부 제품들의 부스러기 성공들이 이 시대를 이루고 있다.
철학 없는 브랜드가 성공한다는 뜻은 아니다. 철학 있는 브랜드가 되어 끊임없이 변주해야 한다. 브랜드의 철학이 공고히 자리 잡고 있을 때 큰 용량, 작은 용량, 매운맛, 단맛, 가로로 긴 모양, 세로로 긴 모양 등 어떤 시도를 해도 ‘나’로 남을 수가 있다. 하지만 철학만큼 중요한 것은 다양한 형태로 소비자를 만날 수 있는 변주다. 이제는 하나의 모습으로 거대한 성공을 거둘 수는 없다. 하나의 브랜드로 부스러기 성공들을 이루고, 부스러기 성공들이 모여 하나의 브랜드를 형성하게 된다.
매일 저녁 맥주 두 캔씩 마시는 사람은 주 1회 맥주 한 박스씩 구입하는 것이 낫다. ‘낫다’는 것은 싸게 살 가능성이 높고 구매 번거로움도 적다는 뜻이다. 하지만 매일 저녁 어디서, 누구와, 어떤 식사를 하고 몇 시에 집에 올지 모르는 사람은 맥주를 미리 한 박스나 구입해놓을 수 없다. 그런 사람은 그때그때 한 캔씩 구입하는 것이 낫다. 우리는 바로 후자와 같은 삶,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삶을 살고 있다. 즐길 거리가 다양해서도 그렇고, 적극적으로 저녁을 즐기기 때문이기도 하고, 살고 있는 집의 안정성이 떨어져서이기도 하다. 거주 안정성이 떨어져서 미래를 계획하기보다 현재를 즐기는 쪽으로 변화하는 바람에 더욱더 계획성이 떨어지기도 하고, 그 반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형마트보다 길목을 지키고 있는 편의점이 유리하다. 유목민적인 삶의 오아시스로서 편의점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언제든, 무엇을 먹든 편의점은 우리를 지원해 준다. 이렇게 편의점은 우리 삶의 유목민화를 부추기기도 하고 돕기도 한다.
미니멀라이프 가이드 책에서는 마트를 내 집 냉장고처럼 여기라고 한다. 마트에서 대용량을 사서 쟁여두는 것이 아니라 마트를 내 집 창고로 여기고 조금씩 그때그때 사라는 것이다. ‘나만의 냉장고’는 어떤 편의점의 판매방식이기도 하다. 2+1 제품일 경우 한 개는 지금 가져가고 나머지는 언제든지 나중에 와서 가져가라는 식이다. 여러 개를 한 번에 사고 한 개씩 빼먹는 방법인데, 2+1 제품뿐 아니라 대용량 생활용품도 못 할 바 없다. 미리 돈을 묻어두고 차감해가는 방식도 가능하다. 편의점에서는 나의 멤버십 번호만 인식하고 있으면 된다. 점원도 필요 없다. 멤버십 카드로 열고 들어가서, 물건을 집어 나오면서 바코드만 입력하면 자동 결제된다.
편의점이 동사무소 역할을 하지 못할 것도 없다. 가구 구성이 1인 가구 확장형이 되었을 때 가장 유리한 채널은 편의점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모두는 편의점 인간이 되지 않을까?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고, 편의점에서 돈을 쓰고, 편의점의 무인화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잃으면 편의점 동사무소에서 실업수당을 신청한다. 기술의 발달은 삶을 다양하게도 만들지만, 규격화하기도 한다. 다양한 여행상품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플랫폼 덕분에 우리는 수천 가지 상품을 검색하고 선택할 수 있지만, 지금 가장 많은 사람들이 AA 여행상품을 선택했다는 정보도 동시에 볼 수 있기에 나 역시 AA 상품을 선택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 편의점은 우리에게 시간과 상품의 선택 가능성을 높여주었지만, 큰 틀에서 보면 우리는 편의점 인간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