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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16. 2017

08. 나쁜 아바타도 있다.

<백만장자와 함께한 배낭여행>



그게 사람을 망가뜨리기 때문이죠.

“강 국장님, 많이 드세요. 오늘 내가 한턱 쏩니다. 배 터지도록 드셔도 돼요.”

선생이 이렇게 말했을 때, 말문이 막혔다. 호텔 조식 뷔페에 들어서면서 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조식 뷔페는 공짜다. 숙소를 예약할 때 아침이 포함되어 있는지와 와이파이가 터지는지가 우리의 필수 조건이었다. 와이파이가 터져야 선생의 아이패드로 한국의 주식시장을 살필 수 있다. 와이파이가 선생의 필수 조건이었다면, 아침 조식은 내 필수 조건이었다. 만약 조식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숙소를 잡으면 밥을 못 먹을 우려가 있어서 항상 그것부터 살폈던 것이다. 그런데 한턱 쏘신다니. 내가 툴툴거리자 선생이 말했다.

“내가 좀 짜지요?”

여행이 시작된 이후로 한두 번 겪은 일도 아니다. 이제는 으레 그러려니 한다. 내가 잠자코 있으니 선생이 말을 계속 이었다.

“강 국장님, 돈은 버는 것보다 지키기 어렵다는 말 많이 들어봤지요? 그거 정말 맞는 말입니다. 강 국장님이 나중에 돈을 많이 벌게 되면 온갖 시달림을 당하게 될 겁니다. 세상은 무섭거든요.”

갑자기 귀가 솔깃하다. 뭔가 재테크의 비전이 전수될 것 같은 느낌이다. 못 이기는 척 귀를 기울였다.

“내가 주식으로 큰돈을 벌었다는 사실이 신문과 방송, 그리고 내가 쓴 책을 통해 알려지니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은근히 기대를 하는 게 슬슬 눈에 띄더군요. 나와 만나서 친해지면 내가 주머니에서 선뜻 사업 자금을 꺼내 빌려주고, 선뜻 여행 경비를 대주고, 아쉬울 때 척척 돈을 빌려줄 것같이 생각하는 듯했어요. 그리고 그게 마치 당연하다는 듯, 말이 잘 안 통한다 싶으면 내게 화를 내기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하지만 나는 아무 이유 없이 돈을 빌려주거나 도와주지 않습니다.”
“소비적인 데 돈 쓰시는 것을 싫어하시니 당연하겠지요.”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에요.”
“그럼요?”
“그게 사람을 망가뜨리기 때문이죠.”

선생의 설명이 이어졌다. 누군가가 쥐어주는 공짜 돈은 사람을 망가뜨린다는 거였다. 마치 악성 바이러스처럼 사람의 영혼에 스며들어 노력하지 않고 받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함부로 돈을 건네면 그 사람의 능력을 빼앗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돈이 생명줄이지만, 멀쩡히 직장 잘 다니는 사람에게 친하다는 이유로, 친척이라는 이유로 턱턱 돈을 건네면 안 됩니다. 그건 큰일 나는 거예요. 사람이란 게 누구나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지요. 좋은 차 보면 갖고 싶고 맛난 음식 보면 먹고 싶은 거예요. 일하는 것보다는 노는 걸 좋아하고요. 그걸 부추기는 거지요. 내가 어떤 사람을 평생 먹여 살릴 수 있으면 그렇게 해도 되지요. 하지만 그럴 수 있다고 해도 그래서는 안 돼요. 스스로 판단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돈을 버는 능력을 그 사람에게서 영원히 빼앗는 거니까요.”

집과 차는 줄여갈 수 없다고 했던가. 이른바 ‘돈맛’을 본 사람은 험한 일, 체면 깎이는 일, 고단한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좀 떵떵거려 본 사람은 아무리 가세가 기울어도 ‘노동’에 힘쓰기보다는 ‘눈먼 돈’을 빌려 그럴듯해 보이는 사업을 벌이려고 한다.



“쉽게 얻은 돈은 나쁜 버릇을 남깁니다. 바로 ‘빚’이라는 거죠.”
“소비적인 일에 돈을 쓰는 맛을 들이면 빚을 내서라도 그 소비를 줄이지 않지요. 오히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그 정도는 누리고 살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하지요. 그러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빚이 쌓이는 거예요.”

경제학 용어로 ‘래칫 이펙트’(ratchet effect), 우리말로 ‘톱니바퀴 효과’ 이야기다. 가령 월 500만 원을 벌던 월급쟁이가 어떤 이유에서건 회사를 그만두면 다시 직장을 구할 때까지는 원래 소비를 극단적으로 줄여야 맞다. 하지만 소비 습관은 쉽게 바뀌어지지 않는다. 특히 자식들과 관련된 교육비는 줄일 수가 없다. ‘남들 사는 만큼은’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게 소비의 최저 기준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쁜 아바타를 떠올렸다. ‘빚’이라는 아바타. 좋은 아바타가 내가 쉬거나 노는 사이에도 나 대신 일 해서 부를 창출하듯이, 나쁜 아바타가 내가 쉬거나 노는 사이에도 나 대신 나의 자산을 갉아먹고 내가 평생 일해도 갚을 수 없는 짐을 지우려 한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소비의 최저 기준을 낮추는 것이겠구나.’

빚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힘들고 부담스럽지만 그 크기가 커지면 자포자기하게 만든다. 꿈꿀 수도 없게 된다. 빚 독촉은 사람의 현재뿐 아니라 미래까지 고단하게 하는 셈이다. 선생은 그런 이야기를 내게 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생각이 많아져 골똘해진 내게 선생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지금이 강 국장님에겐 어려운 때일 거예요. 국가로 치면 비상사태지요. 자존심 때문에 예전 생활을 고수하려 해서는 안 돼요. 납작 엎드려 위기를 넘기면서 앞날을 모색해야 합니다. 아셨지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선생이 장난기 어린 얼굴이 됐다.

“그럼 이제 내가 내는 거 맛나게 드세요. 천천히, 배부르게.”

예상했다. 이제 빤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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