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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17. 2017

04. 극악무도한 몽타주

<빗소리 몽환도>


화가 C는 경찰서로 가는 중이었다. 날이 추웠다. 게다가 눈인지 비인지 헷갈리는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거리의 공기는 축축하고 길바닥은 질척거렸다. 그는 목을 깊숙이 회색 잠바에 파묻고는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걸어갔다. 어쩌다가 발을 들여놓게 되었는지 조금은 후회스러운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한 장만 잘 그려낸다면 따끈한 방 안에서 일주일을 빈둥빈둥 지낼 수 있었다. 때로는 찰랑거리는 동전소리가 들리면 그의 뱃속이 두둑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일은 만만치 않았다. 부담도 많았다. 대상이라도 또렷하면 까짓것 모델을 크로키 하듯 몇 초 만에 그려낼 수 있을 텐데, 라고 생각하며 화가는 몸을 으스스 떨었다.

경찰서 정문을 들어서면서부터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 문앞에 서면 언제나 꺼림칙한 느낌이었다. 허름한 외투와 헝클어진 머리가 그를 범죄자로 오해하게 할 확률이 높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컸다. 복도에 서 있는 남자들의 얼굴은 험상궂었다. 어떤 자는 침을 뱉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누군가를 한 방 먹이고 싶어 하는 제스처를 하고 있었다. 누가 범죄자이고 경찰인지 잘 구별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일부러 살펴볼 필요는 없었다. 그는 코트에서 4B연필 두 자루를 꺼냈다. 그게 무기라도 되는 듯이 꽉 움켜잡고 화가 C는 시끌벅적대는 수라장을 지나 간신히 주임형사의 테이블에 도착했다.

주임형사는 복잡한 사나이였다. 호랑이처럼 성질이 사나웠고 말할 때면 놀란 말처럼 콧김을 내뿜으며 이힝, 소리를 냈다. 눈은 날카로워 마치 매같이 생겼다. 그에 비하면 화가는 순한 기린의 눈매에다 몸이 작고 늘 웅크리고 있어선지 거북이처럼 등이 둥그렇게 굽어 있었다. 등이 굽었기 때문에 그의 호리호리하게 가냘픈 목은 앞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화가의 눈과 마주치기가 무섭게 주임형사가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이놈, 증말 흉악한 새끼 아냐!”

화가는 의자에 앉다가 미끄러질 뻔했다.

“뭘 그렇게 놀라오? 자, 우선 제대로나 앉으시오! 아, 이 새끼가 주제에 색을 밝힌다니까! 꼭 길거리 여자만 해치고 말야! 이런 놈들은 당장 잡아 족쳐야 해! 그래야 불쌍한 여자들도 안전하게 거리를 활보하지 않겠소? 잊지 마시오! 당신과 나는 그것을 위해 일을 하는 거요. 그건 그렇다 치고. 지금은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이나 집중합시다! 그런 놈이 있기에 우리도 밥벌이를 하는 것이니까.”

흉악범의 얼굴은 아무도 몰랐다. 용케 살아남은 피해자도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고 했다. 어렴풋한 이미지만 남아 있다고들 했다. 급박한 상황에 부딪히면 지성도 상식도 유용하지 않았다. 이미지…, 언제나 그것만이 남았다! 그러나 그건 절대 단순한 게 아니었다. 종국에 가서 기억의 줄기에 어떤 이미지가 남게 되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 중의 하나였다. 어쨌든 화가 C는 이런저런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조각조각의 말로, 늦어도 이번 주말까지는, 흉악범의 이미지를 꿰맞추어야 했다. 그가 그려내는 이미지는 전국에 있는 기차역에, 우체국에, 고속도로에, 동사무소에, 각종 공공건물마다 붙을 예정이었다.

“자아, 놈의 눈부터!”

주임형사가 소리쳤다. 오직 하나뿐인 악당의 얼굴을 그리기 위해 화가는 오른손에 4B연필을, 왼손에는 지우개를 잡았다.

“그래, 놈의 눈이 작고, 째지고, 탁하고, 더럽고, 음흉하다더군. 음, 뭐라고? 그건 좀 모호하다고? 헌데 자넨 좀 크게 말할 순 없나? 난 귀가 나쁘거든. 정 그렇다면, 우선 쫙 찢어진 뱁새눈을 그려놓게나. 나중에 수정하더라도. 모두 매섭다고들 했으니.”

화가의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재빨리 움직였다. 연필의 검은 흑연이 흰 종이를 사각사각 밟고 가더니 어느새 거기에 금방 악한의 눈동자가 생겨났다. 흰 종이 위에서 째진 뱁새눈이 매섭게 그들을 쳐다보았다. 눈싸움하듯 두 남자는 그 눈을 노려보다가,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놈의 얼굴은 넓적하고, 비굴하고, 살집이 있다고 피해자들이 그러더군. 허긴 그 여자들이 뭘 알겠소만 직감은 꽤 있는 편이니까. 사실 그년들이야……”

주임형사는 혼자 씨부렁거리며 이상한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화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여자들이야말로 혐오스런 놈도 참아주고, 유치한 놈을 위로하며, 못난 놈도 못난 대로 받아준다는 걸 자신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낙오하고 소외된 놈들은 어디서 사랑을 얻을 수 있겠는가, 라고 화가 C는 늘 생각해왔다.

“놈의 콧방울은 좁고 코끝이 꺾어졌다고 했소!”
“혹시, 주임님의 코와?”

그 말은 실수였다! 주임형사의 얼굴이 벌게졌다. 곧이어서 달리는 야생마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바깥에 있던 형사 하나가 자기를 불렀냐고 고개를 내밀었다. 갑자기 열려진 문으로 악다구니 같은 잡음이 실내로 밀려 들어왔다. 카악, 주임형사가 가래침을 뱉었다. 주눅이 든 화가는 공연히 죄 없는 4B연필 대가리를 이빨로 씹어댔다.

“귀는 상당히 크다고 하오. 귓밥이 이렇게 둥그렇고 안테나처럼 생겼다고.”

주임형사는 크게 소리 지르듯 말하다가 어색한 듯이 자신의 귀를 만졌다.

“그런데 말이오. 참으로 이상한 점은, 놈의 입은 그렇게 극악무도하지 않게 생겼다고 합디다. 오히려 육감적이라나? 입술은 매끄럽고 특히 침이 많다고 했소. 여자를 보고 침을 흘리는 동물이라 그런가? 어쨌든 여기 자료들이 더 있으니 좀 자알 살펴보시오.”

형사의 말과 피해자의 증언과 CCTV에 남겨진 희끄무레한 그림자를 참고하고, 자신의 예리한 예지력을 동원해서, 화가 C는 퍼즐 같은 몽타주에 집중했다. 그의 등에선 진땀이 나고 시간은 소리도 없이 서풋서풋 흘러갔다. 마침내 그는 밑그림을 주임형사에게 내밀었다.


“제기랄! 아니, 이게 뭐야! 이렇게 그리면 어떡해! 이거 봐, 화가양반! 흉악범 얼굴치곤 너무 평범하잖아!”

화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이 그린 몽타주를 보았다. 사실 그 말에 반대할 수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았다. 악당의 몽타주는 결코 한 번에 이루어지는 작업이 아니었다! 솔직히 악당의 경우에는 그런 건 아니지만. 그는 스케치를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화가는 잠시 휴식을 위해 담배를 꺼내 물고 창가에 기대섰다. 경찰서 밖에는 여전히 비인지 눈인지 구별되지 않는 진눈깨비가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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