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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17. 2017

07. '작은 시내'의 탄생

<클래식에서 리더의 언어를 배우다>


음악을 과학으로 만들다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
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1685년 3월 23일, 독일 아이제나흐의 성 게오르크 교회에서 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흐의 넷째 아들 세례식이 열렸다. 세례를 받은 아이는 ‘요한’이라는 이름과 대부의 이름 ‘제바스티안’을 받았다. 그는 바로 훗날 세 명의 탁월한 음악가를 길러낸 아버지이자 클래식의 아버지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이다.


독일 아이제나흐, 뒤에서 본 바흐 동상


아이제나흐에서 바흐 가문은 유명한 음악 집안이었다. 바흐 가문이 음악 명가로 자리 잡은 계기는 흥미롭게도 방앗간을 운영하던 선조 파이트 바흐가 방아 리듬에 맞춰 악기를 연주하던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후 파이트 바흐의 후손들은 오르간 연주자나 시 또는 궁정 음악가로 활동하기도 했고, 교회 합창단을 이끄는 칸토르(교회에서 예배할 때 쓰는 음악을 만들고 합주단과 합창단을 지도하는 일종의 음악감독이다.)나 악기 제조업자 등 대부분 음악 관련 일에 종사했다.

바흐가 출생할 당시 아버지 요한 암브로시우스는 시립 악단에 속한 음악가였고, 성 게오르크 교회에서 일하는 아저씨 요한 크리스토프와 함께 사실상 아이제나흐의 음악 활동을 주도했다. 하지만 바흐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아홉 살 때 어머니를 잃었고 그 이듬해에는 아버지마저 잃었다. 어린 바흐를 맡게 된 맏형 크리스토프는 바흐에게 피아노를 가르쳤고 어학, 역사, 신학 등을 배울 수 있도록 학교에 보냈다. 바흐 역시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당대 음악 대가들의 악보를 열심히 필사했고, 오르간 연주를 듣기 위해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까지 걸어가기도 했다.

큰형이 결혼해 가정을 이루자 바흐는 자립해 스스로 먹고살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는 북부 독일의 뤼네부르크 교회의 합창단원으로 들어가 학비를 면제받으며 고등학교를 다녔다. 열여덟 살에는 바이마르 궁정 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3개월 뒤, 아른 슈타트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된 그는 오르간 연주와 작곡 기법을 갈고닦았다. 당시 뛰어난 음악가로 알려진 디트리히 북스테후데를 자신의 롤모델로 삼아 꾸준히 기량을 닦아 나아갔다.

1707년 6월, 뮐하우젠의 성 블라지우스 교회로 자리를 옮긴 뒤 세살 연하의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와 조촐하게 결혼식을 치렀다. 오르간 연주자 겸 작곡가로 성장한 그는 <토카타와 푸가 D단조(Toccata and Fugues in D minor, BWV 565)>를 작곡했다. 이곳에서의 재직 기간은 짧았지만 바흐 생전에 유일하게 출판된 칸타타 악보가 전해지는 곳이다. 칸타타 제71번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도다(Gott ist mein König)>인데, 이전에 없던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받아 이례적으로 뮐하우젠 시의회가 비용을 지불하여 출판한 작품이다.

1708년부터 약 10년간 바이마르 궁정에서 오르가니스트로 지내는 동안 그의 오르간 실력은 눈부시게 성장했다. ‘오르간 시대’라고 일컬을 정도로 오르간 연주와 작곡에서만큼은 완전한 대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칸타타 작곡과 더불어 비발디의 협주곡을 오르간이나 쳄발로(16-18세기에 널리 쓰인 건반 악기로,픽(pick)으로 현을 퉁겨 섬세하고 화려한 음색을 낸다.)로 편곡하면서 이탈리아의 협주곡 양식을 터득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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