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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17. 2017

05. 거기가 어디야?

<빗소리 몽환도>



교대역이었다. 여자는 3호선 쪽으로 가는 계단을 내려갔다. 우르르 몰려가는 사람들 틈에 여자도 끼여 있었다. 기차에 못지않게 여자도 달려가고 있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여자는 핸드폰을 백에서 급하게 끄집어내서 귀에다 가져갔다.

“오는 거지?”
“응. 방금 탔어.”

전동차 안에선 구저분한 냄새가 났다. 앞사람 옷에선 나프탈렌 냄새가, 옆 사람에게선 땀 냄새가, 공중엔 머리를 감지 않은 누군가의 냄새 분자가 떠돌고 있었다. 여자는 그런 사람들 틈에서 숨이 막히기 일보 직전이었다. 핸드폰이 또 울렸다. 여자는 부랴부랴 핸드폰을 꺼냈다. 여자는 입을 막고 핸드폰에다 조용히 소리쳤다. 으응, 자기야? 저쪽에선 느긋한 목소리로 그가 대꾸했다.

“경복궁역 7번 출구로 나오라구. 통화가 안 돼서 다시 했어.”
“알았어.”

많은 사람들이 압구정역에서 내렸다. 빈자리가 보였다. 묵음으로 전환시킨 핸드폰이 부르르 떨었다. 여자가 핸드폰을 찾느라고 가방을 뒤지는 순간, 에구구 소리를 내는 아줌마가 잽싸게 먼저 그 자리에 앉아버렸다. 핸드폰에서 말랑말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참, 아까 내가 출구를 잘못 알려준 것 같아. 7번이 아니라 4번이야. 아 엠 쏘리.”
“아휴 뭐야 증말!”

교대역을 떠난 지 18분 만에 3호선은 한강을 지나가고 있었다. 강물이 햇살을 받아 빤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햇살을 받지 못한 곳은 죽은 듯이 보였다. 어찌 보면 문제는 햇살에 있었다.

종로3가역에서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여자는 저녁에 촛불시위가 있다는 걸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안국역만 지나면 다음이었다.

마침내 경복국역에 도착하자마자 여자는 핸드폰을 꺼내 숨이 찬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응, 자기야? 나 역에 도착했어.”
“그럼, 지하에서 나와. 출구 번호를 잘 보구.”
“이그, 내가 뭐 어린애인 줄 알아?”
“잘못 나오면 한참 헤맬 테니까 그러는 거여.”
“알았어, 그 다음엔?”

그때 육중한 체구의 한 남자가 그녀를 세게 밀쳤다. 여자의 몸체가 휘청했다. 신경질이 났지만 붐비고 있어서 누군지 알 수 없었다.

“4번 출구 찾긴 찾았어?”
“찾았다니까!”
“야, 너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야단이니? 오기 싫으면 관둬!”

여자는 여자대로 자존심이 상했다. 핸드폰을 닫아버릴까 잠깐 망설였다. 자기 말만 해대는 이런 남자와 어떻게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지를 생각했다.

“듣고 있는 거야, 뭐야!”
“그래. 듣고 있어! 좁쌀영감처럼 구니까 화나잖아!”
“내가 왜 영감이냐? 생생한 청년이. 네가 칠칠하지 못해서 늘 길을 못 찾으니까 배려하는 거지. 아무튼 출구는 찾았지? 참, 그 옆에 엘리베이터는 타면 안 돼. 그건 노약자나 병약자나 타게 놔두고. 둘러보면 반대편 쪽에 계단이 있을 거야. 꽤 계단이 많아, 경복궁역에는 108개도 넘게 있어. 그 쪽으로 올라와.”
“아휴 증말루 못 말리네! 그런 건 내 맘대로 아냐?”
“말자루를 똑똑 부러뜨리지 마! 널 위해 말하는 건데 왜 그래? 그러려면 다 관두라고!”
“그래? 좋다구! 나도 이젠 그만이야!”

여자는 핸드폰 뚜껑을 닫아버렸다. 이토록 잔소리를 늘어놓는 남자는 질색이었다. 여자는 계단을 도로 내려갔다. 혹시 핸드폰이 울리지나 않나 신경을 곤두세우며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지금까지 걸어온 긴 복도를 지나 지하철 개찰구에 손을 내미는 순간, 그녀의 귀에 찌르릉 찌르릉 핸드폰 벨소리가 들려왔다. 혹시나, 했다. 그러나 그건 환청이었다.

그래도? 하고 여자는 걸음을 멈춰 다시 몸을 돌렸다. 108개가 넘는 계단의 반쯤 되는 중간지점이었다. 여자가 급히 올라가다가 발목이 비끗했다. 본능적으로 먼저 주변부터 살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얼른 하이힐을 벗어 집어 들었다. 뒤축의 못이 헐렁하게 빠져 있었다. 그때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야, 야, 야, 너, 정말 왜 그러는 거야?”
“누가 할 말을 지금 누가 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끊겼잖아?”
“누가 그걸 몰라? 서둘다가 핸드폰을 떨어뜨렸어.”
“칠칠치 못하기는! 아무튼 4번 출구는 찾았지?”

그녀는 하이힐에 대해선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핸드폰을 귀와 어깨에 사이에 끼고 계단에 앉아 백을 뒤지지 시작했다. 다행히도 스카치테이프가 있었다. 그녀는 뒤축 못이 다시 박히도록 하이힐을 뒤집어 바닥에 탕탕 내려친 다음에 스카치테이프로 하이힐의 뒷부분을 둘둘 말았다. 보기는 뭐 하겠지만 대강 수리를 끝낸 여자는 여유 있게 물었다.

“으응. 그런 후엔?”
“4번 출구를 나오자마자 오른쪽으로 꺾어. 그러니까 오른쪽으로 곧장 가다가 사거리를 만나면 왼쪽으로 꺾어. 아, 참, 지하철 출구에 나오자마자 구멍가게가 있는데, 거기서 붕어빵 아이스크림을 두 개 사가지고 오면 어떨까? 왠지 그게 먹고 싶은데…? 그러니까 정리해주자면 아이스크림을 산 후 사거리가 나오면 왼쪽으로 돌아 곧장 올라오면 돼. 아이스크림 혼자 먼저 먹으면 안 돼.”
“에그, 알았어. 얼마큼 가야 된다구?”

여자는 삐꺽 대는 하이힐을 고쳐 신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한 계단 한 계단을 밟았다.

“5분쯤.”
“그 쪽은 청와대 가는 길 아냐?”
“아니, 거기까지 갈 필요는 없고, 백 미터가량 걸어오면 될걸? 알았으이.”



여자는 4번 출구 지하철 밖으로 나왔다. 갑작스런 여름 햇살에 눈동자가 잠시 멍해졌다. 그 순간 여자는 출구의 마지막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바닥으로 엎어졌다. 메고 있던 핸드백도 나동그라졌다. 동전지갑이며 립스틱이며 콤팩트며 죄다 저만치 굴러갔다. 설상가상으로 소매에 스쳐 왼쪽 눈에서 소프트 콘택트렌즈가 떨어졌다. 여자는 한쪽 눈을 찡그리고 더듬더듬 바닥을 더듬었다. 찾기는 힘들었다. 무릎으로 기어 널려진 소지품들이나 주섬주섬 찾아 챙겼다. 일어나고 보니 발목이 시큰했다. 여자는 안 보이는 눈보다 걷는 게 더 신경이 쓰였다.

역 주변에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가고 있는 듯이 보였다. 다행이었다. 여자는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재빨리 콤팩트를 열어 립스틱을 다시 발랐다.

그리고는 상점에 들어가 붕어빵 두 개를 사고, 오른쪽으로 돌고 또 왼쪽으로 돌아, 백 미터나 되는 거리를 절뚝거리며 걸어갔다. 오른손에 두 개의 붕어빵 아이스크림을, 왼손엔 뒤축이 나간 하이힐을 들고 여자는 여름 햇살에 코를 찡그리며 땀을 흘렸다. 헐레벌떡 모퉁이를 돌아가 백 미터가량을 걸어가니 경복궁 담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가 내뿜는 담배연기가 흘러가는 구름과 합류하는 듯한 광경을 보는 순간, 여자의 심장은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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