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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20. 2017

00. <마네와 모네> 연재 예고

<마네와 모네>

인상주의의 거장들



동시대에 서로 영향을 미친 예술가를 함께 만나본다!

마네와 모네라는 이름은 비슷해서 우리에게 한 쌍으로 기억된다. 어떤 작품은 마네의 것인지 모네의 것인지 혼돈될 때도 있다. 마네는 인물화를 주로 그렸지만 풍경화를 보면 모네의 그림과 유사하고, 모네는 주로 풍경화를 그렸지만 인물화를 보면 마치 마네의 그림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두 사람이 오랫동안 우정을 나누면서 알게 모르게 서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1832년에 태어난 마네는 모네보다 여덟 살이 많지만 두 사람은 같은 시대를 풍미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화가였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마네는 작품을 팔지 않아도 생활할 수 있을 정도로 형편이 넉넉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유산을 상속받아 당대의 화가들 보다 좋은 조건에서 작업할 수 있었다. 한 스승 아래서 6년 이상 수학하면서 모델에 대한 드로잉을 충분히 익혔고 여러 뮤지엄에서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그들의 화풍을 익혔다. 따라서 마네의 작품에는 티치아노,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할스, 틴토레토, 필립피노 리피, 브라우어, 안드레아 델 사르토, 기를란다요, 파르미자니노, 고야 등의 화풍이 있다. 요즘 말로 하면 마네는 신지식인에 해당하는데 자신이 익힌 많은 대가들의 주제와 화풍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또 다른 화풍을 창조해냈기 때문이다.

마네는 의도적 구성이나 생략으로 화가 자신만의 느낌을 나타내는 그림을 그렸다. 따라서 인물화에 관심이 많았고 그에게는 모델이 매우 중요했다. 그 예로 아내 쉬잔을 그린 11점은 모두 걸작이 못 되었지만 빅토린 뫼랑을 모델로 한 10점은 대부분 걸작이 되었다. 인물화와 달리 마네의 풍경화는 당대 풍경화가들의 것에 비하면 특기할 만하지 못하다. 그의 풍경화 중 일부는 모네를 의식하고 그의 화풍을 흉내 낸 졸작으로 나타났다. 다만 그가 타계하기 얼마 전에 그린 풍경화에서는 시적인 느낌과 그만의 미학을 볼 수 있다.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모네는 혼자의 힘으로 화가의 길을 가야 했다. 그는 고향에서 외젠 부댕에게서 잠시 수학한 것을 제외하고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미술교육을 제대로 받을 기회가 없었다. 따라서 모네에게 화실은 건물 안이 아니라 바로 자연이었다. 그는 산과 들로 나가서 자신이 직접 바라본 장면들을 그렸으며 대가들의 화풍을 연구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자신의 눈과 느낌만을 신뢰했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에는 다만 모네가 있을 뿐이다.


마네, <생라자르 역> 부분, 1873, 유화


모네, <생라자르 역, 도착한 기차> 부분, 1877 _마네와 모네 모두 생라자르 역을 주제로 그렸다.


당시 사람들 에게 기차와 기차역은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위의 그림에서 보듯 마네는 기차역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역 을 배경으로 인물화를 그린 데서 역보다는 인물에 더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반대로 모네는 도시의 팽창 과 문명의 산물인 기차가 방사하는 연기에 관심을 두고 이런 장면들을 연속적으로 그렸다.


모네는 가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동료 화가 프레데리크 바지유가 보불전쟁에서 사망하기 전까지 그를 경제적으로 도왔으며 그 후에는 마네가 여러 차례에 걸쳐서 도와주었다.

폴 세잔이 모네를 가리켜 “얼마나 놀라운 눈인가!”라고 했듯이 모네가 자연을 보는 눈은 보통 화가들의 것과는 달랐다. 그는 아주 독특한 눈으로 빛이 일기의 변화에 따라 사물에 일으키는 변화를 파악하고 그것을 영롱한 색조로 나타낼 줄 알았으며, 빛이 사물에 닿아 사방으로 분산되는 것을 상상하면서 순간적인 현상을 빠른 붓질로 캔버스에 담았다. 그는 자연에서 직접 스케치한 것들을 화실에서 완성시켰지만 화실에서도 그 시각에 본 것에 대한 기억이 뚜렷했다. 마네가 베네치아를 여행하면서 스케치한 것들을 파리로 돌아와 완성시켰을 때 모네가 형편없는 것들이라고 비난한 이유는 생소한 지역의 풍경은 그곳에서 완성해야지 기억을 더듬어 화실에서 완성시킨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대의 평론가들은 마네를 인상주의 화가들의 왕이라고 불렀지만 정작 그 영예를 받아야 할 사람은 모네이다. 여덟 차례에 걸친 인상주의전에 한 번도 참여한 적이 없는 마네는 일찍이 파리 화단에서 유명해져 인상주의 운동의 선구자라는 영예를 얻었지만 거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1864년 마네의 화실 근처에 있던 카페 게르부아는 바지유, 판탱라투르, 세잔, 모네, 르누아르 등 젊은 화가들의 온상이었고, 드가도 종종 들렀는데 이들은 마네를 중심으로 모이는 ‘바티뇰 그룹’ 혹은 ‘마네파’로 알려졌다. 판탱라투르가 그린 그림에는 마네가 젊은 화가들의 중심에 서거나 앉아서 교훈을 주는 모습이다. 평론가들이 ‘바티뇰 그룹’의 체계적인 운동, 인상주의의 중심에 마네가 있다고 본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실제로 중심이 되는 인물은 모네였다.

마네가 1863년에 그린 <풀밭에서의 오찬>과 <올랭피아>는 모더니즘을 연 그림으로 미술사에 한 획을 그었다. 당시 미술계의 정황으로 보면 <올랭피아>의 누드는 관람자를 빤히 쳐다보는 뻔뻔스러운 포즈로 비난의 대상이었다.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비웃기라도 하듯 창녀처럼 보이게 한 누드를 통해 현대인의 비너스 관념을 새로 만들어낸 것이다. 또 <풀밭에서의 오찬>에서는 중산층이 피크닉을 즐기러 가는 센 강변에서 여인이 벗은 몸으로 관람자를 바라보게 했다. 현대판 누드는 수줍어하는 모습도 아니고 비밀스러운 장소의 누드도 아니다. 마네가 이 두 그림을 통해서 누드의 현대화를 이룩한 것이다.

1863년이 마네에 의해 모더니즘이 개시된 해였다면 인상주의전이 열린 1874년은 모더니즘의 회화 혁명이 처음 일어난 해라고 할 수 있다. 전시회를 관람한 평론가 루이 르루아가 여기에 참여한 예술가들을 가리켜 인상주의 예술가들이라고 지칭했으므로 모더니즘의 첫 사조ism가 탄생하게 되었다. 르루아가 모네의 <인상, 일출>을 보고 인상이란 말에 주의란 개념을 붙인 것이다.

마네는 모더니즘을 연 사람으로, 모네는 최초의 회화 혁명을 체계적으로 일으킨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두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면 미술에서의 모더니즘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바로 여기에 두 사람의 중요성이 있다.



저자 l 김광우

저자 김광우는 뉴욕 시티컬리지와 포담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예술의 중심지 뉴욕에서 많은 예술을 접하면서 현대미술과 비평에 관심을 가져왔다. 뉴욕미술 패러다임의 중요성을 알리는 대가와 친구들 시리즈를 소개하는 1997년부터 국내에서 본격적인 미술비평과 저술활동을 해왔다. 그가 소개하는 작가들은 어려운 현실 속에서 갈등하며 거기서 피어난 작품 이야기를 담고 있어 예술이 우리의 삶과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피부로 느끼게 해준다.

저서로 대가와 친구들 『폴록과 친구들』, 『워홀과 친구들』, 『뒤샹과 친구들』을 비롯하여 『백남준 VS 앤디 워홀』, 『프랑스미술 500년』, 아티스트 커플 시리즈가 있다. 역서로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와 『앤디 워홀 타임캡슐』, 『컨템퍼러리 아트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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