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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20. 2017

09. 아버지이자 스승이기를, 라이프치히 시대

<클래식에서 리더의 언어를 배우다>



음악을 과학으로 만들다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
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1723년, 바흐는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로 취임했다. 이곳으로 오기 위해 바흐는 두 차례에 걸친 오디션을 통과해야 했다. 바흐가 라이프치히를 택한 이유는 우선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였다. 라이프치히는 교통의 요지이자 대학이 있는 도시여서 아들들의 장래를 위해 정착을 결심했던 것이다. 라이프치히에 정착한 바흐는 죽을 때까지 27년 동안 묵묵히 음악가의 삶을 살았다.

교회 음악가로 돌아온 바흐는 취임 초기인 1723년부터 1729년까지 무려 140여 곡의 칸타타를 써냈다. 노쇠한 바흐는 시력이 급격히 나빠져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실명했다. 그가 흐려지는 시력에도 끝까지 펜을 놓지 않고자 했던 작품은 미완성 유작으로 남겨진 <푸가의 기법(Die Kunst der Fuge, BWV 1080)>이다. 푸가는 일종의 돌림노래로, 하나의 멜로디가 흐르는 와중에 다음 멜로디가 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두 멜로디가 동시에 연주되면서 어우러지는데 이 영역이 대위법의 핵심이다. <푸가의 기법>은 리듬 변형까지 더해지면서 음률의 조화를 보여주는데, 대위법의 초호화 버전이라고 할 만큼 최고의 기법들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바흐가 알토 파트에서 자신의 이름 BACH(시b-라-도-시)를 대선율로 적고 이야기를 펼치려던 지점에서 그의 펜은 영원히 멈추었다. 훗날 둘째 아들 카를 바흐가 완성했으나, 오늘날의 대부분의 연주자들은 바흐가 적은 음표까지만 연주한다.

<푸가의 기법> 마지막 부분


라이프치히에서 머물던 시기에 작곡한 대작 중 하나는 <마태 수난곡(Matthäus-Passion, BWV 244)>이다. 이 작품은 완전히 잊힌 채 방치되던 중 멘델스존에 의해 부활했다.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이끌던 지휘자 겸 작곡가 멘델스존은 우연히 범상치 않은 악보를 발견하고 2년여 동안 공들여 리허설을 했다. 1829년, 다시금 <마태 수난곡>이 울려 퍼지자 관객들은 어느 무명 작곡가의 작품에 경이로움과 존경을 표시하며 열광했다. <마태 수난곡>은, 아니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생을 마감한 지 80년이 지난 어느 날, 그렇게 부활했다.

바흐 발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가 일깨워주는 것은 그의 작품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넘어서 ‘노력의 가치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정리된 바흐의 악보는 BWV 1127번까지 기록하고 있다. 하루 한 곡씩 듣는다 해도 꼬박 3년이 걸리는 분량이다. 그는 교회 음악가로서 써야 했던 칸타타, 모테토, 미사곡, 송가, 수난곡, 오라토리오, 4성부 합창, 노래 및 아리아 등을 모두 남겼다. 이뿐만 아니라 당대의 모든 악기, 즉 오르간·하프시코드·류트·바이올린·첼로·플루트·체임버, 앙상블 및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모음곡·소나타·푸가 등 자신의 시대에 가능했던 모든 음악의 형식을 작품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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