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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21. 2017

02. 모더니즘의 자유 <풀밭에서의 오찬>

<마네와 모네>



낙선전의 스타 마네

마네는 1862-63년에 악명 높은 누드 <풀밭에서의 오찬>과 <올랭피아>를 그렸다. 이 그림들을 그리기 얼마 전 마네는 센 강가에서 일광욕하는 여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도 누드를 그려야 할 것 같아. 음, 내가 누드를 보여주겠어!”라고 말했다.

<풀밭에서의 오찬>은 스페인 의상을 입은 두 중년 신사와 나신의 여인이 준비해온 점심 식사를 풀밭 위에 펼쳐놓고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주말이면 중산층이 센 강가로 피크닉을 가서 오찬을 즐기는 건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그림처럼 나신의 여인이 있는 경우는 없었다. 피크닉 장소에 여인이 누드로 앉아 있다는 것은 아주 과격한 회화적 시도였으며 그런 모습을 본 관람자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평론가들은 고전적인 주제의 누드를 평범한 여인에게 적용한 데 놀랐다.

그림 속 여인은 마네가 아끼던 모델 빅토린 뫼랑이다. 마네는 화실에서 뫼랑의 누드를 그린 후 피크닉 장소에 있는 것처럼 삽입했다. 그리고 두 남자는 마네의 동생과 여동생의 미래의 남편이었다. 마네는 르네상스의 조르조네에서 시작되어 프랑스의 와토, 부셰, 코로 등에게 친근해진 고전적 주제를 현대화하여 나타내려고 했다. 이 그림에 쏟아질 비난을 마네는 상상조차 못했다. 황제가 “뻔뻔스러운 그림”이라고 비난하자 사람들은 문제의 그림을 보기 위해 주말이면 전시장 밖에 줄을 섰다. 평론가 아메르통도 황제의 말에 동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철면피 같은 프랑스 예술가 마네의 그림은 조르조네의 <전원의 합주>를 프랑스의 사실주의로 해석한 것이다. 비록 여인들이 벌거벗었지만 조르조네의 그림은 아름다운 색상으로 용서받을 만했다. 그러나 마네의 그림에는 사내들의 복장이 아주 해괴망측하고, 다른 여인은 슈미즈 차림으로 냇가에서 나오고 있으며, 두 사내는 바보 같은 눈짓을 한다.


마네, <풀밭에서의 오찬(피크닉)>, 1863, 유화, 208×264.5cm _누드뿐 아니라 앞의 세 사람의 구성, 옆으로 쓰러진 바구니, 정물 등 부분들의 묘사가 뛰어나다. 


그러나 <풀밭에서의 오찬>은 에밀 졸라가 호평한 후부터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이런, 이 무슨 외설이란 말인가! 장성한 두 남자 사이에 벌거벗은 채 앉아 있는 여인이라니! … 사람들은 화가가 뚜렷한 화면 공간의 배분과 가파른 대비 효과를 위해 인물의 구성에서 외설적이고 음란한 분위기를 연출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풀밭에서의 오찬이 아니라, 강렬하고도 세련되게 표현한 전반적인 풍경이다. 전경은 대담하면서도 견고하며 배경은 부드럽고 경쾌하다. 커다란 빛을 듬뿍 받고 있는 듯한 살색의 이미지. 여기에 표현된 모든 것은 단순하면서도 정확하다.

<풀밭에서의 오찬>과 <올랭피아>는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의 라파엘로풍의 <파리스의 심판>과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현대적 감각으로 해석한 것들이다.

                                (왼쪽) 마네, <풀밭에서의 오찬>                     (오른쪽)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 <파리스의 심판>


마네의 그림 속 나신의 여인은 관람자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과거 누드화를 그린 화가들은 모델이 다른 곳을 응시하게 하여 관람자가 누드를 제삼자를 바라보듯 거리낌없이 바라볼 수 있도록 했지만, 마네는 모델을 이인칭으로 그려서 관람자를 직접 바라보게 했다. 이는 그림과 관람자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설정한 것으로 관람자와 그림이 더욱 친숙하게 되었으며, 관람자가 주제를 자신들의 시대적 감각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는 것으로 작품 감상의 자유를 느끼게 했다. 이는 과거에는 누릴 수 없던 모더니즘의 자유였다. 그러나 드가는 마네에게 새로운 시도가 없다고 평했다.

마네는 어떤 곳에서도 영감을 얻으며, 모네, 피사로, 그리고 내게서조차 구한다. 마네는 붓을 놀랄 만하게 사용하지만 그는 자신이 받은 영감을 새롭게 하지는 못한다! 그에게는 시도하는 요소가 없고 … 벨라스케스와 프란스 할스의 회화법이 아니면 어떠한 그림도 그리지 못한다. 난 마네에게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아주 섬세하게 그림을 그리는 지성인으로 만족하라고 말해주었다.

마네는 유럽의 고전주의 회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조르조네와 티치아노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들의 화법을 연구했고 그들 이전의 유럽 회화는 야만인들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전주의 회화에 대한 마네의 관심과 그러한 방법의 응용이 드가의 눈에는 마네가 그러한 방법에 의존하여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풀밭에서의 오찬>은 1863년 국전에 출품했으나 낙선했다. 당시 국전에는 3점까지 응모할 수 있었는데 마네는 <풀밭에서의 오찬>과 다른 2점을 출품했다. 마네는 국전에 출품하면서 들라크루아를 방문하여 심사위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해줄 것을 부탁했지만 들라크루아는 너무 늙은 데다 병중이었으므로 심사위원들을 만날 수 없었다. 들라크루아는 그해 타계했다. 당시 국전에 출품한 화가는 약 3천 명, 그림은 5천 점가량이었으며 그 가운데 2천 점이 받아들여졌지만 마네의 그림은 3점 모두 낙선했다. 심사위원들 가운데는 쿠튀르가 있었는데 스승이 제자의 그림을 배척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프랑스에서는 국전이 예술가들에게 유일한 등용문이었다. 국전 심사위원들은 대부분 아카데미즘을 추구하던 예술가들이었고 전통을 보존하려는 보수주의의 성향이 농후했다. 심사위원들은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작품과 인도주의적이고 객관적이며 우주적인 내용을 시사하는 작품을 선호했고 작품은 후세의 교육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진보주의 예술가들은 국전의 심사 기준에 늘 불만이 많았으며 1850년대부터는 아예 국전에 출품하지 않는 예술가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예술가들의 불만은 해가 갈수록 더해갔고 마침내 황제에게 탄원하기에 이르렀다. 나폴레옹 3세는 그들의 불만을 받아들여 국전에서 낙선한 예술가들이 자기들의 작품을 소개할 수 있도록 낙선전을 개최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는 1863년의 일로 낙선전은 국전을 통하지 않고서도 파리의 미술계에 자신을 알릴 수 있는 예술가들의 등용문이 되었다.

<풀밭에서의 오찬>도 낙선전을 통해 파리 시민들에게 소개되었다. 이때 낙선전에 참여한 화가들로는 카미유 피사로, 아르망 기요맹, 앙리 판탱라투르, 제임스 휘슬러, 폴 세잔 등이 있다. 낙선전은 국전 개막 2주 후 5월 15일에 매우 큰 규모로 개최되었는데 12개의 화랑에 1천 2백 점이 소개되었다. 입장료는 1프랑이었는데 무려 7천 명이 낙선전을 관람했다. 사람들은 국전에서 인정받지 못한 작품들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곳을 찾았다. 어떤 관람자는 말했다.

낙선전이 열리기 전까지 우리는 나쁜 회화가 어떤 것인지를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알게 되었다. 우리는 보고 만지고 확인했다.

마네를 잘 이해한 평론가 자샤리 아스트뤼크는 「1863년 살롱」이라는 글을 신문에 기고했다.

마네! 이 시대의 위대한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 나는 그가 이번 국전에서 월계수를 받지 못했음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 마네는 총명하고, 영감을 가졌으며, 힘찬 그림을 그리고, 놀라운 주제를 사용한다. 마네의 그림에는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요소가 있다.

마네는 낙선전의 스타로 부상했다. <풀밭에서의 오찬>은 젊은 세잔의 마음을 뒤흔들었는데 그는 1871년에 동일한 제목으로 피크닉 장면을 그렸다. 젊은 세잔은 이 시기에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매우 과격한 그림을 그렸는데, 이 그림에서 나무 위로 곧게 솟은 것과 그 아래 세로로 같은 선상에 있는 세워진 포도주 병은 남자의 성기를 상징한다. 마네의 <풀밭에서의 오찬>과 달리 세잔은 환상의 누드 속에서 성적 욕구를 느끼는 남자의 모습을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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