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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Jul 11. 2016

02. 아이를 살리는 공부를 시켜라.

<내 아이를 위한 인문학 교육법>

 

인문학(人文學)에서 ‘인’은 사람 인(人)이다. 사람에 관해 공부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을 찾는 것이 인문학이다. 따라서 인문학 교육은 사람 중심의 교육, 사람을 살리는 교육이다. 그런데 이 ‘사람’에는 아이만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부모도 들어가 있고 선생님도 들어가 있다. 많은 분이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이 책을 읽고 있겠지만, 부모가 잘살지 않고 교사가 잘살지 않으면 아이 역시 잘살 수 없다. 부모, 아이, 교사 모두가 함께 성장해서 앞으로 나아갈 때 아이 교육도 잘 이루어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냥 뒤따라오는 것이 성적이고 돈이고 좋은 직업이어야 한다.
     
우리는 아이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사람으로 대하고 사람 취급하고 있는가? 혹시 아이를 공부하는 기계로 취급하고 있지는 않은가? 당연히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무엇으로 대하느냐고 반문하겠지만,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나는 아이가 어떻게 할 때 기뻐하는가? 아이가 좋은 성적을 받으면 기뻐하며 칭찬하고, 성적이 떨어지면 실망해서 야단을 친다면 이것은 아이를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다. 기계가 잘 돌아가면 기뻐하고, 기계가 삐거덕거리며 잘 돌지 않으면 성질을 내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다.
     
중학교 때 일이 생각난다. 나는 소위 명문 중학교에 다녔는데 모의고사 성적이 떨어지면 1점당 5대씩 맞았다. 시험결과 발표가 나는 날이면 아이들이 복도에 일렬로 쭉 줄을 서고 선생님은 몽둥이를 들고 근엄한 표정으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선생님 옆에 작은 냉장고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원비디, 박카스가 일렬로 세워져 있었다. 선생님은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고 출석 번호를 불렀다. 죄수를 부르듯이 이름이 아니라 번호를 불렀다.
     
“1번 들어와. 2점 떨어졌네. 10대. 붙어.” 1번 친구가 벽에 붙으면 몽둥이세례가 시작됐다. 매 맞는 아이도 밖에서 그 소리를 듣는 아이들도 두려움에 떨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이야 이런 문화가 사라졌지만, 아이들을 공부 기계 취급하는 면에서는 달라진 것이 없다. 오히려 온갖 미사여구와 교묘한 장치로 아이들을 더 꼼짝 못 하게 하는 현실인 것 같다. 현재 우리 아이들은 하루 24시간 부모와 교사의 감시 속에서 살면서 잠시 잠깐 한눈을 파는 것도 허락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중학교 때는 선생님께 두들겨 맞아도 친구들과 놀면서 풀고 선생님 욕을 하면서 공감대를 형성했지만, 요즘 아이들은 그렇지 못하다. 친구와 경쟁 관계에 있으므로 편하게 자기 고민을 이야기하며 놀기 힘들다. 강남 아이들이 가장 괴로워하는 것 중 하나가 친구와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이다. 10대 시절에는 친구 관계가 최고인데 많은 엄마가 “친구와 놀 시간에 공부해라” “저 아이는 너와 경쟁자야” “그 친구랑 놀면 다른 아이가 좋은 점수 받아”라며 아이들의 인간관계를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또 성적이 떨어지면 때리지는 않더라도, 핸드폰을 빼앗고 초상이나 난 것처럼 집안 전체가 우울함에 빠진다. 이럴 때 아이들은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까? 이런 상황에서 나는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까? 아니다. ‘나를 기계로 대하는구나!’ ‘나를 공부하는 노예로 대하는구나!’ 생각하게 된다. 이런 감정이 깊어지면 자살 충동을 느끼게 된다. 실제로 우리나라 청소년의 상당수가 자살 충동에 시달린다는 조사 결과도 있었다. 엄마·아빠가 공부 말고는 나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는데 더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열등감에 시달리다가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 최근 언론 보도를 보면 우리나라에서 성범죄를 가장 많이 저지른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들이다. 판검사, 교수 등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서 돈 잘 버는 직업 갖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결국은 내면의 허전함을 이기지 못해 성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사람 취급받지 못하고 오로지 성공을 위한 도구로만 취급되었기 때문에 자신을 괴롭히다 못해 타인을 폭행하고 사회도 망하게 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인지 모른다. 어쩌면 그들이 세상을 향해 복수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아이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게 되었을까? 그것은 우리가 부모님께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길거리에서 막노동하는 사람을 보면 부모님이 뭐라고 했는가? 많은 분이 “너 공부 못하면 저렇게 돼”라는 말을 듣지 않았을까 싶다. 굉장히 가슴 아픈 이야기이다. 부모가 자신을 사람 취급하지 않고 자기가 가진 재산과 직업으로 판단하니까 다른 사람도 그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먹고사는 것이 최대 명제였다. 생존이 걸려 있는 만큼 사람보다는 돈을 우선시하는 삶을 살았다. 이것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 지금의 30, 40대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부모님 세대의 논리가 어느 정도 통했는데 이제 그렇지 않다. 요새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풍족하게 자란다. 태어나자마자 자동차를 타고 배불리 먹고 좋은 시설에서 공부한다. 물론 아직도 경제적으로 힘들게 사는 이웃들이 있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예전보다 풍족해진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전의 생존 시스템이 먹히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잘 먹고 잘살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라는 논리는 우리 부모와 우리 세대에서는 통했지만,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에는 맞지 않는다. 이런 변화는 우리 사회에서 이미 감지되고 있다. 예전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기업들이 지금은 윤리경영을 내세우며 봉사와 기부를 하고 있다(진정성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기업의 경영도 사람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도 예전처럼 국민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비리를 저지르고 말 한마디 잘못하면 혼쭐이 나는 시대이다. 이 시대에 우리 아이들에게 맞는 교육은 ‘사람 중심’이어야 한다. 아이가 사람으로서 존중받고 공부하면서 인간적인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인문학 교육이 절실하다. 아이들에게 소크라테스, 플라톤을 가르치는 것이 어렵고 거창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 기반은 ‘사람’이다. 인문학 교육은 결국 사람 교육이고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교육이다. 이 관점만 잘 잡고 있으면 어렵지 않게 인문학 교육을 할 수 있다.
     
인문학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당장 입시 위주의 교육을 접고 인문학 교육을 시작하겠다는 학부모들은 많지 않다. ‘사람 중심 교육도 좋지만, 인문학 공부만 하다가 성적이 떨어져 직업도 못 갖고 비참하게 살면 그게 사람답게 사는 것이냐’ ‘최소한 먹고살 길은 마련해야 하지 않느냐’며 불안해하는 분들도 많다. 우리나라와 같은 무한경쟁 사회에서 이런 불안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사람 중심 교육을 했을 때 아이들은 스스로 공부한다. 공부는 특출나게 잘하지 못할지라도 스스로 자기 길을 찾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다큐멘터리를 통해 여러 번 방영된 핀란드의 사례를 보면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알려진 대로 핀란드 교육은 지극히 사람 중심이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은 항상 아이들과 대화하고 시험을 따로 보지 않는다. 아이들을 성적으로 평가하거나 등수를 매기지도 않는다. 학교 가면 아이들은 대화하고 놀러 다니고 예술작품 감상하고 우리가 보기에는 공부도 별로 하지 않는다.
     
독일도 그렇다. 박성숙의 『독일 교육 이야기』에 따르면 우리는 학교 가기 전에 한글 다 떼고 구구단 다 외우고 들어가지만, 독일은 학교에서 구구단만 1년 동안 배운다고 한다. 왜 그럴까? 그냥 외우는 교육은 사람을 위한 교육이 아니고 성적을 위한 교육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선진국의 교육 방식이다. 그렇다고 학업 성취도가 뒤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핀란드와 독일이 우리보다 학업 성취도가 더 높고 물질적으로도 더 풍요하다. 이 사례가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사람 중심 교육으로 돌아선 나라들의 학업 성취도가 높고 경제 수준도 높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사실이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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