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와 모네>
1865년 국전에서 모네와 마네, 바지유의 작품이 함께 소개되었다. 모네의 바다 풍경 2점이 입선했고, 마네가 2년 전에 그린 <올랭피아>가 소개되었다. 하지만 마네는 모네와는 비교도 안 되는 유명화가였다. 마네는 모네와 만나기를 꺼렸는데 두 사람의 이름이 비슷해서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평론가 자샤리 아스트뤼크가 1866년 국전 이후 마네와 모네를 한 쌍으로 묶어서 언급하기 시작했으므로 두 사람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 시기에 프랑스 회화에는 놀라운 발전이 있었다. 1855년에 쿠르베가 <화가의 화실>을 그린 이후 마네의 <튈르리 공원의 음악회>(1862)를 거쳐 모네의 <정원의 여인들>(1866)까지 1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 3점을 놓고 1855년 이전의 프랑스 회화와 이후 11년 동안 달라지는 회화를 비교하면 괄목할 만한 진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과거 화가들은 눈으로 본 적이 있거나 현재 볼 수 있는 세계를 재현했고 또는 상상력에 의존해서 눈으로 볼 수 있을 듯한 세계를 표현했다. 그러나 세 화가는 자기들이 보고 싶어 하는 세계를 그리면서 그러한 세계로 관람자가 직접 들어올 것을 요구했다.
1863년의 낙선전에서 마네의 <풀밭에서의 오찬>을 본 모네는 동일한 주제로 그와 대적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가 마네의 유명한 그림과 같은 제목으로 그린 것은 자신을 대가와 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모네의 의도는 마네의 <풀밭에서의 오찬>보다 자연스러운 장면을 그리는 것이었다.
1865년 봄 마네와 나란히 작품을 선보인 국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모네는 다시 샤이로 갔다. 그곳을 작품의 배경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바지유에게 <풀밭에서의 오찬>이란 제목으로 방대한 크기(370×550cm)의 유화를 그릴 계획을 밝히고 “자네가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네. 인물들 뒤에 깔 배경을 정하는데, 자네 조언이 필요하네”라고 했다. 여름에는 “내 작업을 돕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나. 꼭 와서 몇몇 인물들의 포즈를 잡아 주어야겠어. 자네 도움이 없다면 이 작품은 실패하고 말 걸세. 그러니 약속을 지키기 바라네”라고 바지유를 재촉했다.
모네는 예비 스케치에 들어갔다. 습작1, 2에 1866년이라고 적었지만 1865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샤이에서 한 예비 스케치를 가을에 파리의 화실에서 채색했다. 기념비적인 이 그림은 사진을 참조하여 그린 것 같은데 12명이 등장하는 피크닉 장면이다. 모네는 사람 하나하나를 습작으로 연구하면서 그림 전체에 대한 구성을 시도했는데, 중앙에 왼팔을 내밀어 접시를 권하는 여인의 모습만이 예외로 그녀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행위를 하는 게 아니라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대화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포즈를 취하는 것도 아니며 서로 시선을 주고받는 것도 아니다. 피크닉을 위해 마련한 음식이 그림 중앙에 펼쳐진 것이 전부다.
그림에는 빛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여기에서는 빛이 그림을 과격하게 보이도록 했다. 빛이 나무 아래로 쏟아졌고, 따라서 명암이 분명하게 그림 전체에 나타났다. 모네의 관심은 모델들이 아니라 빛이 사람과 자연에 작용하는 데 있었다. 빛은 나뭇잎에 닿아 푸른색과 금빛으로 아롱졌다. 그는 빛이 사람들의 머리와 어깨에 닿아 눈부시게 나타나는 걸 강조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작업은 미완성으로 그쳤다.
쿠르베가 그림을 비평하고 돌아간 뒤 모네는 1866년 국전 출품을 포기한 것 같다. 쿠르베는 너무 크게 구도를 잡은 그림이라서 야외 풍경화라고 하기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림의 남자들 대부분은 바지유를 모델로 한 것이며 중앙에 앉아 있는 수염 난 남자는 쿠르베로 보인다. <풀밭에서의 오찬>에 여인이 여러 명 등장하지만 이는 모두 카미유 한 사람을 모델로 한 것이다. 열여덟 살의 카미유는 모네의 애인이었다. 훗날 왜 단 두 명의 모델로 여러 사람을 묘사했느냐는 질문에 모네는 두 사람밖에 모델을 구할 수 없었고, 돈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개개인의 인물에 대한 성격을 나타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으로 충분했던 것 같았다. 부분 습작들을 보면 바지유의 수염 난 모습과 수염을 깎은 모습 모두를 볼 수 있다.
1920년에 찍은 모네의 화실 사진1을 보면 <풀밭에서의 오찬>이 벽에 걸려있다.
이 그림은 오랫동안 방치했으므로 왼쪽과 오른쪽 부분이 손상되어 그 부분들을 잘라냈다고 한다. 이 그림은 모네가 1926년 타계할 때 지베르니의 화실에 있었으며 크기가 248×244cm였다.
1863년 부활절 기간에 샤이에 온 적이 있는 모네는 1865년 봄 다시 이곳으로 와서 나무 사이로 새어드는 빛을 묘사하고 인물들을 배치했다. 마네에 비하 면 좀 더 자연주의의 그림이 되었다. 모네는 이 그림의 손상된 부 분을 잘라내고 지베르니 집에 보관했다가 1957년 인상파 미술관 에 소장되었다.
그는 이것을 1920년 80회 생일을 맞아 자신을 방문한 사람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난 마네의 그림을 따라서 그렸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그러했듯 야외에서 그림을 구성한 후 화실에서 완성했다. 난 이 그림을 아주 좋아하는데 아직 미완성이며 많이 상해 있다. 언젠가 집주인에게 방의 보증금 대신 이 그림을 준 적이 있었는데 집주인은 캔버스를 둘둘 말아 지하실에 처박아 두었다. 돈이 생겼을 때 이 그림을 도로 찾아왔지만 그림은 조금 상한 상태였다.
1866년에 모네가 동일한 주제로 다시 그린 그림을 보면 원래 그림 중앙 부분을 그대로 보존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