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굿북 Nov 22. 2017

03. 모네가 그린 <풀밭에서의 오찬>

<마네와 모네>



1865년 국전에서 모네와 마네, 바지유의 작품이 함께 소개되었다. 모네의 바다 풍경 2점이 입선했고, 마네가 2년 전에 그린 <올랭피아>가 소개되었다. 하지만 마네는 모네와는 비교도 안 되는 유명화가였다. 마네는 모네와 만나기를 꺼렸는데 두 사람의 이름이 비슷해서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평론가 자샤리 아스트뤼크가 1866년 국전 이후 마네와 모네를 한 쌍으로 묶어서 언급하기 시작했으므로 두 사람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 시기에 프랑스 회화에는 놀라운 발전이 있었다. 1855년에 쿠르베가 <화가의 화실>을 그린 이후 마네의 <튈르리 공원의 음악회>(1862)를 거쳐 모네의 <정원의 여인들>(1866)까지 1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 3점을 놓고 1855년 이전의 프랑스 회화와 이후 11년 동안 달라지는 회화를 비교하면 괄목할 만한 진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과거 화가들은 눈으로 본 적이 있거나 현재 볼 수 있는 세계를 재현했고 또는 상상력에 의존해서 눈으로 볼 수 있을 듯한 세계를 표현했다. 그러나 세 화가는 자기들이 보고 싶어 하는 세계를 그리면서 그러한 세계로 관람자가 직접 들어올 것을 요구했다.

1863년의 낙선전에서 마네의 <풀밭에서의 오찬>을 본 모네는 동일한 주제로 그와 대적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가 마네의 유명한 그림과 같은 제목으로 그린 것은 자신을 대가와 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모네의 의도는 마네의 <풀밭에서의 오찬>보다 자연스러운 장면을 그리는 것이었다.

1865년 봄 마네와 나란히 작품을 선보인 국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모네는 다시 샤이로 갔다. 그곳을 작품의 배경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모네, <퐁텐블로 숲 속에 있는 샤이의 길>, 1865, 유화, 97×130.5cm


그는 바지유에게 <풀밭에서의 오찬>이란 제목으로 방대한 크기(370×550cm)의 유화를 그릴 계획을 밝히고 “자네가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네. 인물들 뒤에 깔 배경을 정하는데, 자네 조언이 필요하네”라고 했다. 여름에는 “내 작업을 돕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나. 꼭 와서 몇몇 인물들의 포즈를 잡아 주어야겠어. 자네 도움이 없다면 이 작품은 실패하고 말 걸세. 그러니 약속을 지키기 바라네”라고 바지유를 재촉했다.

모네는 예비 스케치에 들어갔다. 습작1, 2에 1866년이라고 적었지만 1865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샤이에서 한 예비 스케치를 가을에 파리의 화실에서 채색했다. 기념비적인 이 그림은 사진을 참조하여 그린 것 같은데 12명이 등장하는 피크닉 장면이다. 모네는 사람 하나하나를 습작으로 연구하면서 그림 전체에 대한 구성을 시도했는데, 중앙에 왼팔을 내밀어 접시를 권하는 여인의 모습만이 예외로 그녀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행위를 하는 게 아니라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대화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포즈를 취하는 것도 아니며 서로 시선을 주고받는 것도 아니다. 피크닉을 위해 마련한 음식이 그림 중앙에 펼쳐진 것이 전부다.


 모네, <풀밭에서의 오찬>을 위한 습작, 1865, 유화


그림에는 빛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여기에서는 빛이 그림을 과격하게 보이도록 했다. 빛이 나무 아래로 쏟아졌고, 따라서 명암이 분명하게 그림 전체에 나타났다. 모네의 관심은 모델들이 아니라 빛이 사람과 자연에 작용하는 데 있었다. 빛은 나뭇잎에 닿아 푸른색과 금빛으로 아롱졌다. 그는 빛이 사람들의 머리와 어깨에 닿아 눈부시게 나타나는 걸 강조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작업은 미완성으로 그쳤다.

쿠르베가 그림을 비평하고 돌아간 뒤 모네는 1866년 국전 출품을 포기한 것 같다. 쿠르베는 너무 크게 구도를 잡은 그림이라서 야외 풍경화라고 하기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림의 남자들 대부분은 바지유를 모델로 한 것이며 중앙에 앉아 있는 수염 난 남자는 쿠르베로 보인다. <풀밭에서의 오찬>에 여인이 여러 명 등장하지만 이는 모두 카미유 한 사람을 모델로 한 것이다. 열여덟 살의 카미유는 모네의 애인이었다. 훗날 왜 단 두 명의 모델로 여러 사람을 묘사했느냐는 질문에 모네는 두 사람밖에 모델을 구할 수 없었고, 돈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개개인의 인물에 대한 성격을 나타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으로 충분했던 것 같았다. 부분 습작들을 보면 바지유의 수염 난 모습과 수염을 깎은 모습 모두를 볼 수 있다.

1920년에 찍은 모네의 화실 사진1을 보면 <풀밭에서의 오찬>이 벽에 걸려있다.

1 모네가 자신의 화실에 있는 <풀밭에서의 오찬>을 가리키고 있다.


이 그림은 오랫동안 방치했으므로 왼쪽과 오른쪽 부분이 손상되어 그 부분들을 잘라냈다고 한다. 이 그림은 모네가 1926년 타계할 때 지베르니의 화실에 있었으며 크기가 248×244cm였다.

모네, <풀밭에서의 오찬>, 1865-66, 유화, 418×367cm _스 물다섯 살의 모네의 야심이 담긴 작품이다.

1863년 부활절 기간에 샤이에 온 적이 있는 모네는 1865년 봄 다시 이곳으로 와서 나무 사이로 새어드는 빛을 묘사하고 인물들을 배치했다. 마네에 비하 면 좀 더 자연주의의 그림이 되었다. 모네는 이 그림의 손상된 부 분을 잘라내고 지베르니 집에 보관했다가 1957년 인상파 미술관 에 소장되었다.


그는 이것을 1920년 80회 생일을 맞아 자신을 방문한 사람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난 마네의 그림을 따라서 그렸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그러했듯 야외에서 그림을 구성한 후 화실에서 완성했다. 난 이 그림을 아주 좋아하는데 아직 미완성이며 많이 상해 있다. 언젠가 집주인에게 방의 보증금 대신 이 그림을 준 적이 있었는데 집주인은 캔버스를 둘둘 말아 지하실에 처박아 두었다. 돈이 생겼을 때 이 그림을 도로 찾아왔지만 그림은 조금 상한 상태였다.

1866년에 모네가 동일한 주제로 다시 그린 그림을 보면 원래 그림 중앙 부분을 그대로 보존했음을 알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01. 남을 위해 멋 낼 필요 있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