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와 모네>
전쟁이 끝나고 모네는 1871년 말 파리로 돌아왔다. 프로이센 군대가 파리를 포위하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먹을 것이 부족해 굶주림 속에 겨울을 나야 했다. 보불전쟁은 나폴레옹의 완전한 실패작으로 결국 황제의 실정이 온 프랑스 국민에게 가난을 안겨주었다. 더구나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워 나라 전체가 얼어붙은 느낌이었다. 당시 프랑스의 경제는 말이 아니었다.
모네는 파리의 호텔에 한동안 묵다가 아르장퇴유에 집을 세 얻었다. 아르장퇴유는 센 강가의 작은 동네로 파리에서 8km가량 떨어진 곳이다. 1871년 12월 21일 피사로에게 “우리는 지금 이사 때문에 정신이 없습니다”라고 쓴 편지에는 주소와 함께 ‘아르장퇴유, 생드니 항 구빈원 근처 오브리 저택’이라고 적혀있다. 이 저택의 집세는 한 해 천 프랑으로 비싼 편이었다. 이 집은 마네가 모네에게 권했던 것 같은데 마네는 이 고장에 관해 잘 알고 있었으며 강 건너에 별장을 갖고 있었다.
아르장퇴유는 1850년대부터 발전되기 시작하여 파리로부터 철로가 연결되었고 도심으로 가는 데 15분이면 충분했다. 요트 레이스로 유명한 아르장퇴유에서는 국제 요트 레이스가 펼쳐졌으며 파리 시민에게 보트 놀이 명소로 알려지기도 했다. 또 아르장퇴유는 공장들이 모여 있는 산업 지역이기도 했다. 모네가 그린 <아르장퇴유의 강변로>118에 이 고장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는데 보트와 별장이 보이고 공장의 굴뚝도 보인다.
야외에서 그린 <아르장퇴유의 요트 레이스>119, <아르장퇴유의 가을>121에서 보듯 모네는 물에 관심이 많았다.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모네 역시 이곳에서 많은 그 림을 그렸다. 1870년대를 ‘아르장퇴유의 시대’라고 할 만하다. 태양의 변화와 이에 따른 물의 반영이 순수한 색의 빛과 어우러져 모네의 분할된 붓질에 잘 나타나 있다. 모네는 보트를 타고 센 강을 오르내리며 풍경 가까이에서 빛 에 의한 물의 반영을 영롱하게 묘사했다. 그는 아르장퇴유의 가을을 묘사하면서 하늘과 물 사이에서 밝게 빛나는 집들을 그렸다.
특히 <아르장퇴유의 요트 레이스>는 동료 화가들을 경악게 했는데 완성된 그림이라기보다는 물감으로 스케치하듯 대충 그린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는 대상을 분명하게 해줄 외곽선도 형태에 대한 묘사도 없다. 요트에 탄 사람의 모습은 단번의 붓질로 완성되었을 뿐이다.
모네는 집에 있는 날이면 정원에서 카미유와 장을 모델로 풍경 속의 인물 표현법을 연구했다. <오찬>122에서 모네 가정의 화목한 한때를 엿볼 수 있다.
이 그림은 1876년에 개최된 제2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장식화>란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이 시기에 르누아르도 꽃밭을 배경으로 인물을 그렸는데 모네의 그림과 유사한 터치를 볼 수 있다. 123-125 르누아르는 모네가 정원에서 그림을 그리는 장면120과 카미유와 장을 모델로 그리기도 했다.
1872년 모네는 작품의 질과 값에서 커다란 결실을 맺고 있었다. 그해에만 50점 이상 그렸는데 이는 전에 없던 대량 생산이었다. 그중 38점이 아르장퇴유에서 그린 것들로 그가 이곳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가늠케 한다. 그는 르아브르와 루앙에서도 그림을 그렸는데 루앙에는 형 레옹이 살고 있었다. 그의 장부 기록에 의하면 레옹과 마네에게 각 1점씩 주었으며, 5점은 딜러 루이 라투세란에게 팔았고, 뒤랑뤼엘에게는 12,100프랑에 29점을 팔았다. 그해 모네의 수입이 2만4천 프랑이었으므로 뒤랑뤼엘의 비중이 절반에 이른다. 이듬해 그의 그림값은 두 배로 껑충 뛰었다. 주요 구매자인 뒤랑뤼엘이 정기적으로 구입했으며 은행가 형제 알베르와 앙리 에크 그리고 마드리드에서 마네를 만났던 테오도르 뒤레가 그의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 밖에도 아르장퇴유의 의사 조르주 드 벨리오와 오페라 가수 장바티스트 포르 그리고 귀스타브 카유보트가 그의 작품을 구입했다. 1873년 스물네 살의 카유보트는 법대를 그만두고 아카데미 보자르에 입학하여 레옹 보나로부터 회화를 수학했다. 많은 유산을 상속받은 그는 그림 그리기를 즐겼고 모네의 그림을 수집해 모네의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모네는 작품이 잘 팔리자 더 비싼 가격으로 흥정하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