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와 모네>
아르장퇴유에서 보낸 3년은 모네가 경제적·미학적으로 성공한 즐거운 시기였다. 1873년에는 자신이 즐겨 찾는 노르망디로 가서 에트르타, 생타드레스, 르아브르 등지의 풍경들을 캔버스에 담았다. <인상, 일출>126은 제작연도가 1872년으로 적혀 있지만 사실 이 시기에 그린 것이다. 그는 1869년과 1870년의 국전에 낙선하자 더 이상 작품을 출품하지 않았고, 피사로와 시슬레도 마찬가지로 국전을 포기하고 있었다.르누아르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출품했지만 성과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1867년에 모네와 바지유를 비롯한 몇몇 화가들이 그룹전을 구상했다가 경제적 이유로 무산되었는데 이제 그 안이 다시 제기되었다. 카페 게르부아에 모이는 화가들은 그룹전에 찬성했지만 국전을 고집하던 마네는 반대했다고 한다. 피사로, 드가, 르누아르가 그룹전에 큰 관심을 나타냈는데 이들 모임에서 모네가 리더 역할을 한 것 같다. 모임에는 카유보트, 부댕, 세잔도 있었다. 모네를 중심으로 모인 모임의 회원은 총 서른 명이었다. 그룹전이 또 다른 형태의 낙선전이 되지 않을까 우려한 사람도 있었지만 파리의 미술 시장에 작품을 좀 더 팔아보려는 속셈에서 동의했다.
1873년 국전이 열린 후 5월 어느 날, 모네는 화가들이 모여서 독자적으로 전시회를 열고 “새로운 회화”를 보여줄 것임을 언론에 공언했다. 모네가 중재자가 되어 협회 설립 정관을 몇 차례에 걸쳐 뜯어고친 후 1874년 1월 17일 마침내 화가, 조각가, 판화가들의 협회가 탄생했다. 이들은 ‘무명협동협회(Société Anonyme Cooperative)’라고 이름을 정하고 그룹전을 열기로 했다. 제1회 인상주의전으로 미술사에 남게 된 이 전시는 1874년 카퓌신 거리 35번지, 사진작가 펠릭스 나다르의 2층 화실에서 개최되었다. 오직 국전을 통해서만 발표하기를 원한 마네는 베르트 모리조에게도 그룹전에 참여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그녀는 드가의 권유를 받아들여 협회에 가입했다.
그룹전에는 모두 165점이 소개되었고 그중 모네가 출품한 유화는 5점에 불과했다. 카탈로그에는 65점의 작품이 실렸으며 출품 작가는 부댕, 브라크몽, 세잔, 드가, 기요맹, 에두아르 레핀, 베르트, 피사로, 르누아르, 시슬레, 카유보트 등이었다. 모네는 유화 5점과 파스텔 7점을 출품했는데 파스텔을 7점이나 전시한 것은 유화에 비해 가격이 싸서 팔기 수월하기 때문이었다. 1868년에 그린 <오찬>과 <인상, 일출>, <카퓌신 거리>130, 카미유와 장을 그린 <아르장퇴유의 양귀비 들판>131도 이때 소개되었다.
<카퓌신 거리>는 모네가 1873년 나다르의 2층 화실에서 창을 통해 내려다본 풍경을 그린 것이다. 당시 파리는 현대화가 가속화되고 있었고 거리에는 도로포장 공사가 한창이었다. <카퓌신 거리>도 사람들이 새로 포장한 도로에 나와 자축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모네는 빛에 의해 가물거리는 대기와 사람들의 움직임을 생동감 있게 묘사했는데 마치 초점을 맞추지 않고 찍은 사진처럼 사람들의 모습이 굵은 점으로 나타났다. 색을 영상 자체처럼 빛에 의해 반사되고, 부서지며, 굴절되는 것으로 사용했으며 공간색을 희석시키지 않고 형태와 공간을 환기시키는 다양한 색질을 파란색과 보라색으로 표현했다. 그 결과 색들은 고도한 광선의 투사각처럼 나타났다. 그림은 부분적으로 추상의 이미지를 나타냈으며 이러한 화법은 말년에 그릴 <수련>을 통해 완전 추상의 길을 열어 놓았다. 추상이란 사물을 덜 묘사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사물에 대한 불분명한 모네의 묘사는 논리적으로 추상으로 향하는 것을 의미했다.
전시는 4월 15일부터 5월 15일까지 열렸으며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인데, 오후 8시부터 10시까지 두 시간 연장하기도 했다. 입장료는 1프랑이었고, 카탈로그는 50상팀에 팔았다. 첫날부터 사람들의 방문이 잦았는 데 그들은 그림 앞에 서서 킬킬거리며 웃는 것이 예사였다. 어떤 사람은 전시장을 둘러본 후 화가들이 권총에 물감 튜브를 장전해 캔버스를 향해 발포하고 뻔뻔스럽게도 서명했다고 말했다.
모네가 ‘새로운 회화’를 보여주겠다고 선언했으므로 평론가들이 이 전시회에 관심을 두고 있었는데 그들은 이 반항적인 전시회를 즉각적이고도 맹렬하게 비난하면서 협회의 리더 모네를 주요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4월 25일 자 『르 샤리바리』에는 평론가 루이 르루아의 글이 실렸는데 제목이 「인상주의자들의 전시회(The Exhibition of the Impressionists)」였다. 르루아가 인상주의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인상주의라는 말은 그들의 전람회를 통해 하나의 사조로 미술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곧 영국과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르루아는 모네의 <인상, 일출>을 두고 “얼마나 자유로운가. 얼마나 쉽게 그렸는가”라고 경멸조로 적었다.
르루아는 전시회 첫날 뱅상과 함께 전시장에 왔는데 뱅상은 모네 그림 앞에 서서 “그가 여기 있었군! 여기에!”라고 소리쳤다. 카탈로그에는 <인상, 일출>이라고 적혀 있었다. 모네가 르아브르에서 안개로 흐려진 대기를 뚫고 떠오르는 태양, 어둠 속의 강에 비친 햇빛과 물의 운동을 묘사한 것이었다. 뱅상은 르누아르의 <댄서>132앞에 서더니 이렇게 말했다.
얼마나 유감스러운가! 이 화가는 색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음에도 그림을 더욱 낫게 그리지 못하다니! 댄서의 다리는 솜처럼 생겼다.
화가들은 그림값을 비교적 낮게 책정했음에도 언론의 경멸과 비난으로 경제적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인상, 일출>은 훗날 파리의 마르모탕 미술관에 소장 되었는데 전문 도둑이 침입하여 훔쳐갔다. 언론은 도둑이 일본인에게 수백만 달러를 받고 그 그림을 팔았을 거라고 짐작했다.
무명협동협회는 12월에 해산되었다가 2년 뒤 1876년에 다시 부활되어 제 2회 인상주의 전시회를 개최했다. 인상주의 전시회는 1886년까지 모두 여덟 차례에 걸쳐 개최되었는데, 여덟 차례 모두 참여한 작가는 피사로 한 사람뿐이었다. 전시회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한 이유는 드가가 주최한 제8회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조르주 쇠라의 점묘주의 그림이 각광을 받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