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굿북 Nov 28. 2017

07. 끝없이 모네를 도운 마네

<마네와 모네>



베네치아 대운하

제1회 인상주의전이 열렸던 1874년 9월 마네는 자신보다 네 살 어린 제임스 티소와 함께 베네치아로 갔다. 마네는 말라르메에게 티소가 그림을 사줄 사람을 소개해준다고 해서 그곳으로 간다고 편지했다.

아르장퇴유에 있던 모네도 베네치아로 가서 마네와 티소에 합류했고 세 사람은 커티스 부부의 영접을 받았다.

151 모네, <콘타리니 궁전, 베네치아>, 1908 , 유화, 73× 92cm

커티스는 런던에 안주하여 영국 회화에 영향을 준 미국인 예술가들 존 싱어 사전트와 헨리 제임스의 친구였다. 마네 부부는 10월 2일까지 베네치아에서 머물렀으며, 티소가 소개한 사람이 많은 그림을 사주어서 매우 즐거운 여행이 되었다.

마네는 그곳에서 스케치한 것들을 파리로 가져와 기억을 되새겨 완성했으며 <베네치아의 대운하>152는 그것들 중 한 점이었다. 마네는 왼쪽 건물을 거칠게 대충 그렸는데 모네가 30년 후에야 그릴 그림처럼 단순화했다.


152 마네, <베네치아의 대운하>, 1874, 유화, 57×48cm _마네는 베네치 아에서 인상주의 기법으로 풍경을 그 렸다. 1908년 모네도 이곳에서 그림을 그렸다.


티소는 마네의 베네치아 풍경화 중 한 점을 2천5백 프랑에 구입했다. 베르트의 말로는 그 돈은 티소에게 코끼리 비스킷 정도라면서 티소는 단번에 30만 프랑어치 그림을 판 적도 있다고 했다. 마네의 베네치아 그림 2점을 포르가 5천 프랑과 6천 프랑에 구입했고 뒤랑뤼엘도 마네의 그림을 구입했다. 당시 1천5백 프랑이 오늘날 약 960달러에 해당하므로 그림값을 어림할 수 있다.

사람들이 마네의 베네치아 그림들을 칭찬하자 모네가 빈정댔다. 야외의 화가인 모네는 자연의 섬세한 변화를 잘 알았으므로 처음 방문한 곳의 장면은 그자리에서 완성해야지 기억에 담았다가 화실에서 완성한다는 건 가능하지 않음을 지적한 것이다. 모네 자신도 스케치한 그림에 기억을 되새겨 그려봤지만 당시의 일기의 변화를 기억해서 그리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모네는 40년이 더 지난 1908년에 두 번째 아내 알리스와 다시 베네치아로 가서 그림을 완성했다. 151, 153 그의 그림은 기억을 상기하여 그릴 수 없는 순간적인 빛의 역할을 담아내는 작업의 결과였다.


153 모네, <베네치아의 대운하>, 1908, 유화, 73×92cm


모네의 그 림에서는 빛의 반사가 영롱하게 나 타나 있어 대상에 대한 관찰이 매우 치밀했음을 알게 한다. 그러나 마네 의 대충 칠한 색은 관찰에 근거했다 기보다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럴 듯한 색들로 구성했음을 알게 한다. 따라서 모네의 입장에서 볼 때 마네 의 그림은 허구의 것이었으므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가난한 제왕

모네는 1874년에 생드니가 2번지로 이사했는데 아르장퇴유의 집 근처였다. 그가 이사한 곳은 역 바로 맞은편 초록색 덧문이 있는 분홍색 집이었는데 월세가 1천4백 프랑으로 전보다 더 비쌌다. 그 집 정원이 처음 캔버스에 나타난 건 1875년이었으며 화려하게 묘사되었다. 르누아르가 모네를 가리켜 “제왕의 삶”을 살았다고 한 건 이런 이유에서다. 1873년 모네의 연수입은 2만4천 프랑이었는데 이듬해 그림 5점을 천 프랑에 팔 정도로 궁색해졌다. 돈이 생기는 대로 써버렸던 탓인데 그도 그럴 것이 새집으로 이사하면서도 하녀와 정원사를 고용했다. 화창한 날이면 모네는 카미유와 장을 대동하고 프티 젠느빌리에 근처 강둑이나 꽃이 만발한 들판으로 나들이를 가면서 생활의 여유를 잃지 않았다.

1875년부터 프랑스 경제는 더 악화되었는데 보불전쟁 이후 계속해서 나빠진 것이다. 그해 모네의 연수입은 9,765프랑으로 하락했다. 모네는 마네에게 편지했다.

사랑하는 친구 마네, 선생에게 자꾸만 도움을 청하는 절 용서하십시오. 선생이 주신 걸 다 써버리고 이제 다시 무일푼 신세가 되었습니다. 선생에게 누가 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선생이 할 수 있으시다면 최소한 40프랑을 우선 꿔주시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모네는 푸줏간과 빵집에서 더 이상 외상으로 살 수 없을 정도로 빚이 많다고 덧붙였다. 모네가 돈을 빌려 가면 아주 오래 있다 갚았지만 마네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 번에 백 프랑 혹은 천 프랑까지도 선뜻 꿔주었다. 마네는 뒤랑뤼엘에게 모네의 어려운 사정에 대해 편지했다.

그가 내게 자기 그림을 골라잡아 한 점에 백 프랑씩 10점이나 20점을 구입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봐 달라고 하더군요. 우리가 5백 프랑씩 내서 구입해주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그가 모르게 해야겠지요.

그러나 당시 뒤랑뤼엘의 형편도 좋지 않아서 모네의 그림 구매를 중단하고 있었다. 뒤랑뤼엘이 관심을 보이지 않자 마네는 동생 외젠에게 편지를 썼다.

근래 모네를 만났는데 완전히 알거지가 되었더구나. 그는 천 프랑이 꼭 필요한지 그 돈을 주면 구매자가 원하는 그림 10점을 주겠다고 한다. 네게 5백 프랑의 여유가 있다면 나와 함께 10점을 사도록 하자. 난 그것을 각각 백 프랑에 처분할 자신이 있기 때문에 돈을 곧 되찾을 수 있단다. 나에게 5백 프랑을 보내주면 가서 사도록 하마. 물론 우리가 그림을 샀다는 것을 모네가 알아서는 안 된다.

이는 마네가 화가로서의 모네의 재능을 인정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마네는 그가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기꺼이 도우려고 했다. 모네 역시 마네의 재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므로 마네가 사망한 뒤 <올랭피아>를 박물관에 소장시키는 운동을 펴기도 했다.

한편 뒤랑뤼엘은 팔지 못한 채 소장하고 있는 그림들이 너무 많아 당분간 그림을 구입할 수 없었으며 모네는 스스로 새 구매자를 물색해야 했다. 이 시기의 주요 구매자들로 오페라 가수 장바티스트 포르와 직물 상인 에르네스 오슈데가 있었다. 오슈데는 1874년 5월에 <인상, 일출>을 8백 프랑을 주고 산 열정적인 수집가였다. 뒤랑뤼엘은 경매를 통해 자신과 모네의 경제난을 한꺼번에 해결할 생각으로 1875년 3월 24일 드루오 호텔 경매장에 경매인으로 나섰다. 모네를 비롯하여 르누아르, 베르트, 시슬레가 163점의 그림을 경매에 내놓았는데 모네의 그림 20점이 비교적 낮은 가격인 그림당 2백 프랑에 입찰되었다. 1875년은 모네에게 최악의 해였다. 포르, 에밀 블레몽, 에르네스 메, 앙리 루아르, 빅토르 쇼케 등이 헐값에 모네의 그림을 구입했고, 자기 소장품의 가격을 올리기 위해 모네의 재능을 알리는 일에 앞장섰다.

1875년에 모네가 그린 그림들에는 그의 경제적 어려움이 반영된 듯 색조가 어두운 것이 특기할 만하다. 다리 아래서 노역하는 노동자들을 그린 <석탄을 내리는 남자들>154은 아르장퇴유가 산업화되는 일면을 보여준다. 수직선, 수평선, 대각선이 모두 사용된 이 그림은 모네가 그린 것들 가운데 가장 형식주의에 사로잡힌 그림이었다.

154 모네, <석탄을 내리는 남자들>, 1875, 유화


매거진의 이전글 04. 상대방의 마음을 울리는 방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