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실에서>
나는 원래 집으로 가려고 했다. 시간은 자정이었고 그들이 차에서 나를 내려놓은 곳은 숲이었다. 쭉 걸어가니 마을이 나타났고, 첫 번째 집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집주인은 두말 않고 나를 들어오라고 했다. 내가 부랑자 같은 모습을 했는데도 말이다. 나는 아내에게 전화했다.
“여보, 나야. 나 풀려났어.”
나는 택시를 부르려고 했다. 집으로 가려고. 그냥 45분 정도 더 참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라고 생각했다. 33일 동안 나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순간, 그 꿈꾸던 순간이 왔다. 내 집 문 앞에 서서 벨을 누른다. 아내가 문을 연다.
자, 이제 나는, 무엇을 할까? 그래, 울어야지, 아마도 쓰러지겠지, 아니야, 그건 안 되지, 아내의 팔이 무거워서 힘없이 떨어지겠지, 휘청거리면 내가 꽉 잡아야지…아니야, 우리는 아들 방으로 올라갈 거야, (아니면 아들이 소리를 듣고 뛰어 내려올지도 모르지) 그리고 우리 셋이서 아들 침대에 누워 (아니면 카페트 바닥에 앉아) 서로 껴안고 있겠지.
“나, 택시 불러서 타고 가면 45분 후면 도착할 거야”라고 말했으니 내가 지난 4주 반 동안 얼마나 현실 감각을 잃었는지 보여준 꼴이 되고 말았다. 아내는 나를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녀는 “우리 뉴욕으로 가게 될 거야”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집으로 가고 싶었다. 잠깐 혼란스러운 순간이 왔다. 그리고는 곧 다시 이성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그녀가 하라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30분 동안 나는 집주인에게 나에게 일어난 일을 줄줄이 이야기했다. 그때 경찰이 왔다. 아내도 같이 있었다. 하지만 포옹은 없었다. 우선 지문 채취를 위해 옷들을 벗어서 비닐봉지에 담았다. 그리고는 옆방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는데 그때 다리가 후들거렸다. 우리는 드디어 서로 껴안았다. 그날 저녁 TV 인터뷰에서 집주인은 나에게서 ‘안도’의 감정을 읽었다고 했다. 그는 ‘안도감’이라는 단어를 ‘relief’라는 영어 단어로 표현했다. 그의 말이 맞다.
차를 타고 국군병원으로 갔다. 그곳에서 야간근무 대기 중이던 여의사는 꽤 꼼꼼하게 나를 진찰했다. 그녀는 내가 몇 주 동안 지하실에 감금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분별력 상실과 혼란 상태에 빠져 있다고 진단했다. 내가 납치된 날짜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날짜가 25일이던가, 아니면 27일이던가)
의사는 특별 심리 검사가 필요한지는 모르겠고 불안 증세가 아직 진행 중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공식 소견서를 썼다. 아마도 내 모습이 실제 건강 상태보다는 양호해 보였나 보다. 하지만 나의 건강 상태는 생각한 것보다 좋지는 않았다. 나는 두 발로 제대로 서 있기가 힘들었고 말하는 것도 빠르고 다급하게 미친 듯이 쏟아냈다. 마음에 담았던 말을 전부 뱉어내려 했고 모든 것을 얘기해서 나를 괴롭힌 사람들을 찾는 데 보탬이 되려고 발버둥 쳤다.
그 사이에 아들이 경찰차를 타고 국군병원에 왔다. 지금 도착했다고 한다. 아들은 주춤거리며 내가 경찰 심문을 받던 방으로 들어왔다. 나중에 들은 바에 따르면, 아들은 나를 살아서 다시 만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최대한 많은 사랑을 담아 그를 꼭 껴안아주었다. 부자간의 상봉이라는 현실을 최대한 인식했다. 아들은 내 얼굴에 잔뜩 자란 수염을 바라보았다. 지하실에는 면도기가 없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낯설어했다.
샤워실에 들어가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봤다. 머리카락이 길게 자랐다. 4주 반 만에 처음 보는 내 얼굴이다. 우리 가족은 입원실 방을 같이 썼다. 우리 셋 다 잠들 수 없었다. “내가 실종되었다는 것을 언제 알았어?” “만약 끝까지 풀려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지난 33일 동안 쇠사슬에 묶인 채 파멸의 위기를 겪었던 기억들이 혼란스럽게 뒤엉켰다.
이름들이 불려진다. 내가 모르는 이름들이다. 경찰이 24시간 우리 집에 상주하며 식탁 아래서 쭈그리고 잠을 자고, 아들 학교 소풍에도 따라가 주고, 아내의 일도 도와주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마웠다. 지하실에 감금됐을 때 나는 집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짐작하지 못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나를 돕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다. 경찰, 가족과 친척, 친구들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나는 아직 말이 잘 안 나온다. 이것, 저것 말이 튀어나오는 정도다. 납치의 충격이 오래 계속되고 있다. 밥은 주던가? 대충 빵조각으로 때웠다. 짐작하다시피 나는 잘 걷지도 못한다. 양쪽 발에 염증이 생겨서 심하게 부어오른 상태다. 발에 쇠사슬을 한 채 이리저리 움직인 결과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은 마비되어 감각이 없어진 지 오래다. 4주 반 동안 수갑을 차고 있었던 후유증 때문이다. 의사에게는 그런 얘기는 생략했다. 그런 건 이제 사소한 문제일 뿐이니까.
왜 뉴욕에 가자는 말이 나왔을까? ‘집에 있다’라는 상황이 어떤 것인지 나는 알기나 한 걸까? 유명 연예인이 나타난 것 같은 소란스러운 상황. 일주일이 조금 지나 집에 와서 TV 녹화방송을 켰을 때야 비로소 나는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택시를 타고 집으로 직행했다면 플래시 세례를 받았을 거고 마이크가 여기저기서 달려들어 소리를 질러댔을 것이다. 그 사이에 “지금 기분이 어떠십니까?”, “범인이 누구인지 아십니까?”라는 질문들이 쏟아지면서 집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방송국에 도착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돈이고 행복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다시 도망갔을 테고, 영리한 카메라 팀은 내가 비행기에 오르는 모습을 망원렌즈로 찍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잃었던 자는 또다시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법이다.
이 책은 끔찍한 인생 에피소드라는 전제 조건이 필연적으로 따라붙으며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내 삶의 일부를 다루어 파괴된 사생활을 결국 되찾게 된다는 스토리이기도 하다. 내가 납치된 후 33일 동안 나의 가족은 어떤 의미에서 매일 대중에게 노출된 삶을 살았다. 이는 언론에 공개된 삶이라기보다 - 비록 내가 풀려나자마자 즉시 집을 계속 감시하던 기자들이 우리의 사생활을 부분적으로 침해하긴 했어도 - 우리 집이 수사본부로, 또는 지속적인 회의실로 변화한 데 따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