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실에서>
33일 동안 갇혀 지내면서 내 머리를 담장에 처박았던 납치범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가끔 있었다. 그는 영어로만 말했고 납치범들 사이에서 ‘영국인’이라고 불렸다. 우리가 처음 맞닥뜨렸던 순간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는 아주 편안한 태도로 영어로 말했다. “글쎄요, 지금이니까 하는 말이지만 그때 아주 큰 실수를 하셨어요. 복면을 찢어 그 녀석의 얼굴을 보았잖아요.”
나는 납치범의 얼굴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얼굴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냉철한 그는 이제는 얼굴이 기억나든 안 나든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대꾸했다.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으면 매사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합니다. 더구나 그 녀석은 지금 멀리 떠나 있어요.” 나를 공격한 사람이 단순히 납치만 하도록 고용된 사람인지, 아니면 얼굴이 알려져서 떠난 것인지는 얘기해주지 않았다.
저녁 8시 30분쯤 됐다. 저녁은 짧고 고요하게 지나간 것 같다. 원래는 다음 날 강연을 마칠 예정이었다. 그러고는 7시 30분에 책상에 앉을 예정이었다.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 생각이었고 잠이 잘 들도록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는 책을 한 권 가져오려 했다. 나중에 몸싸움에 과감히 덤벼든 것은 술기운 덕분이 아니었을까? 영국인은 그랬던 것 같다고 했다.
나중에 생각하니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며 동시에 어리석고 허무맹랑한 일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내가 싸움을 포기했다면 이렇게 코가 부러지고 이빨이 몇 개 나가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맞서 싸운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곧바로 항복하지 않았다. 나는 복면 괴한에게 상처를 입히려 했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는 유감스럽게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밖에도 나는 범인들이 세운 계획, (그들은 내가 복면을 보자마자 모든 시도를 포기할 것으로 예상했다) 즉 납치 건을 깔끔하게 사무적으로 처리하겠다는 계획을 망쳐놓았다. 대문 앞에 뿌려진 핏자국은 그 생생한 광경만으로도 훗날 납치범들이 누누이 강조하던 표현, 즉 “이건 단지 비즈니스일 뿐입니다”라는 말에 강력한 이의를 제기한 셈이다. 그리고 납치범들은 - 적어도 영국인은 - 상황이 이렇게 된 책임을 전부 뒤집어쓰게 된다.
어찌 됐든 납치범들은 납치 대상의 코를 부러뜨리는 불상사를 일으켜서는 안 되었으니까. 범죄란 비열하고 근본적으로 변태적이다. 범죄는 대단히 잔인한 행위이며 이런 일탈 행위는 ‘저급한 것’으로 분류된다. 그래서 범죄가 처벌받지 않으면, 대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여 고생을 면치 못하게 한다. 그래서 결국 내가 33일 동안 쇠사슬에 묶여 지하실에 갇혀 있게 되었다고? 맞다. 경찰은 나서지 말았어야 했고 돈 배달부는 자기 임무를 해냈어야 했다.
하지만 일은 그렇게 되지 않았고 덕분에 내가 두들겨 맞고 지하실에서 33일이나 지냈어야 했다. 나는 싸우지 말았어야 했다!
머리가 벽에 세게 부딪친 순간, 나는 번쩍하는 아주 밝은 섬광을 보았다. 마치 만화에서 보던 것처럼 폭발이 있었다. 별 모양의, 톱니 모양의, 알록달록한 밝은 폭발이었다. 절대로 눈부시지는 않았다. 전혀 아프지 않았다. 아프지 않은 것이 의아하지는 않았다. 그때 내 머릿속에는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바로 장 아메리의 책에 나오는 문장이다. ‘타격은 마치 마취 주사를 맞은 듯, 감각이 마비되는 효과를 발휘했다.’
오히려 내가 담장에 더 세게 부딪치지 않은 게 의아했다. 자칫하면 두개골이 박살 날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머리를 부딪친 후에 몸의 힘이 빠지고 방어 의지가 사라져 버렸다. 분명 납치범들은 나를 죽일 생각은 없었으며 나를 살아 있는 교환물로 여긴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때까지 범인의 의도를 모르고 있었다. ‘왜 머리를 더 세게 부딪치지 않았을까.’ 그 순간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고 다소 혼란스러운 감정에 휩싸였다.
누군가가 나를 번쩍 들어 올렸고 이어 말소리가 들렸다. “저항하지 마. 아무도 없어!” 또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됐어. 그만해.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요?” 그들은 접착테이프를 내 얼굴에 둘둘 감아 두 눈의 시야를 차단했다(하지만 꼼꼼히 붙이지 않아서 아래쪽은 보였다. )
입에도 접착테이프가 감겨졌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담장에 부딪친 코는 금세 부어올라서 숨쉬기가 힘들었다. 이 모든 것에 나는 정신이 몽롱해졌고 시간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붓기는 며칠이 지나서 가라앉았고 그 외의 다른 신체적 문제는 없었다. 그보다는 정신적 문제가 나타났다. 하마터면 맞아 죽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일종의 정신적 충격을 겪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격렬한 공포와 두려움에 질려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다. 나는 고분고분하게 “공기! 공기!”라고 외쳤다. 그들 중 하나가 입으로 숨을 쉬게 해주었다.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아랫입술 쪽의 접착테이프를 걷어 올려주었다. 덕분에 나는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들은 내 두 손을 뒤로 돌려 수갑을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