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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주택보급률만으로는 볼 수 없는 것

<인생 2라운드 50년>

by 더굿북

“노무현 정부 때 집값이 제일 많이 올랐어요.”

노무현 대통령의 뜻과 상관없이 현실은 그렇게 됐다는 이야기다. 강화에서 한 경제강의 때 정대영 선생(송현경제연구소/소장)이 강조했던 말이다. 청중들은 대부분 박근혜 탄핵에 앞장섰던 사람들이고, 노무현에 대한 애정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는 이런 표현이 좀 불편한 대목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명백한 현실이다.

정대영 선생의 주장은 이제 정치적 진보만으로는 안 되고, 실제 국민들을 이롭게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집 문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중요한 문제임에 틀림없다. 집 문제는 우리에게 절박한 문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내 인생에서도 역시 그렇다.

내 어릴 때 기억으로 우리 집은 거의 1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녔다. 그래서 어릴 적 친구가 없기도 하다. 그러다 중학교 1학년 때 집을 샀다. 그때 어머니가 한 말이 기억난다.
“장손이 결혼해야 하는데, 집도 없다고 하면 누가 시집오겠어요.”

어머니에게는 장손의 결혼과 집, 정말 절박한 문제였을 것이다. 아껴 모은 돈은 턱없이 모자랐을 것이고, 금융권 문턱이 높던 그 시절에 대출이란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작은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와 작은아버지 사이에 큰 다툼이 있었고, 그걸 본 나는 친척들 간의 우애가 별것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집이란 게 사람들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후로 우리는 그 집에서 수십 년을 살았다. 대전천(대전광역시에 흐르는 하천)이 바로 바라보이는 둑가의 그 작은 집에서 참 오래 살았다. 나야 대학에 들어간 이후로는 오가기만 했지만, 부모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그 집에서 살았다. 그나마 그런 작은 집이라도 있었던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대학 다닐 때 부르던 노래 중에 ‘우리에게 땅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콩도 심고 팥도 심고 고구마도 심으련만…’ 하는 노래가 있었는데, 땅을 집으로 바꿔도 딱 맞는다.

대지 28평에 건평 18평이고 방이 셋인 집이었는데, 그나마 방 하나는 세를 줬다. 또 집 앞에 10평쯤 점유해서 쓰던 땅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거기에 방 하나를 무허가로 지었고 그것도 세를 주었다. 옥상에도 역시 무허가로 방 2개를 만들어 그것도 세를 주었다. 7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친 얘기다. 지금 생각하면 생각하기 어려운 얘기다.

내가 어른이 되어서도 집은 정말 어려운 주제였다. 결혼하기 전에는 정말 허름한 자취방들을 떠돌았고, 결혼한 이후에도 2년에 한 번씩 이사하는 불편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야 했다. 그냥 이사하는 불편함과 비용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전세나 월세가 너무 많이 올라 서민들은 고통스러웠다. 심한 경우에는 전세난이라고 해서 온 나라가 그 문제로 들썩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오른 전세방 값에 비관해 자살하는 사람들 얘기가 뉴스에 나오곤 했다.

90년대 중반, 내가 대우자동차 다니던 시절에 회사 사람들과 이 얘기를 하는 자리가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렇다고 자살까지 해서야 되겠느냐”며 안타까워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돈 때문만이라면 자살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다들 무슨 뜻인가 궁금해했다.

“형님이 좀 여유가 있어요. 그 형님이 도와주면 될 거 같아요. 그런데 그게 안 돼요.”

사람들은 조용히 내 말을 들었다.

“그나마 형님은 돈을 빌려줄 생각이 있는데, 형수가 반대해요.”

사람들은 그 느낌을 이해했다. 그런 것이다. 믿었던 형님, 그런데 그 형님의 뜻과 형수의 뜻이 또 다르다. 핏줄과 처지가 다른 것이다. 형수 입장에서는 자기 자식들이 먼저 고려해야 할 대상이다. 이건 꼭 인품과 원칙만의 문제는 아니다. 형수, 다시 말해 엄마 입장에서는, 자식을 잘 돌봐야 한다는 게 유전적으로 몸에 각인되어 있다. 어찌 되었든, 믿었던 한 가닥 희망이 꺾였을 때 사람은 좌절한다. 살 낙이 사라지게 된다.

사람들은 내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로는 사람의 깊은 속을 헤아리는 것에 대해 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이것은 앞에서 말한, 어려서 본 어머니와 작은아버지의 다툼 속에서 느꼈던 것에서 비롯된 생각이었다.

사람은 단지 돈이 없다거나 일이 힘들다고 해서 죽지 않는다. 희망이 사라지고, 관계가 끊어지고, 무시당하거나 업신여김을 당했을 때 죽는다. 아니면 의로운 일을 하기 위해 죽는다. 여기서 말하는 건, 아파서 죽는 게 아닌 스스로 죽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나 아프게 되는 것도 이런 것들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꿈과 낙이 사라지면, 몸의 활력이 떨어지고 건강을 잃게 된다.

그래서 나는 집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한다. 다른 돈 문제와 마찬가지로, 집도 단지 물질로서의 집 문제로만 봐서는 안 되고, 사람의 자존이 존중되고 최소한의 존엄이 유지될 수 있는지의 문제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것도 격차와 최소한의 보장 문제이다. 또한 집의 질에 대한 사회적 능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때는 비바람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70~80년대까지만 해도 연탄보일러에 석유곤로로도 잘 살았다. 90년대까지도 가난한 노동자들은 이른바 닭장집이라는 아주 좁은 단칸방에서 견딜 수 있었다. 10평쯤 되는 방 두 칸짜리 집에서도 다섯 식구가 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시절이 달라졌고, 사람들의 눈높이가 높아졌다.

여기에는 사회의 생산능력도 크게 작용한다. 겉보기에는 격차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데, 그 밑바탕에는 ‘우리도 더 나은 집에 살 수 있는데…’ 하는 박탈감이 알게 모르게 깔려 있다. 어떤 이들은 수십억짜리 아파트에 산다. ‘그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어서 그런 좋고 비싼 집에 산다는 것을 인정할 수는 있어. 그런데 세상이(국가가 또는 정부가) 우리에게도 15평짜리 싼 임대아파트 지어줄 수 있는 거 아냐?’ 이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지 않을까?

70년대에는 15평짜리에 괜찮고 싼 임대아파트를 기대하지도 않았다. 2010년대의 대한민국은 그런 정도를 충분히 제공하고도 남을 국력(또는 생산력)이 된다고 느껴진다. 그런 기대가 실현되지 않을 때 우리는 낙담하게 된다. 그래서 지금 문재인 정부는 청년을 비롯한 주거 취약자들에게 우리 사회의 생산력과 눈높이에 맞게, 사람의 자존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주거를 싼값에 대량 공급해야 한다. 이 문제를 정책의 최우선 과제 중 하나로 삼아야 한다.

집 문제도 다른 문제와 마찬가지로 주관과 객관의 상호작용이다. 주택보급률을 단지 집 수와 세대 수만으로 볼 게 아니라,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수준의 주택이 어느 정도인지도 같이 봐야 한다. 최근에 강화군(인천시) 정책을 살펴보면서 관련한 자료를 봤는데, 2013년도의 강화 주택보급률이 120%였다. 전국 평균을 훨씬 웃도는 수치다. 그런데 문제는 낡은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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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지역도 낡은 집이 문제이긴 하지만, 강화 역시 낡은 집이 많다. 한 예로 교동면은 준공연도를 알 수 없는 주택을 포함해 30년 이상 된 주택이 70%나 됐다. 부모가 연백(황해도 연백군)에서 피난 와서 교동(강화군 교동면)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 물으니, 피난민들이 지은 집이 굉장히 많다는 것이다. 70년대 풍이라며 요즘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는 대룡시장의 가게와 집들이 그런 것들이라는 것이다.

대도시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옥탑방에도 많이 살았고, 반지하 방에서 애까지 키우며 살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집들은 세도 잘 나가지 않는다. 창고로 쓰는 곳들도 많다. 나도 살았고 친구들이 많이 살았던, 가리봉동의 닭장집들도 이제는 사라져야 한다. 최소한의 자존을 보장하는 집을 제공하기 위한 혁신적인 주택정책을 펼쳐야 한다. 지금 한국의 경제력 정도면 정책을 잘 펴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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