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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아무도 맞닥뜨리지 않았다. (마지막 회)

<지하실에서>

by 더굿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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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석방되고 일주일 후에 - 함부르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 나는 이 장면을 글로 생생하게 쓰려고 시도했다. 그 작업을 어느 정도는 해냈고 그 결과물을 지금 독자 여러분이 읽고 있다. 그렇게 나는 글을 계속 써 내려 갔다.

‘이 모든 일들이 아득히 멀리 떨어진 것 같다. 마치 휴가 때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며 휴가의 추억을 떠올리듯이. ‘잊을 수 없는’이라는 상투어가 떠오르는 순간이다. 문장들이 재구성이라는 보조수단일 뿐이라고 가볍게 여기고 싶지는 않다. 이번에는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문장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말한 문장이다. ‘바로 이거야’ 그리고 ‘이게 바로 현실이야’라는 문장이다.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소리 내지 않고 입만 벙긋하며 단어를 읊었다. 당연히 나는 현실을 믿을 수 없었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이런 일은 정체성 확인이 가능한 특질과 만날 수 있는 그 어떤 일이 아니라, 내가 아는 단 하나의 사건이다. 절대로, 어디에도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 아무리 납득이 가지 않아도 나는 담장에 머리를 부딪치고 정원에서 질질 끌려 나와서 자동차에 처박히는 꼴을 당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현실이었다. 현실은 그저 현실일 뿐이다. 다름 아닌 나 자신에게 일어난 현실이었다.’

범행 장소로 다시 돌아가서 - 대문, 철쭉 덤불, 돌에 뿌려진 피 - 그때 느낌을 알기 쉽게 설명하자. 개 한 마리가 덤불 속에서 내는 소음을 떠올리려고 했지만 바로 그 순간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납치범들은 내 눈을 꼼꼼하게 감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아래쪽을 볼 수 있었고 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거의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나는 앞장서서 가는 남자를 보았다. 그는 무언가를 들고 있었는데 이른바 경기관총이라는 것이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칼라슈니코프 자동 소총’이라고 불린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칼라슈니코프는 - 그럴 리 없지만- 마치 가짜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이 자동 소총의 그림자 윤곽은 아주 유명해서 마치 영화촬영용 소품처럼 보였다.

밤 9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각에 그들은 자동 소총을 나에게 겨누고 나를 꽁꽁 묶은 후, 정원을 가로질러 잠기지 않은 문밖으로 나와 공원까지 걸어갔다. 이 시간대에 공원에는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과 얼마든지 마주칠 수 있었다. 하지만 비현실적이게도 납치범들과 나는 공원에서 아무도 맞닥뜨리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우리 세 사람을 목격하지 못했다. 납치범들은 5~8분 정도의 길을 신속하게, 하지만 서두르지 않게 걸었다. 자동 소총을 든 남자가 앞장섰고 다른 남자는 나를 끌고 갔다. 그는 등 뒤로 수갑을 찬 내 두 손을 붙잡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앞으로 밀치지는 않았다. 나는 허둥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발을 헛디뎌 비틀거렸지만 예상과는 달리 “빨리, 빨리 가!”라고 소리치거나 초조하게 수갑을 당기거나 하지 않았다.

특히 수갑을 잡아당기지 않은 게 고마웠다. 수갑은 관절을 압박했고 특히 오른손이 그랬다. 오른손이 왜 아팠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수갑을 잘못 채워서 오른쪽 손목관절을 누르는 것 같았다. 오른손은 수갑에 쓸려 한쪽에서는 피가 났고 다른 쪽은 신경이 눌려서 오른쪽 엄지손가락과 손바닥의 볼록한 부분은 몇 달 후에도 마비된 상태였다. 나는 차에 태워지고 이어 납치범들의 은신처로 갔다. 이후 33일 동안 머물러야 할 곳이다. 수갑을 느슨하게 해달라고 여러 번 간청했지만 그들은 내 상태를 유심히 관찰하지도 않았다.

은신처로 가면서 나는 내가 어떤 유형의 납치에 해당하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몸값을 요구하는 납치인가, 아니면 정치적인 의도로 납치한 것인가? 아니면 두 가지 동기가 혼합된 납치인가? 나는 정치적 목적의 암살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10년 전에 연구소를 설립해서 나치 시대 독일군이 저지른 범죄를 날카롭게 비판했고 이는 신문에 대서특필 되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정치적인 논쟁도 있었다.

한 극우 언론매체는 우리가 고국을 험담한다는 비난을 해왔다. 그들은 나와 동료들에게 편지를 보내 왔는데 우리 연구소가 독일군의 명예를 더럽히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나를 이런 방식으로 습격하고 납치하는 짓은 할 리가 없었다. 차라리 집 앞에서 총을 쏘아 암살하는 방식이 훨씬 맞을 듯했다. 또한 어떤 종교적인 이유로 내게 사형 선고를 내린 경우라면 훨씬 야만적이고 잔인하게 나를 다루었을 것이다.

납치범들은 가만히 서 있었다. 그들은 거리 위쪽에서 있었다. 이곳은 엘베 강에서 산 위로 이어지는 지점이었다.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지나가는 자동차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차는 멈추었다. 자동차는 계곡 앞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섰고 납치범들은 거리로 나섰다. 나는 트렁크 문으로 끌려 들어가 눕혀졌다. 그런 다음, 차가 출발했다.

차 안이 약간 보였다. 내 기억으로 차는 스테이션왜건으로 소형 배달차와 비슷했고 옅은 회색인 것 같았다. 자동차 번호판은 노란색 바탕에 검은색 번호였다. 번호 앞의 두 글자는 FV 아니면 VF였다.

납치범이 무언가를 내 머리 아랫부분에 씌웠다. 담요를 둘둘 말은 것 같기도 하고 천막인 것 같기도 했다. 자동차에 탄 사람은 세 사람이었고 그중 한 명은 나였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담배를 피웠다. 납치가 성공적으로 끝나서 안도하는 것 같았다. 몇 분이 지난 후, 나는 지금까지 온 길을 기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납치 경로를 다시 한 번 재구성해보려고 했지만 생각은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기만 했다. 이렇게 말할 도리밖에 없었다. 이게 현실이라고, 이런 일이 정말로 일어났다고. 아내가 이 밤중에 나를 찾아 돌아다닐 생각에 미치자 나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아내는 언제부터 내가 없어졌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그리고 그것이 언제 확신으로 변했을까? 아내는 아들에게 뭐라고 말했을까?

그런데 이런 생각은 오른손의 찢어지는 듯한 통증으로 인해 자꾸 흐트러졌다. 통증은 구겨진 자세로 누워 있기 때문에 더 심해진 것 같았다. 참다못해 나는 자세를 바꿔 몸을 뒤집으려고 시도했고 결국 성공했다. 그렇게 나는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두세 번 자세를 바꿨는데 그때마다 통증 부위도 바뀌었다. 그러나 오른손의 통증은 어떻게 해도 가라앉지 않았다.

이런 혼돈 상태에서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되는지를 가늠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들은 나를 습격하면서 시계를 빼앗아갔다. 시간 감각을 잃은 상태였지만 차가 도착했을 때는 운전 시간을 대략 감은 잡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의 시간 감각은 실제 시간과 동떨어져 있었음을 알게 됐다.

차를 타고 간 시간이 30분은 넘고 1시간은 안 된 것 같았다. 하지만 나중에 이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판명됐다. 시간 감각은 거의 유지되지 못했던 것인가? 알 도리가 없다. 불빛도 정확하게는 구별하지 못했다. 자동차 안에는 불빛이 보였다. 어슴푸레 무슨 색인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불빛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자동차 뒷좌석에는 유리창이 아예 없거나 무언가로 가려놓은 것 같았다.

자동차는 대부분의 시간을 아우토반에서 달렸다. 내가 지금 제정신인가 의심이 든 적도 있었다. 차가 달리는 게 아니라 움직이는 철도 차량에 올라타고 있는 것 같았다. 기차 레일에서 나는 듯한 소음이 규칙적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기차를 타고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을 고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자동차가 기차에 실렸다면 내가 그를 인지했을 것이다. 며칠 뒤, 특정 아우토반은 도로가 너무 오래되어서 그런 소음이 난 것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이 기억으로 미루어보아 그런 소음이 날 만한 아우토반은 아무래도 함부르크-브레멘 구간일 거라는 판단이 섰다. 그러면 엘베 터널을 지났을 텐데 왜 전혀 소음 변화를 느끼지 못했을까(차는 실제로 엘베 터널을 지났다).

아우토반을 벗어났다. 국도를 약간 달리다가 어떤 길로 들어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불빛이 꺼졌다. 차가 멈췄다. 문이 열렸고 나는 차에서 끌어내려 졌다. 집에 들어선 뒤, 계단을 올라갔다. 집안에 들어섰고 불이 켜졌고 문을 지나 계단으로 내려갔다. 나무 계단이었다. 나는 두 눈을 꼭 감았다. 내가 두 발을 계단에 정확히 내딛거나 방향이 바뀌는 것을 예측하는 모습을 보이면 내가 약간이라도 앞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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