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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Dec 07. 2017

01. 3등인데 아쉽지 않아요?

<잘 넘어지는 연습>



2012년 런던올림픽에는 불명예스러운 꼬리표가 하나 달려 있다. 바로 ‘오심 올림픽’이다. 대한민국 선수만 무려 세 명이 오심 때문에 눈물을 흘려야 했고 그중에는 나도 포함돼 있었다. 아마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있겠지만 그때의 상황을 다시 복기하자면 이렇다.

불꽃 튀는 접전 끝에 승부가 갈리지 않아 연장전까지 이어졌던 8강전. 경기가 종료된 후 세 명의 심판은 모두 나의 판정승을 선언했다. 그런데 갑자기 심판위원장이 심판들을 불러 모아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내 자리로 돌아온 심판들은 앞서의 판정을 번복하고 다시 판정을 내렸다. 이번에는 세 명 모두 나의 패배를 선언했다. 이후 심판의 자질이 도마 위에 올랐고 각국 외신은 물론 일본 언론조차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평했을 만큼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였다.

새벽까지 경기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이 함께 울분을 터뜨렸다. 더욱이 상대가 일본 선수였기 때문에 한일 감정까지 더해져 국민들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당시 올림픽 홈페이지는 물론, 심판의 개인 블로그에까지 한국 네티즌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내 경기가 올림픽 초반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남은 경기들에 악영향을 끼칠까 하는 우려도 상당했다. 나 역시 허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 남은 경기가 있었다. 넋 놓고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패자부활전을 거쳐 동메달 결정전을 확보했다. 4강에서 떨어진 선수가 내 상대가 될 터였다. 그런데 4강전에서 스페인의 스고이 우리아르테 선수가 지는 게 아닌가. 솔직히 그 순간 나는 물론이고 코치진과 감독님도 마음속으로 동메달을 접었다.

무력한 포기가 아니라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나는 판정 번복 이후 멘탈이 흔들릴 대로 흔들렸을 뿐 아니라 이전 경기에서 부상을 당해 팔꿈치 인대까지 끊어진 상태였고 그 선수와의 상대 전적은 2전 2패로 전패를 기록하고 있었다. 게다가 8강전에서 판정을 번복한 심판위원장의 국적이 스페인이었기에 더욱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감독님은 내게 누차 강조하셨다.
“이기려면 무조건 의심 없는 한판 기술로 이겨야 한다. 판정까지 가면 진다.”

하지만 기술보다는 근력으로 경기를 이끌어가는 나의 경기 운용 방식과 부상으로 한쪽 팔밖에 쓰지 못하는 상태를 고려하면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부상만 아니어도 해볼 만했을 텐데.”
“스페인 선수만 아니면 기대를 걸 수도 있는데.”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담은 가정들이 오갔다. 그런데 주변의 우려가 커질수록 나는 오히려 생각이 차분해졌다. 경기 이후 마음이 흔들렸던 이유는 억울함이나 분노 때문이라기보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대한 당혹감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당혹감은 누그러졌다. 이제 마음을 가다듬고 상황을 바라보니,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부상을 입을 만큼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내가 동메달 결정전까지 올 수 있었을까? 아무리 스페인 선수라고 할지라도 내가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준다면 과연 상대편의 손을 들어줄 수 있을까? 이미 경험했잖아. 승패가 결정된 후에도 결과는 바뀔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결과는 모르는 거야.’

그리고 나는 사람들이 우려했던 모든 악조건을 딛고 결국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올림픽 역사상 유례가 없는 판정 번복을 당하고 인대가 끊어져 한쪽 팔밖에 쓸 수 없는 와중에도 나는 내 능력의 120퍼센트, 200퍼센트를 끌어냈다. 그래서 내게 동메달은 새드엔딩이 아니라 완벽한 해피엔딩이었다. 나는 포기하는 대신 주어진 조건과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다. 기뻤다. 진심으로 기뻤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좀 달랐던 모양이다.

“1등도 아니고 3등인데 아쉽지 않아요?”
“판정 번복만 없었으면 금메달도 딸 수 있었을 텐데요. 정말 안타깝습니다.”
“이번 결과가 특히 아까웠을 것 같은데, 심경이 어떠세요?”

‘아쉽고, 안타깝고, 아깝다.’
내가 런던올림픽 동메달리스트가 되었던 해피엔딩의 순간, 내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순간에 쏟아진 위로의 말들이었다. ‘판정의 희생양’, ‘눈물의 동메달’이 나의 소식을 알리는 헤드라인이었다. 이제 와서 말하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좀 의아했다.
‘무려 세계 3등인데, 아쉽고 안타까울 일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과에 방점을 찍어놓고 과정을 해석한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그간의 노력이 아주 다른 가치를 지니게 된다. 메달로 단순하게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노력하지 않았다 → 금메달을 땄다 = 희대의 천재
노력하지 않았다 → 동메달을 땄다(혹은 노메달) = 최선을 다하지 않은 오만한 선수
노력했다 → 금메달을 땄다 = 이 시대의 롤모델
노력했다 → 동메달을 땄다(혹은 노메달) = 비운의 선수

특히 운동선수는 결과로 평가받고 결과로 기억된다. 숙명이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올림픽에 출전하는 단 하루를 위해 십수 년을 노력한다. 계산하기 쉽게 올림픽 개최 주기로만 따져도 4년이란 시간, 즉 1460일 동안 피땀을 흘린다. 하지만 사람들은 올림픽에 출전하는 단 하루, 그 단 하루의 단 몇 분으로 그를 기억한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보고 살아야 하는 걸까? 내 모든 것을 평가받는 단 몇 분을 바라보고 살아야 할까, 아니면 단 몇 분을 위해 걸어가는 1460일을 바라보고 살아야 할까?

이 질문을 꽤 자주 스스로에게 던져왔다. 죽을힘을 다해 운동을 하고 숙소로 돌아가서도 묻곤 했다.
‘올림픽 무대에 섰을 때 후회하지 않을 만큼 오늘 하루 최선을 다했나?’
‘그렇다’라는 답이 흔쾌히 나오지 않는 날엔 다시 운동장으로 나갔다. 한 바퀴라도 더 뛰어야 비로소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 1460일 동안 단 하루, 단 몇 분을 바라보며 살다가 드디어 그 무대에 섰을 때 생각했다.
‘이제 내게 주어진 연습은 없다. 지금까지 뛰어온 1460일을 믿자.’
믿을 수 있는 건 두 발로 뛰어온 시간들뿐이었다. 그리고 3등은 1460일의 뜀박질 끝에 거둔 결과였다.

3등.
모든 경기를 통틀어 딱 한 번은 무조건 져야만 얻을 수 있는 등수.
그렇게 패배의 쓴맛을 맛본 뒤에 금빛의 영광을 놓쳤음에도 포기하지 않아야만 비로소 거머쥘 수 있는 등수.

가장 중요한 건 내가 받은 등수다. 십수 년간 울고불고, 지지고 볶고, 넘어지고 일어서고, 조르고 졸리고, 메치고 메쳐지면서 유도에만 매달린 결과물.

그래서 아깝지 않았다. 아쉽지도 않았다. 내가 흘린 땀의 무게와 쌓아온 노력의 높이가 세계 3등이라는 것이 놀랍고 또 감사할 뿐이었다. 다시 눈을 감고 떠올려봐도 나는 그 순간, 그보다 더 잘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기술들로, 내가 가진 모든 체력을 끌어 모아 경기에 임했다. 그동안 내가 흘린 땀에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했다고 자신할 수 있다.



다만 나 대신, 아니 나보다 더 아쉬워해 주고 안타까워해 준 국민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큰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시간이 많이 지나 그때의 기억이 조금 흐릿해졌을지 모르지만 나는 여전히 당신들의 울분과 눈물에 가슴이 뭉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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