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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Dec 11. 2017

03. '왜 하필 나에게만….'

<잘 넘어지는 연습>



세계 3등은 완벽한 해피엔딩이었다고 쿨하게 이야기했지만 나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초지일관 초연했던 것은 아니다. (나도 사람이니까!) 동메달 결정전을 치르고 인터뷰 장소로 향하는 동안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지나갔다. 판정 번복에 대해 최대한 언급하지 않고 선수로서 내가 펼친 경기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기자들이 판정 번복 말고 무엇을 물어보겠는가.

왜 하필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왜 하필 첫 올림픽 출전에 안 좋은 일에 휘말린 걸까?
왜 하필 일본 선수와 맞붙은 경기에서 판정이 번복된 걸까?
이런 상황에선 어떻게 대처하라고 배운 적도 없는데…….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지면 대체 뭐라고 답해야 하지?

“신이시여, 대체 왜 하필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이미 벌어진 상황 앞에서 ‘하필’이라는 단어가 나를 옥죄어왔다. 신의 의도인지, 우연에 우연이 겹쳐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올림픽 역사상 처음이었던 판정 번복은 수많은 경기들 중에서 ‘하필’ 내 경기에, 수많은 선수들 중에서 ‘하필’ 나에게만 일어난 일이었다. 모의고사처럼 예습할 수 있는 질문지도 없었고 미리 만들어진 오답노트도 없었다. 무슨 질문을 받을지는 알지만 무슨 답을 해야 할지는 모르는 답답한 상황이었다.

인터뷰장에 들어가기 전, 잠깐 동안 8강전부터 동메달을 목에 건 순간까지를 되짚어보았다. 정말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한 것이 맞는지, 어떤 외압으로 인해 판정이 뒤바뀐 것이라고 확신할 수밖에 없을 만큼 압도적으로 뛰어난 경기력을 펼쳤는지 생각해봤다.

후회 없이 최선을 다했나?
그렇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경기력을 펼쳤나?
…….

사실 경기 결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일이라고 분노했지만 정작 경기를 치른 나는 분노나 억울함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말 그대로 판정, 나와 똑같은 인간이 전체적인 경기 결과를 보고 판단해서 내리는 승패이기 때문에 결과를 번복했다고 해서 내가 이겼어야 하는 경기를 졌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전에 박태환 선수의 부당한 실격 처리가 없었다면 이만큼 모든 이목이 쏠리며 국민적 관심을 받을 만한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박태환 선수는 400미터 예선에서 출발할 때 상체를 조금 움직였다는 이유로 실격 처리되었다. 나중에 국제수영연맹에서 비디오판독을 통해 실격 처리를 취소했고 결국 결승전에서 은메달을 거머쥐었다.) 돌이켜보면 모든 상황이 그렇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고, 나는 그 소용돌이 안에서 무엇이든 선택해야 했고 견뎌야 했다. 몇 미터 되지 않는 복도를 걷는 동안 복잡했던 머릿속이 조금씩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팡! 팡!’
“조준호 선수, 여기요. 여기 좀 봐주세요.”
“지금 심경이 어떻습니까? 억울하시진 않나요?”

문을 열자 이곳저곳에서 연신 플래시가 터졌다. 8강전 결과에 대한 억울함을 내 입을 통해 듣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기자들은 지속적으로 판정 번복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나는 선수로서 최선을 다했고 경기 결과는 심판의 몫이기 때문에 결과에 승복한다고 대답했다. 이어진 질문들에도 동메달을 따서 기쁘다고 웃으며 대답했다. 내심 자극적인 대답을 원했던 기자들은 조금 실망한 눈치였다. 표정이라도 어두우면 그 찰나를 찍어 ‘판정 번복으로 침울한 표정의 조준호 선수’라는 제목이라도 내보낼 텐데, 나는 내내 밝은 표정으로 인터뷰에 임했다.

5분 남짓한 짧은 인터뷰를 하는 동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판정 번복 없이 동메달을 땄더라면 이런 국민적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까? (아마 그렇게 인터뷰할 일도 없었을 거다.) 금메달을 목에 건 수많은 유도 영웅들 사이에서 통쾌한 한판승도 없는 나라는 선수가 기억에 남았을까? 인터뷰장에 들어가기 전에 했던 생각들을 다시 곱씹었다.

이런 일이 하필 나에게 일어나서 다행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올림픽 출전에 나라는 선수의 존재를 각인시킬 만한 일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하필 8강에서, 일본 선수와의 경기에서 심판이 판정을 번복해주어서 다행이다.

“신이시여! 이건 시련이 아니라 기회였군요!”
깨끗하게 경기 결과에 승복하는 내 모습을 보고 감사하게도 국민들은 더욱 열광해주셨다. 낯부끄럽지만 진정한 스포츠맨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생전 꿈도 못 꿔본 과분한 관심을 받았고 올림픽 이후 금메달리스트보다 더 많은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왜 하필 나에게만 이런 일이 벌어지느냐고 통탄했던 그 일이 나에게만 일어난 행운이 되어 삶의 역전승을 가져다주는 통쾌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삶이란 복잡해 보이지만 단순하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상황과, 내 의지로 일어나는 선택이 씨줄과 날실이 되어 삶을 지탱한다. 그렇기 때문에 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상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라는 씨줄에 선택이라는 날실을 엮는 것뿐이다. 신은 이겨낼 수 있는 시련만 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겨낼 수 있는 시련은 언젠가 반드시 나에게 힘이 되어준다. 그러니 다가오는 시련 앞에, ‘하필 나에게만’ 일어난 상황 앞에 콧방귀를 뀌어버리자! “흥!” 하고, 크게.

우리 앞에 놓인 이 길은 누군가에게는 잔디밭, 누군가에게는 자갈밭, 누군가에게는 또 가시밭길일 수도 있다. 가시밭길에 선 사람은 억울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내가 잔디밭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부러운 마음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주저앉지 않고 가시밭길이라도 묵묵히 걷다보면, 잔디밭을 걷는 사람은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을 얻게 된다. 단단한 굳은살이 밴 발이 그것이다. 잔디밭만 걷던 사람은 가시밭길을 걷기 어렵지만, 가시밭길을 걷던 사람은 마침내 잔디밭을 만났을 때 훨훨 날아다닐 수 있다. 고단한 길 앞에 서 있다는 것은, 그만큼 나를 더 단단하게 다질 기회와 마주하고 있는 셈이라고 할까.

추신
이제 앞으로는 영영 꺼낼 일이 없을 것 같아 조금 덧붙이는 이야기다. 런던올림픽이 끝나고 2년 뒤, 내가 속해 있는 한국마사회 팀에 재일교포 선수가 들어오면서 그분의 어머니가 나와 경기했던 일본 선수 에비누마 마사시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주셨다. 그는 시합장으로 출발하기 전 침대 위에 짐을 모두 싸고 유서까지 썼다고 한다. 진짜 목숨을 걸고 경기에 출전한 것이다.

어쩌면 나에겐 억울한 판정 번복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선수에겐 기적 같은 승리였다. 그날의 경기 결과는 그에게도 나에게도 우리 삶에 꼭 일어나야만 했던 일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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