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2라운드 50년>
돈 문제의 기본정신
- 가난뱅이 되지 않기
“나는 안전한 게 중요해!”
내가 운전할 때 아내한테 자주 듣는 말이다. 차 간격이 좁다거나 급하게 차선변경을 했을 때 아내가 하는 말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어이 참, 이 정도 가지고….’
그리고 하나가 더 떠오르곤 한다.
‘아, 저 양반 9번 유형이지….’
사람의 성격유형을 분석하는 애니어그램에 나오는 표현이다. 내가 배운 9번 유형은 어떤 결정을 할 때 이것저것 다 따져보고 신중하게 결정한다. 대신 한번 결정하면 오래 한다. 또 안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결정을 쉽게 빨리하지 못한다.
그에 비에 나는 새로운 것에 크게 당황해하지 않는 편이고, 아내보다는 위험한 것도 감수하는 편이다. 운전하면서 연료가 얼마나 남았는지에 대해서도 나는 거의 걱정을 하지 않는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설사 연료가 떨어졌다 해도 그 상황에서 대처하면 되지 별 큰일이야 나겠느냐고 생각한다. 술기운에 나는 친구들에게 이런 호기도 부리곤 했다.
“그래야 인생이 재밌는 거 아냐!”
돈 문제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삼십 대 때, 돈이 궁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돈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런 내게 아내는 늘 불평을 늘어놓았다.
“나는 쌀독에 쌀이 충분해야 안심된단 말이야!”
세월이 지나 생각해 보니, 그게 아내의 엄살이나 엄포만은 아니었다. 아내는 돈, 시간, 음식 등 모든 것이 넉넉해야 안심하는 성격이다. 그런 아내한테 딱 맞는 게 재무설계 원칙이다. 잘 되는 것보다 망가지지 않는 걸 기본으로 생각하는 거 말이다.
오래전에 미국 재무설계 회사 대표가 쓴 책을 본 적이 있다. 그는 자기 회사는 고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했다.
“당신을 부자로 만들어 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가난뱅이가 되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게 그 회사의 기본정신이라고 소개했다. 그 대목에서 나는 더 이상 책을 읽을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생각하면서 천천히 읽는 편인데, 저자의 그 설명을 소화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떠올랐다.
‘돈 내고 재무상담 받으러 온 사람들에게 이렇게 얘기해도 되나? 그래도 손님들이 안 떨어진단 말이지? 그 배짱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거지?’
그러나 저자의 책을 읽어가면서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저자가 말하는 것은, 가난뱅이가 될 만한 위험에 고객을 노출시키지 않겠다는 것이다. 짧은 시간에 짜릿하게 돈 버는 길로 안내하지 않고, 천천히 오래 걸려서 밋밋하게 조금씩 성공하는 방법을 제시하겠다는 것이다. 급하고 똑똑하고 열렬한 보통의 한국 사람들 입맛에는 많이 안 맞는 방법이다.
그 후로 나는 재무설계를 더 배워가고 실제 상담을 해가면서 ‘가난뱅이 되게 하지 않는’ 재무설계의 기본원칙을 몸으로 익혀갈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나와 동료들이 고객들에게 위험상품을 절대 하지 말라고 하는 건 아니다. 문제는 위험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위험을 감당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예를 들어, 주식투자의 경우 나는 주식투자를 보통 권하지는 않지만 고객의 성격과 재무상태에 따라서는 일정 정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객 중에는 주식투자를, 내가 보기에도 참 맘에 들게 하던 고객이 있었다.
고객의 재무상태는 좋은 편이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았거나 물려받을 예정인 재산이 꽤 됐다. 아내의 소득은 불확실했지만, 고객의 소득도 적은 편이 아니었다. 그는 의사자격증이 있지만, 뜻한 바가 있어 개업하지 않고 공무원이 됐다.
“저는 이런 회사가 잘 돼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투자합니다.”
고객은 자신이 투자한 회사에 대해 자신 있게 말했다. 그는 또 그 회사와 연관이 있는 정치인에 대한 호감도 드러냈다. 분석에 따른 투자라기보다 의지이자 바람처럼 보였다. 나는 그 종목에 대해 특별히 해줄 말이 없기는 했지만, 길게 볼 때 고객의 선택이 옳아 보였다.
일단 고객은 자신의 주식투자 총액을 정해 놓고 있었다. 당시 8천만 원 정도였는데, 상황에 따라 추가로 3천만 원까지는 더 늘릴 생각이라고 했다. 고객의 자산과 소득을 생각하면, 최악의 경우 그 돈이 다 없어져도 크게 문제 되지는 않아 보였다. 자산과 소득대비 규모와 비율을 보건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라는 점에서 나는 고객의 주식투자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음으로 볼 건, 고객이 이른바 가치투자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는 노무현 정부 시절이었는데, 투자수익이란 면에서는 부동산 투자가 한창 좋을 때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사회의 투명성이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개선되는 상황이었다. 그런 추세로 볼 때, 짧게 보면 큰 수익을 내기 어렵지만, 길게 보면 고객이 투자한 회사는 사회의 투명성이 올라가는 추세와 궤를 같이할 회사였다. 단지 고객의 개인 의지 차원이 아닌, 적어도 10년을 내다보는 장기투자 관점에서는 분명히 고객의 판단이 옳아 보였다.
여기서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이 고객의 재무체력이다. 고객은 주식투자 금액을 갑자기 회수할 필요가 없다. 값이 떨어져도 견딜 수 있다. 이런 경우가 가장 바람직한 경우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거기에 돈까지 따라주는 경우 말이다.
돈은 네 발 달린 동물이라 사람이 못 쫓아간다는 말이 있다. 쫓아갈 게 아니라 돈이 나를 따라오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당연히 내가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 잘하는 일을 그것도 오래 해야 한다. 그러면 위험하지도 않으면서 서서히 돈도 따른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이렇게 되묻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살면 재미없어서 어떻게 사느냐?”
이런 분들에게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 없다. 그냥 그렇게 사셔야 한다. 망하고 흥하는 짜릿함을 마음껏 느끼며 사시라고. 그것도 한평생이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마음고생 하고 속병 생기는 일이라도 적으면 다행이다.
위 고객처럼, 주식투자를 하더라도 위험을 자기 능력 범위 내에서 관리한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러나 투자를 하는 사람들 대다수는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손실을 볼 것이라는 점보다 나는 위험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 더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런 것이 바로 돈에 끌려다니는 삶이기 때문이다.
주식투자를 예로 들었지만, 사실 주식만 해도 어떤 면에서는 관리가 가능한 투자다. 사업투자는 주식보다 위험이 더 크다. 본인이 사업을 직접 운영하는 것이든, 어떤 사업에 돈을 투자하는 것이든,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이든, 돈을 빌려주는 것이든, 이런 것들은 주식보다 더 위험한 면이 있다. 주식에서도 비상장주식은 상장주식보다 투자위험이 더 크다.
나와 동료들이 주로 상담했던 고객들은 위와 같은 투자를 적게 하는 편이었다. 그런 성향의 고객들이 와서 그랬을 수도 있고, 우리가 그런 방향으로 상담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아무튼 그 고객들은 그래서 큰돈을 벌지 못했을 수도 있으나 반대로 큰 손해도 보지 않은 편이다. 나는 이런 고객들의 삶이 더 편안하고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