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2라운드 50년>
“집 한 채밖에 없습니다.”
자산과 부채를 살펴보면서 선정 씨 남편이 한 말이다. 내가 말없이 자료를 보는 사이에 그는 덧붙여 말했다.
“보험도 없고, 적금도 하나도 없고, 대신 빚도 전혀 없어요.”
특히 “빚도 전혀 없어요” 하는 말은 좀 더 힘을 주어 말했다. 살펴보니 정말 그렇다. 이런 가정은 흔치 않다. 좋은 건가? 한마디로 말한다면, 좋은 것이다.
농담으로 이런 말을 하지 않는가. “남자친구가 좋아 결혼했는데, 은행 빚이 따라왔어요.”
그렇다. 대부분의 중산층에는 빚이 있다. 은행 빚만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미국에서 금리를 올렸으니 우리도 올려야 하는데, 가계 빚이 너무 많아서 그럴 수도 없다는 식의 뉴스를 우리는 자주 들으며 산다. 그걸 뉴스에서 듣자니 남 얘기인 것 같지만 사실 우리 모두의 얘기다.
집 한 채뿐이라고는 했지만, 선정 씨 집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지역인 강남에 있는 아파트다. 당시만 해도 8억이 넘었고 지금은 10억을 훌쩍 넘는 고가 아파트다. 그런데도 은행대출이 하나도 없으니 얼마나 좋은 재무 상태인가.
사실 이 아파트는 그 부부만의 힘으로 구한 건 아니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당시는 대출이 꽤 있었으나 그동안 열심히 아껴 모아 대출을 다 갚았다. 그러니 이제 빚 걱정도 없고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남편은 좀 불만인 듯했다. 말투가 그랬다. 말 그 자체만으로 보면, “우리 집은 빚이 하나도 없어요” 하며 좀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거지만, 말투는 ‘글쎄 빚 갚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니까요’ 하는 불평이 묻어 있었다.
누구나 그렇지만, 더구나 조심스러운 성격인 선정 씨 역시 빚을 좋아할 리 없다. 선정 씨는 보험도 안 들고, 투자상품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로지 빚만 갚았다. 남편 입장에서는 돈이 필요할 때 집을 쪼개 쓸 수도 없고, 답답하기만 했다. 돈이 필요하면 집을 담보로 빌려 쓸 수는 있겠지만, 선정 씨가 지금껏 빚만 갚아온 걸로 봐서는 집담보대출을 동의할 것 같지는 않다. 남편은 그런 것이 불만스러웠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방법도 심하지만 않으면 나쁘지 않다고 본다. 집이야 특별한 사태만 아니라면, 자산가치가 폭락할 것은 아니니, 젊어서 활용하지 못했더라도 늙어서 노후자금으로 잘 활용하면 된다. 지금은 주택연금제도를 이용하면 노후설계로 안성맞춤이다. 죽을 때까지 연금으로 받아서 쓰고 집값이 남으면 자녀에게 상속하면 된다.
당시 나는 주택연금으로 노후설계를 계산하지는 않았다. 주택연금 요건 중에는 9억 원 이하인 주택만 해당된다는 조건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직 고객의 나이가 젊어 노후설계를 구체적으로 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당시 집값을 따져서 월 생활비와 노후기간을 계산해 집값으로도 노후가 충분하다는 설명을 해드렸다. 주택연금을 활용하든 담보대출을 하든, 그건 그때 가서 판단해도 될 일이다.
이렇게 가장 큰 걱정거리였던 노후자금이 해결됐다고 생각하니 부부의 돈 문제는 덜 심각해졌다. 이제 나머지 중 돈이 가장 많이 드는 건 자녀교육비인데, 특별히 남다르게 조기유학을 보낸다거나 하지 않는다면 이 가정에서는 충분히 감당할 만한 문제다. 게다가 자녀도 하나다. 그러니 이제 걱정 끝.
그래서 이 가정은 그 이후로 부부간에 돈 문제로 다툼도 적어졌고, 남편의 이직 등에 대해서도 생각이 유연해졌다. 아주 초보적이지만, 미래의 돈 문제 불안을 숫자로 확인해 보고, 부부가 상담사와 같이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면서 뜻을 서로 확인하면서 얻은 성과다.
선정 씨는 내 책을 읽고 상담을 받으러 온 고객이다. 남편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싶어 하는데, 선정 씨는 걱정스러웠다. 집 말고는 자산이 하나도 없는데, 남편이 대기업 직장을 그만두겠다는 게 통 맘에 들지 않았다. 남편은 자신이 보기에는 별 돈도 되지 않는 별자리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데, 지금 다니는 직장은 근무시간이 너무 길어 시간을 뺄 수 없다면서 선배가 하는 작은 회사로 옮기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문제로 갈등이 깊어지던 중 내가 쓴 책을 선정 씨가 읽게 됐고, 같이 상담을 받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에 남편과 같이 온 것이었다.
선정 씨 역시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다. 자녀는 아들 하나다. 둘이 대기업 다니는데도 검소한 편이어서 소비지출은 많지 않은 편이었다. 그렇게 십 년 가까운 결혼생활 동안 아파트 담보대출을 다 갚은 것이었다. 대신 다른 자산은 정말 하나도 없었다. 한편으로는 빚을 다 갚았으니 안심되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자산이 하나도 없으니 걱정스럽기도 했다. 이런 애매한 상태에서 남편은 돈을 더 적게 버는 직장으로 옮기겠다고 하니 선정 씨 고민이 깊어졌던 것이다.
상담하기 전에 선정 씨가 보내온 재무상태표를 보면서 나는 선정 씨네 재무상태가 ‘다른 가정들과 많이 다르구나’ 하는 생각은 하면서도 ‘이런 상태인데, 무슨 걱정이 있지?’ 하는 생각도 했다. 유료 재무상담을 받는 고객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소비지출 면에서는 건전한 편이다. 평균소득도 조금 높은 편이다. 그렇지만 대부분 빚이 있고, 써야 할 돈(재무목표)을 맞추기에 다소 벅차게 느껴지는 상태다. 그런데 선정 씨네는 빚도 없고, 재무목표도 과한 게 전혀 없었다. 아직 30대라 젊은 탓도 있지만, ‘그냥 죽 이렇게 살면 되겠네’ 하는 느낌이 들었다.
상담을 해보니 미래의 불안에 대한 느낌이 부부가 서로 달랐다. 누구나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정도의 차이가 있으나 불안은 있기 마련이다. 불안의 가장 큰 요인은 불확실함이다. 재무상담은 그 불안을 줄이기 위해 수치를 동원한다. 장차 필요한 돈과 준비 가능한 돈을 숫자로 맞춰보는 것이다. 그런데 몇십 년 앞의 상황에 대한 수치가 어찌 제대로 맞겠느냐마는, 그래도 전혀 하지 않은 것보다는 훨씬 낫다. 선정 씨네가 정말 그런 경우다.
보통 상담을 하면 부인이 말을 많이 한다. 그런데 선정 씨는 반대였다. 재무상태표는 부인이 준비했는데, 상담할 때는 남편이 말을 더 많이 했다.
“이 정도면 괜찮은 재무상태인데요.”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이렇게 느낌을 말하자, 남편은 자신의 생각이 바로 그렇다는 듯이 정색을 하며 말을 받았다.
“그렇다니까요. 그런데 이 사람은 괜히 걱정이 많아요.”
내가 “빚이 없네요.”, “다른 금융자산이 없네요.”, “집값은 어떻게 알아본 건가요?” 등 질문을 할 때마다 남편이 대답했다. 남편은 내가 자신의 뜻과 통하는 바가 있다고 느껴지자 다소 활기차게 얘기했다. 선정 씨는 큰 눈을 껌벅이며 열심히 들었다. 그러다 소득추이를 얘기하게 되자 선정 씨가 말문을 열었다.
“이 사람은 대책 없이 직장을 그만두겠다는 거예요.”
남편이 곧바로 말을 받았다.
“그게 아니고….”
이런 과정을 거쳐서 첫 상담을 마쳤다. 나는 부부가 말한 내용을 있는 그대로 설계에 반영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별문제 없이 노후설계까지 잘 해결됐다. 노후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아 변수가 많다고는 하지만, 대략 큰 문제 없이 잘 될 거라는 결론이었다.
두 번째 상담에서 이런 흐름을 보여주자 선정 씨의 낯빛이 많이 밝아졌다. 선정 씨가 내 설명에 많이 동의하자, 남편은 자신의 이직하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되어 좋아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무난하게 상담은 끝났다. 큰 논란이나 걱정이 없는 좀 평범한 상담이었다.
그래서 나는 좀 잊고 있었는데, 한 일 년쯤 후에 선정 씨한테서 연락이 왔다. 남편과 함께 저녁을 같이하자는 거였고, 그 자리에 부부는 아이도 함께 데리고 왔다. 그 사이 남편은 앞에서 말한 대로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작은 회사로 옮긴 상태였다. 그런데도 부부의 낯빛은 더 밝아 보였다. 하긴 뭔가 더 좋아진 일이 있으니 나를 보자고 한 것일 거다.
“선생님 덕에 저희 부부 사이가 좋아졌어요.”
조금 짐작은 했지만, 선정 씨가 이렇게까지 얘기하니 나는 조금 멋쩍어졌다.
“내가 뭐 해준 게 있나요.”
나는 이렇게 얼버무렸는데, 선정 씨는 상담 이후 부부 사이에 얘기가 잘 되고 사이가 더 좋아졌다며 내 공이 컸다며 나를 부추겨 세웠다. 그런 얘기를 듣는 나도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사실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선정 씨 자신이다.
첫째, 재무상담을 받을 마음을 먹은 공이 크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처럼, 돈 문제도 차분히 한번 따져보자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 많이 벌 생각만 하지, 왜 언제까지 얼마를 벌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벌고 쓰는 문제를 의식하고 설계한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재무설계는 효과가 있고, 상담을 받을 마음을 먹는다는 것 자체로 반은 해결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러니 선정 씨 공이 큰 것이다.
둘째, 선정 씨의 남편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 탓이다. 선정 씨의 미래에 대한 불안이 적어졌기 때문에 남편의 생각을 편하게 듣게 된 것이고, 이내 남편의 이직까지도 동의한 것이다. 이렇게 선정 씨가 남편의 뜻에 동의해 주자, 남편 역시 삶에 더 활력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러니 애한테도 좋은 분위기가 조성되었을 것이고, 식사 자리에 아이도 데리고 나온 것 아닐까?
그 후로 또 한참 시간이 흐른 다음에 만났을 때는 온달이와 보리도 함께 만났다. 역시 선정 씨 아이도 함께 왔다. 그다음 만났을 때는 선정 씨가 남편이 쓴 책을 내밀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처음 상담을 받을 때로부터 선정 씨가 직장을 그만둘 때까지 6~7년은 걸린 것 같다. 미래가 불안해서 남편의 이직을 걱정하던 선정 씨, 남편의 소득이 적어졌지만 남편의 일에 만족하고 가족이 더 행복해지는 걸 느낀 선정 씨, 아이를 위해 또 자신을 위해 육아휴직과 사직을 결단한 선정 씨, 그녀는 계속 변화해 왔다. 부부의 수입 합계는 계속 줄어드는 방향으로, 반대로 가정의 행복감은 늘어나는 방향으로.
처음에 선정 씨는 나 때문에 자신들이 행복해졌다며 나에게 고맙다고 했다. 그런데 그 후로 선정 씨는 계속 스스로 진화했다. 뭔가 큰 흐름이 잡히자 그다음 일들은 어렵지 않게 해결해 나갔다. 나는 옆에서 계속 그 모습을 확인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살펴보는 건 참 즐거운 일이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기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