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굿북 Dec 18. 2017

01. 독서하는데 왜 달라지지 않을까?

<천년의 독서>





영원한 텍스트의 샘

독서하는데 왜 달라지지 않을까? 공부하는데 왜 제자리를 맴도는 걸까? 왜 오히려 더 뒷걸음질 칠까?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도 이런 상황을 아파하던 사람이 있었다. 어렵사리 진리와 행복의 길에 들어섰던 동료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핍박에 흔들리고 유혹에 흔들렸다. 동료이자 스승이었던 그는 멀리서 이 소식을 듣고 편지를 썼다. 지금 가는 길이 얼마나 위대한 길인지 알려주고 싶었다. 넘어지지 말고 돌아서지 말라고, 흩어지지 말라고 격려해주고 싶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편지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저런 말을 하던 스승이 갑자기 이야기를 멈추었다.

“할 말은 많지만 여러분의 귀가 어두워졌습니다. 더 이상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편지를 받은 사람들도 숨을 죽였다. 잠시 후 스승이 목소리를 높였다. 꾸짖기 시작했다.

“세월이 이 정도 지났으면 여러분은 이미 선생이 되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또다시 누군가에게 기초를 배워야 할 처지입니다. 딱딱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서점의 인문학 코너가 북적거린다. 사람들이 책을 들고 있다. 젖먹이용 책들이다. 엄마들이 먼저 먹고 소화해서 젖을 물려준다. 모두가 턱받이를 한 채 오물거린다. 딱딱한 음식을 먹는 사람은 쉽게 볼 수 없다. 기껏해야 이유식 코너 앞에 몇몇이 있을 뿐이다. 젖먹이는 혁명도 개혁도 할 수 없다. 르네상스는 없다.

옛 스승이 계속 꾸짖는다.

“젖먹이는 어린네입니다. 참되고 불변하는 텍스트를 다룰 줄 모릅니다.”

이유는 간단하다. 직접 읽지 않고 항상 남이 걸러준 이야기에 만족한다. 참되고 불변하는 근원적 텍스트를 들고 씨름하지 않는다. 고전 읽기가 아니라 고전에 대한 책 읽기만 난무한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서점에서 단편소설집을 살펴본다. 텍스트를 스스로 즐길 수 있게 길을 열어둔 책을 찾기 어렵다. 단편소설집 상당수가 대학입시 수험서로 전락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심지어 소설 텍스트가 나오기 전에 줄거리를 미리 알려주는 책들이 수두룩하다. 문학 작품에서 줄거리를 미리 알려주는 것은 즐거움을 뺏는 일이다. 지성의 근육을 위축시키는 일이다. <감자>의 복녀가 타락하고 죽임당할 것을 미리 알고 읽게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그냥 빨리 파악하고 외우라는 것이다. 독자가 파고들 여백이 없다. 학생이 씨름할 빈자리가 없다. 화려한 편집과 그림과 요약이 텍스트와의 씨름을 대신하는 순간 독서는 죽는다. 교육도 죽는다. 젖 먹는 시기는 꼭 필요하지만 영원히 젖만 먹는 사람은 정상이 아니다.

“딱딱한 음식은 어른들 것입니다. 어른은 텍스트를 사용합니다. 텍스트를 가지고 지각과 여러 감각을 훈련시킵니다.”

옛 스승이 ‘어른’이라고 부른 사람들만이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맛볼 수 있다. 자신의 삶에서 가정에서 마을에서 나라에서 변화의 불씨가 될 수 있다. “근원으로!”를 외치며 르네상스가 회복했던 천년의 독서는 단순한 원어 읽기가 아니라 근원으로 돌아가는 독서였다.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텍스트와 씨름하는 몸부림이었다. 그들은 텍스트를 사용할 줄 안다. 산해진미(山海珍味) 어른들의 음식을 즐길 수 있다. 텍스트를 통해 지성의 근육을 끊임없이 단련한다. 그 결과 어떻게 되는가? 어른이 된다.

“그런 훈련으로 마침내 옳고 그름을 분별하게 됩니다.”

청문회 중계를 본다. 멀쩡하게 생긴 사람들이 거짓말을 해댄다. 그들의 프로필을 보면 박사는 기본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옳고 그름은 분별할 줄 모른다. 옛 스승이 말한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들이다.

문제는 독서다. 문제는 텍스트다. 우리는 계속 어떤 식으로든 책을 읽어왔다. 옛 스승이 묻는다. 우리는 어른인가, 젖먹이인가? 우리는 근원적 텍스트를 들고 씨름하는가, 남의 소화물만 우물거리고 있는가?

감사하게도 옛 스승은 분노로 끝내지 않았다. 고개 숙인 우리에게 부드럽고 힘있는 목소리로 말한다.

“우리 이제 기초를 벗어납시다. 어른이 됩시다.”

우리를 꾸짖은 옛 스승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약간 논쟁이 있지만, 그 편지만은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선명하게 전해지고 있다. 신약성경에 ‘히브리서’라는 이름으로. 물론 여기서 ‘참되고 불변하는 텍스트’로 풀어쓴 것은 기독교 성경을 가리킨다. 그것이 어떤 책이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책을 직접 읽고 씨름하는지 묻는 것이다. 옛 스승은 진리의 책을 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을 꾸짖고 있다. 그 텍스트에 직접 다가서지 않고 간접적으로 듣기만 하는 젖먹이들에게 거울을 들이대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참되고 불변한다고 믿는 텍스트가 있는가? 그런데 왜 그 텍스트의 세계로 직접 뛰어들지 않는가?


나에게 묻다.

1. 어떤 분야의 근원적 텍스트(고전 또는 그 분야 필독서)를 들고 홀로 씨름하며 읽어본 적이 있는가? 어떤 것이었는가? 어땠는가? 그 책이 여러분 인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2. 기회가 되면 꼭 읽고 싶은 근원적 텍스트가 있다면 무엇인가? 세 권만 적어보자. 왜 그 책들을 읽고 싶은가? 읽고 싶었는데 지금까지 왜 읽지 못했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05. 고양이 처럼 살기_꾹꾹이 체험 (마지막 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