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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Dec 22. 2017

01. 막다른 골목에 서다.

<고전 읽는 가족>


미친 짓이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미친 짓이었다. 학교에 잘 다니던 아이들을, 그것도 대한민국 인생살이에서 제일 중요하다는 청소년기에, 학교에서 나오게 했으니 분명히 그랬다.

양가 부모님들은 난리가 났다. 이해할 수 있었다. 학교에 가려고 산 넘고 물 건너 십리길 마다 않고 다닌 분들이다. 손주들이 학교를 그만둔다니 청천벽력일 수밖에. 가족들이 그 정도였으니 지인들의 반응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물론 역사를 바꾼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이었다. 서기 60년경 사슬에 묶인 채 자신을 변론하던 바울에게 유대 총독이 외쳤다.

“네가 미쳤구나. 공부를 많이 하더니 네가 미쳤구나.”

바울은 죄수의 몸이었지만 결국 바라던 대로 로마제국의 심장부로 들어갔다. 역사를 바꾸었다. 하지만 미친 사람들이 모두 역사를 바꾼 사람들은 아니었다. 감히 우리에게 적용할 말도 아니었다. 우리는 그런 거창한 결단으로 거창한 여정을 시작한 게 아니었다. 다만 절박했다. 가족이 무너지고 있었다. 방향 없이 끌려다니고 있었다. 목이 말랐다. 지금 여기에는 답이 없었다. 떠나야 했다. 어딘가에, 보다 확실한 것에 미쳐야 했다. 모험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겉으로 보기에 우리 집은 멀쩡했다. 나름 행복했고 큰 문제도 없었다. 두 아이는 학교에 잘 다녔다. 학교 공부를 곧잘 했고 친구들과도 잘 지냈다. 우리 부부도 그랬다. 밖에서 활발했고 제 역할에 나름 충실했다. 인생살이 통증이야 있었지만 겉은 멀쩡해 보였다.

문제는 그 ‘통증’이었다. 어느 날 질문이 찾아왔다. 성장통일까, 아니면 큰 병의 전조일까? 이미 깊어져 나오는 증상은 아닐까?

아이들의 가슴이 굳어가고 있었다. 부모가 전해주는 옛사람들의 지혜를 스펀지처럼 받아들이던 시절이 막을 내리고 있었다. 차갑고 딱딱해지는 방어막 뒤로 아이들의 마음에 달려드는 것들이 보였다. 욕망의 문화, 돈의 환상, 과대포장된 대학의 가치와 강요, 생각 없는 공부, 판단 없는 열심, 이웃이 빠진 성공 신화 같은 것들이 스며들고 있었다. 영원한 가치를 지닌 것들이 아니었다.

무언가 말을 꺼내려 하면 우리를 에워싼 거대한 시스템이 신호를 보냈다. 각자의 영역이 솟아오르며 서로를 밀어냈다. 아빠는 아빠 일이나 잘하고, 엄마는 엄마 일이나 잘하고, 학생은 학교 공부나 잘하라고 내몰았다. 쿵쿵 소리를 내며 통로들이 닫히기 시작했다. 두려웠다. 부모의 소외됨이 두려운 게 아니었다. 성장이 두렵고 통제가 그리운 게 아니었다. 변해가는 방향이 문제였다. 가족이 함께할 시간과 공간이 철저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불변의 지혜를 나눌 자리가 사라지고 있었다. 언젠가 아이들을 떠나보낼 날이 있음을 잘 알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많은 집이 크고 작은 병을 앓고 있었다. 집은 엘리베이터였다. 밖에서 그리 재잘대던 사람들이 문을 열고 들어서면 침묵한다. 아주 가까이 선다. 어색한 위치 어색한 숨소리 어색한 시선. 팔이 스친다. 얼른 몸을 뺀다. 계기판을 본다. 층수가 변한다. 내릴 때만 기다린다. 문이 열린다. 제 길로 간다. 재잘대기 시작한다. 아빠는 돈벌이에 바쁘고 엄마는 자녀(진학)교육에 바쁘고 아이들은 정해진 공부에 바쁘다. 뭔가에 합격해야 잠시 안도한다. 대학가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늙어간다. 아빠 엄마는 떠난다. 어른이 된 아이들은 부모의 과업을 반복한다. 대한민국의 일상이다.

아빠는 인생에서 배운 가치들을 전해주지 못하고 돈만 전해준다. 엄마는 사랑하지 못하고 다그친다. 절대선(絕對善)은 대학 합격뿐이다. 부부는 그 과업을 위해 동거할 뿐이다. 필요하면 기러기가 되어 부부는 찢어진다. 아이들의 생각은 엉뚱한 것들이 지배한다. 학교는 모든 것을 가르치겠다며 아이들을 데려가 놓고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한다. 교육은 학원이 대신하고 학원은 요령만 가르친다. 무엇이 옳은지 아무도 가르치지 않는다. 희미한 목마름 덕에 『정의란 무엇인가』가 수백만 부 팔렸지만 그마저 책장에 전시되고 논술시험 대비 자료로 요약될 뿐이다. 대한민국의 실상이다.

한국형 인문학은 별로 어렵지 않다. 플라톤의 『국가』를 다 읽을 필요가 전혀 없다. 1권 중간에서 “정의는 강자의 유익일 뿐”이라는 트라시마코스의 일장연설에 100% 동감한 후에 나머지는 요약본으로 읽고 논술시험을 준비하면 된다. 아, 필수 암기사항. 기게스의 반지, 동굴의 비유, 이상국가의 세 가지 계급.

모두 ‘공부’에 미쳐 있다. 도대체 공부가 뭔가? 뭘 공부하는가? 왜 공부하는가? 공부해서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공부] (명사) 대학 가는 기술. 할 수 없이 하는 것의 대명사. 자유의 반대말. 친구를 이기는 것. 부모가 자녀에게 시키는 것. 모든 좋은 것을 포기하는 것. 모든 의무에서 빠질 수 있는 면죄부. 영원한 낙오자의 갈림길. 학교보다 학원에서 더 잘 배울 수 있는 것. 대학 들어가면 끝나는 것, 취업하면 끝나는 것, 승진하면 끝나는 것. 제발 좀 끝났으면 하는 지겨운 것.

국문학자 양주동은 까까머리 중학생이던 어느 날 기하학의 위력에 깜짝 놀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망국의 슬픔을 당한 내 조국! 오냐, 신학문을 배우리라. 나라를 찾으리라. 나는 그 날 밤을 하얗게 새웠다.”

요즘 어디서도 이런 말을 하며 공부를 즐거워하고 공부에 매달리는 청소년을 본 적이 없다.

미쳤다. 누가 미친 것일까? 열차에서 내리는 사람이 미친 사람일까? 내리지 않으려는 사람이 미친 사람일까? 어떻든 내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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